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이 만화객잔의 낡은 들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종남학의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미닫이문을 산산조각 내고 쇄도하는 그 찰나, 객잔의 심처(深處)로부터 분출된 자색의 광망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진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화산의 영맥에 잠들어 있던 자하(紫霞)의 정수가 청명진이라는 그릇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눈부신 자색 광막은 종남학의 칼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둔탁한 파열음을 토해냈다.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거대한 파도가 암벽을 때리는 듯한 굉음이 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종남학은 손목을 타고 오르는 찌르르한 진동에 내심 경악하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이것은…… 대체 무슨 사술이냐!"
종남학의 외침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광망의 중심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청명진의 신형(身形)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피로 얼룩졌던 백색 도포는 자색의 진기에 휩싸여 광풍에 펄럭였고, 그의 두 눈은 심연보다 깊은 자색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백무린이 제 목숨과 수명을 깎아 넣어 마침내 완성한 기연의 씨앗. 화산의 대도(大道)를 잇는 정종 자하진기(紫霞眞氣)가 그의 단전에서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청명진은 가늘게 떨리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를 타고 흐르는 힘은 가히 폭렬하면서도 맑았고, 가슴을 짓누르던 열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술이라 하였느냐."
청명진의 목소리가 객잔 안의 빗소리를 뚫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쇠가죽을 긁는 듯 거칠던 음색은 간데없고, 옥을 굴리는 듯 청아하면서도 깊은 공력을 담은 일성이었다.
"종남의 도둑놈들이 화산의 영맥을 탐내며 법도를 논하더니, 이제는 정종의 무학조차 몰라보는구나."
"건방진 놈! 겨우 숨통이 붙었다고 해서 분수를 잊었단 말이냐! 모두 쳐라! 저놈의 목을 베어 종남의 기치 아래 바쳐라!"
종남학의 표독스러운 명령에, 그의 뒤를 옹위하던 삿갓 쓴 사병 십여 명이 일제히 대도를 치켜들었다. 그들은 일찍이 강호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살기를 다진 종남파의 정예 무사들이었다. 십여 자루의 대도가 자아내는 서슬 퍼런 도망(刀芒)이 청명진의 전방위적 혈도를 겨누며 쇄도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비명이 객잔의 사방 벽을 두드렸다.
그러나 청명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제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화산의 매화는 한겨울의 혹한을 견뎌내고서야 비로소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법. 그가 지내온 고통의 시간들이, 사형제들의 피가 스러진 화산의 황량한 앞마당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 화산의 의지였고,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도심(道心)이었다. 청명진의 손끝이 허공을 가볍게 퉁겼다.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자색의 검기가 한 떨기 매화꽃의 형상으로 피어났다.
스스스스릉!
허공을 가르는 검명(劍鳴)이 맑게 울려 퍼졌다. 청명진이 가볍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자, 그의 발끝이 닿은 바닥판을 중심으로 자색의 파문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화산파의 기초 검법 중 하나인 '분뢰수(奔雷手)'의 초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자하의 진기는 이미 범속한 경지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물러서라."
짧은 일성과 함께 청명진의 소매가 크게 흔들렸다.
콰아아앙!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자색 검기가 거대한 부채꼴의 형상을 그리며 전방을 쓸어버렸다. 덮쳐오던 십여 명의 사병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것이 고작 약관의 소가주가 펼친 검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대도가 자색 매화의 꽃잎과 부딪히는 순간, 쇠붙이가 부러지는 날카로운 파편 음들이 객잔을 가득 메웠다.
"끄아악!" "커헉!"
무지막지한 반진력에 사병들의 신형이 낙엽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들이 쥐고 있던 대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비산했고, 몸을 보호하던 호신강기는 이쑤시개처럼 부서져 나갔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종남의 일류라 자부하던 정예 무사 십여 명이 단 일격에 피를 토하며 객잔 마당의 진흙탕 속으로 처박혔다.
폭우가 쏟아지는 들판 위로 붉은 선혈이 번져나갔다. 청명진의 발밑에는 오직 부러진 칼날들과 신음하는 패자들의 잔해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종남학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단 한 초식에 자신의 정예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방금 청명진이 펼친 것은 분명 화산의 쇠락한 검 초식이었으나, 그 파괴력과 기세는 마치 화산의 전성기 시절 장로들이 강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청명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대신, 조용히 검가(劍架)에 꽂혀 있던 녹슨 철검을 손에 쥐었다. 비록 이가 빠지고 녹이 슨 초라한 검이었지만, 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검신 전체가 자색의 기류로 감싸이며 신검(神劍) 부럽지 않은 안광을 뿜어냈다.
백무린은 객잔의 어두운 구석, 먼지 쌓인 탁자에 몸을 기대어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전신의 혈도는 천벌의 여파로 욱신거리고 있었다. '겁경무량'을 발동하여 제자에게 기연을 설계해 준 대가는 가혹했다. 단전의 진기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그의 남은 수명은 또다시 몇 해의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무린의 눈에 비친 청명진의 모습은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되었구나.'
무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온기가 피어올랐다. 평생을 피와 살육의 전쟁터에서 홀로 걸어왔던 그였다. 타인의 성취를 보며 이토록 깊은 안도감과 뿌듯함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자신을 짓누르던 피의 업보가, 화산의 이 어린 독종을 통해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따스한 감정의 일렁임은 이내 그의 육신에 도사린 잔혹한 저주를 깨웠다.
쿵.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백무린의 시야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객잔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화려한 자색의 광망이, 붉은 피나무 바닥이, 그리고 밖에서 쏟아지는 푸른 빗줄기가 순식간에 탈색되어 갔다. 화려했던 세상의 빛깔들이 단 한순간에 흑과 백, 오직 무채색의 모노톤으로 내려앉았다.
'심마(心魔)가…….'
백무린은 이를 악물었다. 감정의 금기. 그가 타인에게 깊은 연민이나 안도, 혹은 기쁨과 같은 인간적인 정서를 느끼는 순간, 전신을 옭아맨 과거의 살업이 오감을 마비시키는 형벌로 돌아온다.
눈앞의 청명진이 흔들리는 흑백의 잔상으로 변했다. 그의 가쁜 숨소리마저 수중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멀어져 갔다. 시각의 왜곡과 청각의 마비가 동시에 몰아치며 전신의 맥로가 뒤틀렸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검은 피를 간신히 삼키며, 백무린은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피가 배어 나왔다.
곁에 서 있던 설자화가 그의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우려와 분노가 스쳤다.
"무린, 너 또……!"
"시끄럽다."
백무린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냉혹하고 기계적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그리고 무너져가는 육신을 제자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흐려지는 흑백의 시야 속에서도 꼿꼿이 상체를 세우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청명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겨우 그 정도 힘을 얻었다고 자만하지 마라, 명진아. 종남의 개들이 네 목숨을 거두러 왔거늘, 어찌 그리 칼끝이 무디냐."
백무린의 독설이 청명진의 귀에 닿았다. 그것은 격려가 아닌 모진 채찍질이었으나, 청명진은 그 이면에 담긴 엄격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청명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날을 바로 세웠다.
종남학은 사병들이 처참하게 쓰러진 광경을 보며 이빨을 갈았다. 그의 안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평생을 천재라 불리며 종남파의 후계자로 군림해 온 그였다. 몰락한 화산의 찌꺼기, 늘 제 밑이라 여겼던 청명진이 자신을 압도하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화산의 망나니 놈이……! 감히 종남의 위엄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종남학이 광오하게 소리치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검날 위로 푸른 기류가 독사처럼 돤사하며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종남파의 비전 절예 중 하나인 '태을신검(太乙神劍)'의 기운이었다.
"내가 쌓아 올린 무학이, 네놈 같은 야바위꾼의 사술에 무너질 것 같으냐!"
종남학의 신형이 바람을 가르며 청명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의 검날이 허공에 십여 개의 푸른 검영(劍影)을 만들어내며 덮쳐왔다. 매서운 풍압이 객잔의 바닥판을 긁어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청명진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흑백의 시야 속에서, 백무린은 청명진의 움직임을 마음의 눈으로 쫓았다. 청명진의 검 끝이 가볍게 떨렸다. 그것은 화산파의 절예,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의 정수였다. 비록 완벽한 초식은 아닐지언정, 단전에 깃든 자하진기가 검 끝에 실리는 순간 그것은 천하를 가를 날카로운 참격으로 화했다.
챙! 챙! 채앵!
자색과 푸른색의 검기가 허공에서 어지럽게 맞부딪혔다. 종남학의 검 초식은 화려하고 정교했으나, 청명진의 자색 검기는 마치 거대한 장막처럼 그의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려보냈다. 한 초식, 두 초식이 겹칠 때마다 종남학의 안색은 초조함으로 물들어갔다. 자신의 검이 청명진의 검막에 닿을 때마다, 뼈를 깎는 듯한 반진력이 단전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산의 참된 검이다."
청명진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검을 비틀어 올렸다.
스아아아!
자색의 검기가 매화 꽃잎처럼 흩날리며 종남학의 태을신검을 정면에서 깨뜨렸다.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종남학의 푸른 검기가 산산조각이 났고, 청명진의 철검 끝이 종남학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크으윽!"
종남학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명진의 검 끝은 이제 종남학의 목덜미 한 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서늘하고 묵직한 자색의 살기가 종남학의 전신을 옭아맸다.
"네놈의 오만함이 오늘 화산을 모독한 대가다. 물러가라. 다시 한 번 화산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그대의 목숨으로 그 빚을 청산할 것이다."
청명진의 목소리에는 타협 없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깨를 움켜쥔 채 진흙탕에 무릎을 꿇은 종남학은 부르르 떨었다. 패배의 굴욕감, 그리고 자신을 압도한 청명진을 향한 광기 어린 질투심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그의 눈이 핏빛으로 충혈되었다.
"내가…… 내가 이딴 화산의 똥개 놈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그럴 리 없다! 그럴 수는 없어!"
종남학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이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백무린은 흑백의 시야 속에서도 종남학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스쳤다. 마비되어 가던 감각 속에서, 오직 살기만을 감지하는 무인의 직관이 경고음을 울렸다.
"명진아, 피해라!"
백무린의 외침과 동시에, 종남학이 품속에서 검붉은 빛을 뿜어내는 가죽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정파의 무학과는 거리가 먼, 기괴하고도 사악한 마기(魔氣)를 풍기는 물건이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순간, 객잔 안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갑게 식어 내렸다. 검붉은 역천 사당의 묵장 스크롤이 허공에 기괴한 문양을 그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