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
대지의 비명이 만화객잔의 낡은 기와를 뒤흔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솟구친 화산의 주봉은 이미 정상적인 산의 형세가 아니었다. 검붉은 핏빛 기류가 산봉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며 하늘을 잠식해 들어갔고, 갈라진 지면 틈새로는 숨이 턱 막히는 유황과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청명진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하진기의 자색 광운이 그의 이 빠진 철검을 따라 가늘게 요동쳤으나, 대지의 진동은 그 기세마저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이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다."
백무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야는 이미 반쯤 흑백으로 바래 있었다. 오감마비의 심마가 그의 단전을 옥죄며 시각을 앗아가고 있었으나, 영안(靈眼)으로 바라본 세상의 흐름은 오히려 명징했다. 화산의 뿌리 깊은 곳, 수백 년 동안 지맥 아래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영맥이 사악한 손길에 의해 강제로 비틀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사패천.
도덕을 조롱하고 절망을 수확하는 자. 그가 마침내 화산의 대영맥을 오염시켜 마교의 신물인 역천사마도(逆天邪魔圖)를 완성하려는 음모의 첫 단추를 꿰맨 것이다.
"사제들이... 화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청명진의 입술이 팽팽하게 일자를 그렸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두려움이 아닌,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천(剛天)의 기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단전 구석, 백무린조차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검은 마태(魔胎)가 주위의 마기에 호응하듯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백무린은 제자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약하지만 정순한 진기가 흘러들어 가 청명진의 내면을 진정시켰다.
"조급해하지 말거라. 놈들이 노리는 것은 네 도심(道心)의 붕괴다. 흔들리는 검끝바람으로는 떨어지는 매화 한 송이조차 베지 못하는 법이지."
그 순간, 안개 속에서 기괴한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종남파 무사들의 시신을 딛고 선 흑화사마(黑化邪魔)들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습격해 왔다. 그들의 신형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뼈마디가 기괴하게 늘어나고 손톱은 검은 비수처럼 자라나 대기를 찢었다.
"비키지 않는다면, 베어 넘길 뿐입니다!"
청명진이 대지를 박찼다.
스스슥!
그의 신형이 허공에 세 갈래의 자색 궤적을 남겼다. 화산파의 기초 기법인 분뢰수(奔雷手)가 자하진기의 정수와 결합하자, 단순한 손짓조차 뇌전의 기세를 품은 절기로 탈바꿈했다. 콰아앙! 단 한 번의 격돌로 선두에 서던 흑화사마 두 명의 가슴뼈가 함몰되며 뒤로 날아갔다. 검게 물든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으나 청명진은 멈추지 않았다. 녹슨 철검이 반원을 그리며 예리한 자색 검기를 뿜어냈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안개가 갈라지고, 마물들의 사지가 처참하게 잘려 나갔다.
종남파의 비열한 천재 종남학을 꺾고 얻은 자신감과, 백무린의 기연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자하진기의 위력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몰락해 가던 화산의 무학이, 마교의 주술로 빚어진 괴물들을 상대로 천하정종(天下正宗)의 위엄을 사정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마물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산길 아래쪽에서 끊임없이 기어오르는 검은 그림자들이 안개를 가득 메웠다.
"물러서라, 명진아."
백무린의 나직한 명령이 청명진의 귀청을 때렸다.
청명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으나, 백무린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심연과 같았다. 무린은 천천히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선을 그었다.
파앗!
만화객잔의 마당에 서 있던 앙상한 매화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객잔 주위에 펼쳐져 있던 기문둔갑의 결계가 발동하며, 자욱한 안개가 순식간에 물리적인 장벽이 되어 흑화사마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쾅! 쾅! 안개 장벽에 부딪힌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안으로 들어가지."
백무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잔의 문을 열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으나, 딛는 발자국마다 미세한 진흙더미가 가라앉으며 지진의 여파를 억누르고 있었다.
객잔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굳게 닫혔다.
그와 동시에 백무린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무린 역정!"
대기하고 있던 설자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자화는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싼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차가운 영기와 함께 핏빛 살이 돋아난 기이한 영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년설삼의 정수를 담은 약초였다.
"이것을 드시오! 어서 삼키란 말이오!"
설자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린의 멱살을 잡듯 약초를 그의 입가로 밀어붙였다.
"당신의 단전이 무너지고 있소. 그 해괴한 법술(겁경무량)을 부릴 때마다 영혼이 타들어 가고 수명이 깎이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소? 저 아이 하나를 살리겠다고, 화산의 영맥을 지키겠다고 당신의 고귀한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인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원망과 애절함이 서려 있었다.
백무린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오감이 마비되는 저주가 다시금 그의 전신 혈도를 찔러왔다. 청명진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미약한 안도와 대견함이, 역설적이게도 그의 심마를 자극해 육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자화야."
무린의 어조는 밤바람처럼 쓸쓸했다.
"천도는 공평하다. 인과를 비틀어 기연을 얻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그 대가가 당신의 죽음이라도 말이오?"
"과거 정파와 사파의 피로 강호를 물들였던 이 손이다."
무린은 자신의 거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흑백의 시야 속에서, 그의 손에 묻은 과거의 살업이 검은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 죄업의 사슬을 끊지 못해 매일 밤 원혼들의 비명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보아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저 맑은 도심(道心)을. 화산의 마지막 불씨를 살려 천하의 평화를 안겨줄 수 있다면, 내 수명 따위는 기꺼이 던질 수 있는 가벼운 쳇바퀴에 불과하다."
"당신은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이오."
설자화의 눈에서 마침내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약초가 담긴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당신의 생명이 천하보다 무겁단 말이오."
청명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하얗게 뼈가 드러날 정도로 꽉 쥐어졌다. 자신에게 그토록 모질고 가혹하게 굴었던 스승이, 사실은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깎아내며 자신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는 진실. 그 숭고하고도 무거운 사랑이 청명진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
"스승님."
청명진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마가 객잔의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소자, 더는 가르침을 구하지 않겠나이다. 제 손으로 화산을 지키고, 제 힘으로 원수를 갚겠나이다. 그러니 제발... 제발 몸을 보존하소서."
무린은 무릎을 꿇은 제자의 머리맡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아주 잠깐,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의 빛이 스쳤으나 이내 차갑게 굳어졌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심마의 역풍이 그를 집어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놈."
무린의 독설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네가 가진 그 미약한 진기 따위로 사패천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종남파의 잔챙이 하나를 꺾었다고 천하가 네 발아래 있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스승님!"
"일어나거라. 화산의 제자는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 대도의 길을 걷는 자는 오직 하늘과 자신의 도에만 머리를 숙일 뿐이다."
무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비록 쇠약해졌을지언정, 천하를 호령하던 무신의 위엄 그대로였다.
"사패천이 노리는 것은 화산의 영맥이다. 영맥이 완전히 오염되면 화산은 영원히 죽은 땅이 될 것이며, 중원은 마도의 치하에 떨어질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네 자하신기를 극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청명진은 고개를 들어 스승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단호함에, 청명진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어찌 해야 하옵니까."
"화산의 주봉 뒤편, 만년 동안 녹지 않는 빙굴이 존재한다. 그곳의 이름은 낙매애(落梅崖). 천혜의 절벽이자, 화산의 선조들이 마기를 진압하기 위해 세운 마지막 결계의 터다."
무린의 목소리에 시적인 리듬감이 실렸다.
"낙화는 무정하나 물은 스스로 흐르고(落花無情水自流), 매화는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토한다(梅花香自苦寒來). 그 지독한 한풍 속에서 네 단전의 자하진기를 극한으로 압착해야만, 비로소 자하신공의 상급 구결을 받아들일 그릇이 완성될 것이다."
"소자, 어떤 고통이 기다릴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나이다."
"좋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설자화는 더는 말리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백무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약초 상자를 주워 무린의 소매 속에 억지로 찔러넣었다.
"가시오. 하지만 기억하시오. 당신이 죽으면, 나 역시 이 객잔을 불태우고 강호 전체를 피로 물들일 것이오."
무린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객잔의 뒷문을 통해 화산의 험준한 산길로 몸을 날렸다. 붉은 안개가 산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대지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진동하며 발걸음을 방해했다.
낙매애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가파른 절벽은 얼어붙어 있었고, 위에서는 거대한 낙석이 수시로 떨어져 내렸다. 청명진은 선두에 서서 철검으로 낙석을 격파하며 길을 열었고, 백무린은 흐려지는 시야와 감각을 기러기처럼 가볍게 놀리며 뒤를 따랐다.
빙굴의 초입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 속에서, 기이한 파공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력에 실려 멀리까지 퍼져 나가는 처절한 전음(傳音)이었다.
"명진아! 명진 사제...! 살려다오...!"
청명진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화산파의 본산에 남아 지맥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그의 사형제, 청운(靑雲)의 목소리였다.
"사형...?"
전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사악한 자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섞여 흘러나왔다.
"크하하핫! 화산의 쥐새끼들이 제법 버티는구나! 청명진이라는 그 망나니 놈은 어디에 숨었느냐? 어서 그놈을 불러오지 않으면, 네놈들의 사지를 하나씩 잘라 화산 앞마당의 거름으로 쓸 것이다!"
"말하지... 않겠다... 이 사악한 마교의 주사(走狗) 놈들...!"
청운의 처절한 외침 뒤로, 다시금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청명진의 눈이 핏빛으로 뒤집혔다. 그의 단전에서 자하진기가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사형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가 빙굴이 아닌, 화산 본산의 연무장 방향으로 신형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무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가지 마라. 그것은 사패천이 파 놓은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