릴로

"가지 마라. 그것은 사패천이 파 놓은 함정이다."

그늘진 음성이 청명진의 귓가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백무린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마치 만 년 동안 마르지 않는 빙하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한기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차가운 경고도 청명진의 귓가에 휘몰아치는 처절한 비명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명진아...! 어서 피하거라...! 이놈들의 목적은 네놈이다...!"

빙굴 초입을 가득 메운 붉은 안개 너머로, 또다시 청운의 뼈가 바스러지는 둔탁한 파열음이 메아리쳤다.

청명진의 전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떨렸다. 단전 깊은 곳, 백무린의 손길로 겨우 자리 잡은 정종의 자하진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검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동결되듯 굳어 들어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무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야수의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함정이라 하셨습니까."

청명진의 목소리가 낮게 르릉거렸다.

"사형들이 저기서 사지가 찢기며 제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화산의 마지막 핏줄들이 진흙탕에 구르며 도를 구하고 있는데, 소자더러 이곳에서 숨죽이고 목숨을 보존하라 하십니까. 그것이 사부님이 말씀하시던 화산의 길입니까?"

"길은 스스로 걷는 자에게만 보이는 법이다. 눈앞의 혈기에 눈이 멀어 대국을 보지 못한다면, 네가 걷는 길의 끝에는 오직 멸문이라는 초라한 무덤만이 기다릴 뿐이다."

백무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는 이미 흑백의 무채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청명진을 향한 일말의 안도와 연민이 일어난 순간, 심마의 저주가 그의 오감을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한 탓이었다. 눈앞의 제자가 뿜어내는 자색의 기운조차 흐릿한 회색빛 잔상으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멸문이라 하셨습니까."

청명진의 입술 끄트머리가 뒤틀리며 기괴한 미소를 그려냈다.

"사형들이 죽고 나면, 홀로 남은 화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가겠습니다. 설령 그곳이 사패천이 파 놓은 만장심연(萬丈深淵)이라 할지라도, 제 검으로 그 심연을 가르고 사형들을 데려오겠나이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청명진의 신형이 대지 위를 박찼다.

그것은 화산파의 경공인 운해보법(雲海步法)이 아니었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자하진기를 폭발적으로 사지에 주입하여, 마치 한 자루의 뇌전이 공간을 찢고 나아가는 듯한 무자비한 쾌속이었다. 순식간에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청명진의 등 뒤로, 설자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명진아! 멈추거라!"

설자화가 그를 뒤쫓으려 발을 내딛는 순간, 백무린이 그녀의 어깨를 나직하게 가로막았다. 그의 손길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어라. 저놈의 도심(道心)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독종의 그것이다. 스스로 피를 흘려 깨닫지 못한다면, 자하신공의 상급 구결을 전한다 한들 그저 살인귀의 흉기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무린 당신의 몸은...! 지금 진기가 폭주하고 있지 않소!"

설자화의 눈동자에 깃든 우려를, 백무린은 보지 못했다. 그의 시야는 이미 암전(暗轉)에 가까운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직 이각(耳覺)과 피부로 느껴지는 대지의 진동만이 그의 감각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백무린은 소매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배어 나오는 검은 피를 삼켰다. 과거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대수라의 업보가, 지금 그의 심장과 허물어진 단전을 가차 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가야 한다. 저 바보 같은 놈이 제 목숨을 버리기 전에."

무린은 무거운 신형을 움직였다. 대지를 딛는 그의 발걸음은 소리도 없었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허공을 밟고 나아가는 그의 신형 뒤로, 앙상한 매화나무의 썩은 잎사귀들이 소리 없이 바스러져 내렸다.

***

빙굴 초입의 넓은 공터는 이미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화산파의 도복을 입은 자 세 명이 피떡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사지를 밟고 선 자들은 종남파의 문양이 새겨진 도복 위에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도검에서는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흐흐흐, 과연 올 것 같으냐? 그 겁쟁이 놈이 제 사형들을 구하겠다고 이 사지로 기어 들어올 리가 없지."

복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한이 청운의 머리칼을 움켜잡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청운은 이미 이가 부러지고 한쪽 눈이 부어올라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명... 진이는... 오지 않는다... 네놈들의... 대가리를... 깨부수러... 가고 있을... 뿐이다..."

"이 쥐새끼가 아직도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거한이 도의 손잡이로 청운의 안면을 후려치려는 찰나였다.

슈우우욱-!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한 줄기 보랏빛 검기가 안개를 뚫고 쏘아져 왔다.

"커억!"

거한의 손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단 한 번의 격돌도 없이, 오직 검기만으로 두꺼운 뼈와 살이 두 동강 난 것이었다. 잘려 나간 손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지는 핏물이 하얀 눈밭을 검붉게 적셨다.

"누구냐!"

복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세우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의 형상이 드러났다. 녹이 슬고 이가 빠진 초라한 철검을 쥔 청명진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형의 자색 기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무린이 전수해 준 자하진기가 그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청명진이다."

그의 음성은 차가웠으나, 그 이면에는 억눌린 폭발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형들을 밟은 발을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그 발목을 잘라 네놈들의 목구멍에 쑤셔 넣어 줄 것이다."

"오만방자한 놈! 고작 화산의 잔당 주제에!"

복면인 세 명이 일제히 청명진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검 끝에서 종남파의 정종 무학인 태을검강(太乙劍罡)의 푸른 빛이 일어났다. 사방의 대기가 검기에 쓸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청명진의 눈에는 그들의 검로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단전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마교의 씨앗, 즉 마태(魔胎)가 미세하게 요동치며 그의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끌어올린 덕이었다. 동시에 백무린이 가르쳐준 화산의 기초 검법, 분뢰수(奔雷手)의 구결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빠른 것은 강한 것을 이기고,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을 벤다.'

청명진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스어억-!

그의 신형이 복면인들의 검망 사이를 스치듯 통과했다. 찰나의 순간, 철검이 세 번의 호선을 그렸다. 번개가 치는 듯한 찰나의 쾌검이었다.

"끄아아악!"

"내, 내 다리가...!"

복면인 두 명의 무릎뼈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머지 한 명은 목줄기가 깨끗하게 그인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 분수를 뿜으며 절명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녹슨 철검이 정종의 자하진기를 만나 천하의 신병이기 못지않은 살상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청명진의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매화의 잔향은, 과거의 화려함 대신 피비린내를 머금은 살벌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무릎이 잘려 나간 복면인이 기어 다니며 울부짖었다. 청명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걸어가 그의 가슴팍에 철검을 꽂아 넣었다.

푸학-!

검이 흉판을 관통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사방을 메웠다. 청명진의 얼굴에 튄 핏자국이 그의 서늘한 눈빛과 대비되어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청명진이 검을 뽑아내며 청운에게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고,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그가 승리감에 젖어 방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터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기암괴석의 그늘 속.

한 자루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깨에 붕대를 감고,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을 빛내는 자. 청명진에게 패배하고 오른손의 검마저 잃었던 종남파의 소가주, 종남학이었다.

그의 한쪽 어깨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으나, 그의 왼손 끝에는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가느다란 침이 쥐어져 있었다.

'청명진... 이 천박한 쥐새끼가 감히 내게 굴욕을 주었느냐.'

종남학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투와 열등감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는 품속에서 비장의 무기인 파혼침(破魂針)을 꺼내 들었다. 영혼을 좀먹고 내력을 부식시키는 종남파의 사악한 금기 중의 금기였다.

'자하진기를 얻었다 한들, 이 파혼침 한 방이면 네놈의 단전은 영원히 썩어 들어갈 것이다. 천재의 이름도, 화산의 영광도 모두 이 진흙탕 속에 묻어주마.'

종남학은 청명진이 청운을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이는 찰나의 순간을 노렸다. 등 뒤, 완전한 사각지대였다.

그가 숨을 죽이고 파혼침의 기운을 극도로 압축했다. 침 끝에서 뿜어지는 은밀한 살기는 대기 중의 안개에 묻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스윽.

종남학의 손가락이 튕겨 나갔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죽음의 비수가 청명진의 명치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

그 시각, 수십 장 뒤의 나무 위.

백무린의 가슴이 턱 막혔다.

시야는 완전히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뇌리 속에 기이한 왜곡 현상이 일어났다. 청명진의 시각과 자신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공명하는 천벌의 중간 단계가 발현된 것이었다.

흑백의 세상 속에서, 청명진의 등 뒤로 날아드는 푸른빛의 침 한 자루가 백무린의 영혼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파혼침...!'

과거 무림을 주름잡던 시절, 수많은 고수들을 소리 없이 꺾었던 그 비열한 암기였다. 저것에 단 한 터럭이라도 스친다면, 청명진의 단전에 깃든 자하진기는 물론이고 그의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안 된다."

백무린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단전의 허물어진 벽을 강제로 짓이기며, 남아 있는 수명의 불꽃을 태워 무형의 검기(無形劍氣)를 자아냈다.

파바밧-!

허공을 가른 백무린의 손끝에서 발해진 무형의 검기가 청명진의 사각지대를 가로막았다. 날아들던 파혼침이 무형의 검벽에 부딪혀 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끄학...!"

동시에 백무린의 입에서 뜨거운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무린!"

설자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축했다. 백무린의 전신에서 핏물이 배어 나와 그의 흰 옷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타인의 운명에 관여하고 기연을 지켜낸 대가, '겁경무량'의 천벌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으로 찾아왔다.

단전 내부의 진기가 폭주하며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검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끊임없이 치밀어 올랐다. 시각에 이어 청각마저 웅웅거리는 이명음과 함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막았다... 저놈은... 살았다..."

백무린은 피차오르는 목구멍을 억누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죽어가는 자의 그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왜 매번 저 아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는 거요! 대체 저 아이가 당신에게 무엇이기에!"

설자화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무린의 뺨을 적셨다. 무린은 그 눈물의 온기조차 느끼지 못한 채, 오직 멀어져 가는 제자의 기운만을 감각의 끝자락으로 붙잡고 있었다.

"저놈은... 내가 지어야 할... 마지막 매화꽃이다..."

***

"엇?"

청명진은 등 뒤에서 느껴진 미세한 파공음과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급히 신형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져 검게 변해가는 푸른 침과, 저 멀리 바위 그늘 속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종남학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종남학...! 네놈이 감히!"

청명진의 눈에 서린 분노가 극에 달했다.

"비열한 종남의 쥐새끼가 끝까지 추잡한 수를 쓰는구나!"

청명진이 철검을 치켜들고 종남학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하진기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종남학은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허공에서 무형의 힘에 막힌 것에 겁을 집어먹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럴 리가 없다! 내 파혼침이 어째서...!"

종남학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발버둥 쳤다.

청명진의 검 끝이 그의 목덜미를 겨누며 바람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

사방의 안개가 급격하게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 사이로 숨 막히는 독기가 피어오르며, 대지가 기이하게 진동했다.

"크흐흐흐... 과연 화산의 천재로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검은 복면의 사내들. 그들의 손에는 기괴한 모양의 향로가 들려 있었고, 그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독무가 청명진의 등 뒤를 집어삼키듯 덮쳐왔다.

종남학이 사두한 독령(毒靈)들이었다.

"흡...!"

청명진이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독기를 막으려 했으나, 검은 독무는 그의 정종 진기를 비웃듯 단전 내부의 마태를 자극하며 그의 전신을 결박해 왔다.

"사제...! 피해라...!"

청운의 절박한 외침이 검은 안개 속으로 묻혀갔다. 청명진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며, 등 뒤로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의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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