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설자화가 떨리는 손으로 내민 가죽 두루마리에는 핏빛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붉은 달빛을 머금은 인장은 마치 살아 있는 괴물의 눈동자처럼 기괴하게 번뜩였다.

‘사패천이 보름날 직접 제자의 혈맥을 회수할 것이다.’

그 핏빛 글귀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천명의 단죄이자, 화산파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사마(司魔)의 선언이었다. 마침 머리 위에 걸린 달은 핏물을 머금은 듯 음산한 적색을 띠고 있었다. 오늘 밤이 바로 그 약조의 보름이었다.

만화객잔의 마당은 순식간에 빙점 이하의 한기로 얼어붙었다.

"대협... 명진 사제가... 사제가 본산에서...!"

바닥에 쓰러진 화산파의 대제자 청운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그의 어깨에 새겨진 깊은 창상에서는 검은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종남학이 암습으로 사용했던 파혼침(破魂針)의 사악한 독기와 흘러나온 마기가 뒤섞인 참상이었다.

백무린은 청운의 맥을 짚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맥박은 이미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었다. 무린은 묵묵히 손바닥에 진기를 실어 청운의 전중혈을 짚었다. 정순한 도가의 진기가 청운의 전신을 돌며 검은 독기를 억누르자, 청운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청운을 구하는 순간에도 무린의 영혼은 무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타인의 생명에 간섭하고 인과를 비틀 때마다 찾아오는 천벌의 법칙.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뼛속을 갉아먹는 듯한 극통이 치솟았다.

"무린 님!"

설자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무린은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비키거라."

무린의 목소리는 얼음판처럼 차가웠다. 그의 한쪽 귀는 이미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남은 한쪽 귀마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이명으로 가득했다. 시야 역시 온전치 않았다. 흑백으로 탈색된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오직 화산의 산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적색의 마기만이 왜곡된 붉은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심마의 저주였다. 제자 청명진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연민과 우려가 그의 오감을 마비시키고 전신의 혈도를 찢어발기는 역풍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였다.

쿵! 쿵!

대지가 불길하게 요동치기 한 걸음씩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인간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굶주린 아귀가 지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듯한 무겁고 탁한 진동이었다.

만화객잔의 부서진 목문 사이로 기이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 아 아 아 아!"

인간의 비명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처절하고 괴이한 포효가 밤공기를 찢었다.

청명진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흰자위마저 칠흑 같은 마기에 잠식되어 완전한 심연을 이루고 있었다. 단전 깊은 곳에 심겨 있던 사패천의 검은 마교 씨앗, 즉 마태(魔胎)가 보름달의 공명과 종남학의 비열한 암계에 자극받아 마침내 완전히 깨어난 것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녹슨 철검에는 자홍색의 자하진기 대신, 썩은 살을 태우는 듯한 흑적색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명진아..."

설자화가 절망 섞인 신음을 흘렸다.

청명진은 이성을 잃은 채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날이 향한 곳은 자신에게 길을 열어 준 사부, 백무린이었다.

"길을 잃은 검은 결국 자신을 베는 법."

무린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음성은 비록 쇠잔했으나, 그 안에 담긴 위엄은 천산을 내리누를 듯 묵직했다.

쉬이익!

청명진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파괴적인 마기가 만화객잔의 마당을 온통 쓸어버릴 기세로 폭발했다. 검끝이 무린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짓쳐 들었다. 화산의 분뢰수가 마공의 힘을 빌려 극도(極度)의 살수로 변해 있었다.

무린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이미 암흑에 잠겨 청명진의 신형을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마음속에 깃든 심안(心眼)은 제자의 검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스윽.

무린이 가볍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청명진의 검면을 스치듯 두드렸다.

댕-!

맑은 쇳소리와 함께 청명진의 검끝이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그것은 무학의 극의에 도달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신비로운 초식이었다. 무린은 튕겨 나간 검의 흐름을 타고 청명진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전중혈과 천돌혈을 차례로 제압했다.

"커헉!"

청명진의 입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태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억눌리며 그의 신형이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린은 쓰러지는 제자의 몸을 받아 안았다.

순간, 무린의 가슴속 혈도가 일제히 뒤틀렸다. 제자의 따뜻한 체온과 그를 구했다는 안도감이 그의 심장에 닿는 순간, 금기시된 감정의 사슬이 그의 영혼을 조여 왔다. 시야는 이제 암흑의 심연으로 떨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는 완전히 먹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오직 단전의 진기가 폭주하며 전신을 찢는 극통만이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무린은 피를 삼키며 생각했다. 보름날의 밤이 지나기 전에 이 마태를 완전히 정화하지 못하면, 청명진은 영원히 마교의 사냥개가 되어 파멸할 것이다.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수명과 영혼을 온전히 불태워, 겁경무량의 최상단계인 '자하도인(紫霞道人)'의 각성 기연을 제자에게 온전히 이송하는 것.

"자화야."

무린은 들리지 않는 귀를 뒤로하고, 오직 내력의 공명으로 설자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뒷산 절벽 꼭대기로 향한다. 그곳에 진법을 펼쳐야 한다."

설자화는 무린의 안색이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무린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한 줌의 재로 바꾸어 제자를 살리는 숭고하고도 잔혹한 구도의 길이었다.

"무린 님... 제발..."

설자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무린의 단호한 태도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묵묵히 청운을 객잔 안으로 옮긴 뒤, 무린을 도와 청명진의 신형을 이끌고 만화객잔 뒷산으로 향했다.

---

만화객잔 뒷산의 절벽 꼭대기는 천기의 흐름이 가장 날카롭게 교차하는 영적 요충지였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칼날처럼 살을 에었으나, 무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오직 감각만으로 진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품속에서 꺼낸 사막의 주사(朱砂)를 손끝에 묻혀 바위 바닥에 기문둔갑의 선을 그려나갔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위 위에 붉은빛의 진법 문양이 새겨졌다. 그것은 천지의 기운을 한곳으로 모으고, 하늘의 벌을 지연시키는 부동의 결계였다.

진법의 사방 기점에는 설자화가 수집해 온 뇌겁의 기운에 공명하는 고대 검의 파편들을 박아 넣었다. 허름한 쇠붙이에 불과해 보였던 파편들이 무린의 진기와 반응하자, 미세한 청색 스파크를 일으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명진을 중심에 앉혀라."

무린의 명령에 설자화가 이성을 잃고 신음하는 청명진을 진법의 중심인 태극안(太極眼)에 앉혔다.

무린 역시 제자의 맞은편에 정좌했다. 그의 백발이 밤바람에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의 칠공에서는 이미 검붉은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려 도복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부... 님..."

진법의 정순한 도가 기운이 몸에 닿자, 청명진이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검은 마기가 조금씩 걷히며, 눈앞에 앉은 사부의 참상이 드러났다.

완전히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칼. 칠공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듯한 서글픈 눈동자.

청명진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요동쳤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저 같은 망나니를 위해 이토록 자신을 버리시나이까!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마물로 살아가느니, 사부님의 손에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던 독종 청명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짝-!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청명진의 뺨이 돌아갔다. 무린이 힘없는 손을 거두며 차갑게 호령했다.

"나약한 소리 마라!"

그의 목소리는 비록 갈라지고 낮았으나, 그 안에 담긴 도(道)의 무게는 태산보다 무거웠다.

"무릇 무인이라 함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검을 의심치 않아야 하거늘, 고작 사사로운 슬픔 따위에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으려 하느냐? 네가 흘리는 그 눈물은 도를 걷는 이의 눈물이 아니요, 나약한 범부의 징징거림일 뿐이다!"

무린의 단호한 일갈이 청명진의 귓전을 때렸다.

"눈을 떠라, 명진아. 네 단전의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아라. 사패천의 마태도, 종남학의 독침도 결국은 네가 넘어서야 할 하나의 경계일 뿐이다. 그 슬픔마저 단전의 불꽃으로 삼켜라. 네 안의 모든 어둠을 태워버릴 자하의 진기를 스스로 움켜쥐란 말이다!"

청명진은 사부의 호령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부의 가혹한 다그침 이면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무한한 믿음과 숭고한 사랑이 그의 영혼을 관통했다.

"사부님..."

청명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물을 거두었다. 그의 눈빛에 다시금 꺾이지 않는 무인의 투지가 깃들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좋다."

무린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찬란한 오색의 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백무린이 평생을 걸쳐 쌓아 올린 정순한 자하진기이자, 그의 남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겁경무량(劫境無量)——!"

무린이 마음속으로 비기를 외쳤다.

쿠구구구궁!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만화객잔 뒷산의 영맥이 요동치며, 무린의 진기와 인과를 청명진의 단전으로 이송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청명진의 단전 안에서 잠자고 있던 자하진기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패천이 심어둔 검은 마태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무린이 전수하는 오색의 자하진기는 그 어둠을 무참히 짓밟으며 정화해 나갔다.

"아 아 아 아!"

청명진의 전신에서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화산의 진정한 정수인 '자하도인'의 경지가 그의 몸속에서 실체화되고 있었다. 그의 단전은 이제 단순한 기의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의 오색 구름을 품은 거대한 자하의 바다였다.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한 줌 재로 태워 제자의 무인적 완성을 돕는 성스럽고 숭고한 정통 전수. 사패천의 사악한 음모는 무린의 위대한 대속 앞에서 한낱 먼지처럼 바스러져 갔다.

그러나 천도는 정직했고, 인과의 대가는 가혹했다.

인위적으로 하늘의 운명을 비틀어 기연을 완성한 순간, 하늘의 진노가 시작되었다.

우르릉, 쾅쾅쾅!

밤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사이로, 푸른빛을 띤 격렬한 청색 번개가 번뜩였다. 그것은 천도가 내리는 단죄의 신벌, 뇌겁(雷劫)이었다.

하늘에서 정수리의 운수를 감지한 듯, 정교하고 날카로운 청색 번개가 만화객잔의 절벽 꼭대기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절벽 꼭대기에 설치된 진법의 결계가 번개와 충돌하며 거대한 굉음을 토해냈다. 사방에 매개체로 박아두었던 고대 검의 파편들이 청색 번개의 정수를 받아들이며 붉게 달아올랐으나, 천벌의 위력은 그것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번개가 내리쳤다.

쿠르릉, 쾅-!

이번 번개는 절벽 꼭대기가 아닌, 그 밑에 자리 잡은 만화객잔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굉음과 함께 백무린의 거처인 만화객잔의 지붕이 처참하게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했다. 붉은 화염과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무참히 무너진 지붕 밑의 실체가 천하에 노출되었다.

그곳에는 붉은 안개를 내뿜으며 기이하게 박동하는 거대한 혈단(血丹)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화객잔의 지맥과 백무린의 남은 생명선이 연결된,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 될 최후의 비밀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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