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검붉은 가죽 두루마리가 허공에서 펼쳐지는 순간, 만화객잔을 메우고 있던 공기가 일시에 얼어붙는다.

종남학의 손끝에서 시작된 검은 마기(魔氣)는 이내 뱀의 형상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도가(道家)의 정종 무학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음습하고도 잔혹한 파멸의 기운이다. 사패천이 심어 놓은 역천사마도의 편린이 종남학의 질투와 광기를 자양분 삼아 기어이 실체화된 것이다.

"죽어라! 화산의 똥개 놈아!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전부 찢어발겨 주마!"

종남학의 안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괴성을 내지른다. 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이 검은 마기와 섞여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두루마리에서 뿜어져 나온 묵장(墨障)의 폭발은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되어 청명진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 쇄도한다.

백무린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흑백으로 점멸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불길한 예감과 제자를 향한 염려가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감정의 일렁임은 곧바로 업보의 쇠사슬이 되어 그의 전신 혈도를 죄어붙인다. 귓가에서 이명이 울리고, 입안 가득 쇠 비린내가 고였다. 그러나 백무린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이 악물고 삼키며, 흑백의 시야 너머로 청명진의 움직임을 쫓았다.

"명진아!"

그 짧은 경고의 외침이 객잔의 천장을 흔들 때, 청명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청명진의 눈동자에 깃든 자색의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단전 깊은 곳, 백무린이 수명을 깎아 설계해 준 기연의 씨앗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종 자하진기(紫霞眞氣)가 그의 기경팔맥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며 녹이 슬고 이가 빠진 철검의 날을 타고 올랐다.

사특한 어둠이 몰려오나, 도(道)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청명진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그의 발끝이 바닥을 딛는 순간,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로 자색의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화산의 기초 검법에 불과했던 분뢰수(奔雷手)의 구결이, 이제는 자하의 신비로운 힘을 입어 천하를 가를 신검(神劍)의 초식으로 탈바꿈한다.

스아아아!

청명진의 손목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허공에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다. 그것은 단순한 검의 궤적이 아니었다. 자하진기가 빚어낸 정명한 도가의 장막이자, 산처럼 무겁고 물처럼 유려한 화산의 참된 기상이 가득 담긴 결계였다.

검은 마공의 폭발이 자색 검막에 부딪히는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객잔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기괴한 검은 뱀들이 자색 검막의 표면을 갉아먹으려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하진기는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꽃과도 같았다. 치익, 치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은 마기가 하얀 연기가 되어 스러지기 시작했다. 사특함은 결코 바름을 이기지 못하는 법(邪不犯正)이다.

"이, 이럴 수가……! 내 마공이, 종남의 비기가 어찌 이런 초라한 철검 따위에……!"

종남학의 눈에 깊은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청명진은 그의 절망을 지켜보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흩날리는 자색 매화 꽃잎과도 같은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종남학의 신형을 정면으로 압박했다. 한 걸음, 청명진이 대지를 딛고 나아갈 때마다 종남학이 펼쳐 둔 마기의 장막은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내렸다.

"도를 잃고 사도(邪道)에 아첨하는 자의 검 끝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 법."

청명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것이 화산의 대답이다."

검 끝이 허공을 가르며 하나의 완벽한 호를 그렸다. 분뢰수의 마지막 초식이 자하진기의 폭발적인 추진력을 얻어 종남학의 정면을 강타했다.

쿠우우웅!

"끄아아아악!"

종남학의 비명 섞인 단말마가 객잔을 가득 채웠다. 검붉은 두루마리는 청명진의 참격에 갈가리 찢겨 나가며 재가 되어 흩어졌고, 종남학의 신형은 뒤로 날아가 객잔의 단단한 벽면을 들이받았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종남학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먼지와 섞여 몰골을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천재라 불리며 오만하게 화산을 내려다보던 자의 기상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패배의 굴욕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 도련님!"

"소가주님을 모셔라!"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남파의 무사들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화산의 망나니가, 종남의 자랑이자 소가주인 종남학을 이토록 철저하게 짓밟아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

"가, 가자……!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종남학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사들의 부축을 받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청명진이 검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한 걸음 다가서자, 종남파 무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종남학을 들쳐 메고 객잔 밖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그들이 흘린 핏자국이 객잔 바닥에 길게 이어졌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청명진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녹슨 철검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자하진기를 품고 빛나던 검은 이제 다시 평범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청명진의 단전은 이전과 달랐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따스한 열기를 뿜어내는 자하진기의 정수.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 온전히 깃들어 있음을 확신하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열독의 고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청명진의 시선이 이내 객잔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백무린이 탁자를 짚은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의 호흡은 거칠었고, 넓은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청명진의 승리를 지켜보며 가슴속에 일어난 연민과 안도의 감정이, 백무린의 심마를 잔혹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백무린의 오감은 이제 반쯤 마비되어 있었다.

눈앞은 흑백의 세상으로 변해 명암만이 겨우 구분되었고, 귀에서는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단전의 진기는 폭주하듯 날뛰며 온몸의 혈도를 찢어발기려 했다. 수명을 깎아 천기를 비틀고 기연을 베푼 대가는 이토록 무겁고 잔혹했다.

"점소이……!"

청명진이 황급히 다가와 백무린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의 눈빛에는 스승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과 불안이 가득 차 있었다. 늘 냉정하고 무심해 보이던 사내의 이면에 감춰진 상처를 직감한 탓이다.

"손 치워라."

백무린은 차갑게 쏘아붙이며 청명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갈라지고 떨렸으나, 그 안에 담긴 위엄과 단호함은 청명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백무린은 억지로 단전의 진기를 짓누르며 냉정한 눈빛으로 청명진을 응시했다. 실제로는 그의 얼굴조차 희미한 형체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겨우 종남의 애송이 하나를 이겼다고 해서 천하를 얻은 줄 아느냐? 네 검은 아직 거칠고, 네 진기는 정돈되지 않았다."

"하지만 네 몸 상태가……."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주제넘게 타인의 안위를 걱정할 시간에, 네 검 끝에 묻은 피나 닦아라. 화산의 제자라는 자가 검을 다루는 법조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냐?"

백무린의 독설이 객잔의 정적을 깨뜨렸다.

청명진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백무린의 모진 태도 이면에 숨겨진 고통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독설이 서운하기보다 가슴이 아파왔다. 청명진은 자신의 단전에 뛰놀고 있는 정종 진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힘을 얻기 위해, 저 사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청명진은 나직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백무린이 그어 둔 보이지 않는 선을 존중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묵묵히 강해지는 것만이, 저 사내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기연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객잔 뒤편의 약방 문이 열리며 설자화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약탕기가 들려 있었다. 설자화의 눈동자는 백무린의 떨리는 손끝과 흑백으로 바래진 눈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무린아, 또 미련한 짓을 했구나."

설자화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상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약탕기를 탁자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백무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또 천기를 건드려? 이 약초들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강남을 얼마나 뒤졌는지 알면서도 이러는 거냐? 네가 죽으면, 이 객잔도, 남겨진 약속도 전부 먼지가 될 뿐이다."

백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약탕기를 들어 뜨거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약탕의 쓴맛이 혀끝을 마비시키며 폭주하던 진기를 미약하게나마 갈아앉혔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깎여 나간 수명과 허물어진 단전의 근본적인 치유는 불가능했다. 설자화의 품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고대 검의 파편이 백무린의 내력과 미세하게 공명하며 파르르 떨렸다. 뇌겁의 기운을 머금은 그 쇳조각만이,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천벌의 유일한 대비책이었다.

백무린이 약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객잔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괴, 괴물이다! 마교의 놈들이다!"

그것은 방금 전 도망쳤던 종남파 무사들의 비명 소리였다. 비명은 채 몇 마디 이어지지 못하고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뚝 끊겼다.

청명진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검을 꽉 쥐며 객잔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백무린 역시 흐려진 감각을 쥐어짜며 그의 뒤를 따랐고, 설자화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움켜쥐었다.

객잔 밖,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산길은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길목에는 종남파 무사들의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들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간 것은 날카로운 검날이 아니었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이 튀어나와 기괴한 기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기에 오염되어 전신의 기혈이 뒤틀린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신들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초점을 잃었고, 입에서는 검은 타액을 흘리며 기괴한 짐승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패천이 부리는 마교의 수하들, 흑화사마(黑化邪魔)들이었다.

"이것들은……."

청명진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종남학의 비열함은 참을 수 있었으나,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시신마저 마물로 만드는 이 사악함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단전에서 자하진기가 다시금 격렬하게 요동쳤다. 청명진의 단전 구석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검은 마교의 씨앗(마태)이, 주위의 마기에 공명하듯 미세하게 꿈틀거렸으나, 맹렬히 회전하는 자하진기의 빛에 눌려 이내 침묵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땅울림이 아니었다. 화산의 뿌리 깊은 곳, 거대한 영맥이 위치한 지맥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뒤흔들리는 대지진이었다. 만화객잔의 기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가파른 절벽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설자화가 지면의 균열을 피하며 외쳤다.

백무린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화산의 주봉을 바라보았다. 흑백의 시야 속에서도, 산봉우리를 감싸 안고 있는 거대한 기운의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화산의 영맥 아래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전설적인 마기.

사패천이 그토록 원하던 역천사마도의 완성을 위한 혈맥의 봉인이 마침내 깨어지고 있었다. 안개 자욱하던 화산의 산봉우리가, 서서히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광경이 백무린의 눈에 박혀왔다. 그것은 중원을 다시금 피로 물들일 거대한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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