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는 백무린의 뒤로, 종남파의 소가주 종남학이 이끄는 사병들이 객잔 경계에 당도한다.
검은 폭우가 만화객잔의 낡은 기와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지붕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낙수받이에서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는 소리가 요란했다. 백무린은 바닥에 짚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짓이겨진 진흙을 밟는 발소리는 은밀했으나, 살기를 머금은 기운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쿨럭……!"
백무린의 입술 틈새로 검붉은 선혈이 다시금 배어 나왔다. 서서히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어둠이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의 촛불이 흐릿해지며 소리마저 한 겹 장막을 거친 듯 먹먹하게 들렸다. 감정을 품은 대가, 인과를 비튼 천벌이 그의 오감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가 빚어낸 자줏빛 매화종자는 이미 빗줄기를 뚫고 청명진에게 날아갔으나, 그 대가로 백무린의 단전은 서리 맞은 화초처럼 급격히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객잔의 마당을 밟고 선 자들의 살기가 문풍지를 뚫고 들어와 살갗을 찔렀다. 종남학. 그 비열한 열등감의 썩은 내가 빗물에 씻기지 않고 진동했다. 백무린은 신형을 일으키려 했으나, 무릎 뼈마디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미련한 사내 같으니. 내 그리 경고하였거늘, 기어이 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구나."
어둠이 짙게 깔린 객잔의 동쪽 벽면에서 홀연히 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맑았고,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설자화였다. 그녀는 언제 나타났는지 백무린의 등 뒤를 지키며 서 있었다.
설자화의 손끝이 허공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기문침(奇門針)들이 번뜩였다. 그녀가 발끝으로 객잔 바닥의 특정한 궤적을 밟자, 정당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오색의 기운이 살아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냐!"
객잔 밖에서 사병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자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이 허공에 팔괘의 형상을 그리며 거칠게 내뻗어졌다. 만화객잔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급격히 부풀어 오르며 마당 전체를 집어삼켰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농무가 종남파 사병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기문둔갑(奇門遁甲)의 묘리가 담긴 '만화미종진(滿花迷踪陣)'이 발동한 것이다.
"소가주님! 안개가 갑자기 눈앞을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마라! 잔재주일 뿐이다. 객잔을 포위하고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종남학의 칼칼한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울렸다. 그의 음성에는 조급증과 악독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설자화는 신형을 낮추어 고꾸라진 백무린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백무린의 몸을 만지는 순간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 어리석은 인간아. 맥박이 이토록 조각나고 단전이 비었거늘, 또 누구를 위해 천기를 누설했단 말이냐. 네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이리 제 몸을 찢어 발기는가!"
백무린은 대답 대신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흐려진 눈동자는 설자화의 얼굴마저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었다.
"자화…… 시끄럽구나. 내 귀가…… 평소보다 조금 더 먹먹할 뿐이다." "입을 다무시오! 그 가벼운 혓바닥으로 또 나를 속이려 드는가!"
설자화는 눈가를 붉히며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싼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놓았다. 상자는 서역의 단단한 철목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고대의 기이한 부적이 표면에 눌러붙어 있었다. 그녀가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자, 둔탁한 쇠 마찰 소리와 함께 내부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물건이다. 동해의 무덤이라 불리는 고대 난파선에서 내
내가 천금을 아끼지 않고 구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비단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자 남짓한 허름한 쇳조각이었다. 오랜 세월 심해의 개펄 속에 묻혀 있었던 듯, 표면은 거칠게 부식되어 있었고 이끼와 조개껍데기가 화석처럼 눌러붙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고철상조차 외면할 잡철에 불과했으나, 백무린의 시선이 그곳에 닿는 순간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이잉.
쇳조각과 백무린의 손끝이 채 닿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는 미세한 공명이 일어났다. 벼락이 치기 직전 대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한 전율. 그것은 백무린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뇌겁(雷劫)의 기운과 완벽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천도가 내리는 벌을 받아내고, 인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 설자화가 수많은 강호의 기인들을 다그치고 가산을 탕탕 먼지 털듯 털어 마침내 손에 넣은 고대 무인의 유물이었다.
"이것은……."
백무린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쇳조각을 쥐는 그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드는 서늘하고도 난폭한 뇌력이 역류하던 그의 진기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오장육부를 불태우던 심마의 불길이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가 아니었다. 댐을 쌓아 홍수를 잠시 막아둔 것에 불과했기에, 언젠가 이 둑이 터지는 날에는 그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바스러질 터였다.
"말하지 마시오. 내 어찌 당신의 그 무모한 고집을 꺾겠소."
설자화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빗소리에 묻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사내가 걷고자 하는 길이 얼마나 처절한 독행도(獨行道)인지,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떤 파멸인지를. 그럼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가시밭길에 비단 한 조각을 깔아주는 것뿐이었다.
쿠구구궁!
만화객잔의 앞마당을 뒤덮은 안개 속에서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따위 안개 장난으로 본 가주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종남학의 서슬 퍼런 일갈이 대기를 흔들었다. 종남파의 비전 검법인 '태청혜검(太淸慧劍)'의 푸른 검기가 안개를 가르고 쏟아져 내렸다. 사나운 검풍이 객잔의 처마를 들이받을 때마다 낡은 목조 건물이 삐걱거리며 먼지를 쏟아냈다. 설자화가 펼쳐둔 만화미종진의 기문침들이 하나둘씩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자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진(陣)을 지탱하던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종남학이 이끄는 사병들의 격렬한 공세는 기문둔갑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무린, 오래 버티지 못하오. 종남의 사냥개들이 진법의 눈을 찾았소."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백무린의 흐려진 고막을 두드렸다. 백무린은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객잔의 정문 너머를 응시했다. 시각은 이미 반쯤 마비되어 사물이 온통 자줏빛과 검은색의 혼돈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암전의 세계를 뚫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불꽃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터벅. 터벅.
비바람을 뚫고 걸어오는 발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무거운 진흙이 튀고, 뼈와 살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만화객잔의 허름한 사리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형상을 본 설자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귀신에 가까웠다.
화산의 마지막 후기지수, 청명진이었다. 조양봉의 험준한 절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르며 영맥의 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대가는 참혹했다. 그의 도복은 이미 갈가리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강풍과 암석에 긁힌 살갗에서는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빗물과 함께 바닥을 적셨다. 양손의 손톱은 전부 뒤집혀 뼈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으며, 무릎 뼈는 부러지기 직전인 듯 기이한 각도로 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청명진의 두 눈동자는 번뜩이는 매화의 검강처럼 서늘하고도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오직 도(道)를 향한 아집과 자존심으로 버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광(神光)이었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화산의 혼이 그 초라한 육신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제자…… 청명진. 사부님의 명대로, 조양봉의 정상을 밟고…… 돌아왔습니다."
청명진의 목소리는 갈라진 가죽 같았으나, 그 안에는 털끝만 한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 그는 객잔 바닥에 고꾸라져 피를 토하고 있는 백무린을 발견하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하게 굳은 도심(道心)으로 백무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무린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청명진을 바라보았다. 오감이 멀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제자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웅혼한 화산의 진기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스스로 도심을 깨우친 천재. 그 처절한 구도의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
백무린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독설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으나, 심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 전신의 혈도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겨우 그 정도로 화산의 이름을 입에 담느냐. 네 단전은 비어 있고, 네 뼈는 바스러졌다. 그 몸으로 종남의 검을 어찌 막으려 하느냐."
"막을 것입니다."
청명진이 고개를 들어 백무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부님께서 제게 길을 보여주셨으니, 저는 그 길의 끝에 뼈를 묻을 뿐입니다. 종남의 개들이 이 객잔의 문턱을 넘으려면, 먼저 제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만한 자의 허세가 아니었다.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둔 무인의 단호한 맹세였다.
백무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감정의 금기를 건드리는 위험한 일렁임이었다. 붉은 피가 다시금 그의 목구멍을 넘어왔으나, 백무린은 그것을 억지로 삼키며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받아라. 네가 짊어져야 할 화산의 무게다."
백무린의 손바닥이 청명진의 백회혈(百會穴)을 짚었다.
'겁경무량(劫境無量).'
인과를 비틀고 천기를 누설하는 금단의 신공이 다시금 깨어났다. 백무린의 단전에 남아있던 마지막 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청명진의 전신 경맥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조양봉의 빗속을 뚫고 날아갔던 자줏빛 매화종자가 청명진의 단전 안에서 마침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쿠르릉! 쿠궁!
하늘이 분노한 듯 뇌성이 객잔 지붕 바로 위에서 폭발했다. 백무린의 영혼을 옥죄는 천벌의 사슬이 더욱 단단히 조여왔다. 그의 남은 수명이 수년의 단위로 깎여나가는 감각이 뼛속까지 시리게 전해졌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피와 섞여 청명진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크윽……!"
청명진의 전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백무린이 전해주는 진기는 단순한 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화산의 잃어버린 절진 무학, 자하신공(紫霞神功)의 정수가 담긴 인과의 결정체였다. 단전 안에서 회전하는 매화종자가 청명진의 도심과 맞물리며, 그가 조양봉에서 흡수한 영기의 맥을 폭발적으로 정화하기 시작했다.
찢어졌던 경맥이 순식간에 이어지고, 으스러졌던 뼈마디가 새로운 진기로 채워지며 우드득 소리를 냈다. 고통 속에서 청명진의 눈동자가 점차 자줏빛 광채로 물들어갔다. 제자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변화를 느끼며, 백무린은 마침내 손을 거두었다. 그의 육신은 이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약해져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기연을 완성했다는 숭고한 만족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객잔의 미닫이문이 거대한 검풍에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휘날렸다.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청색 도포를 입은 사내, 종남파의 소가주 종남학이었다. 그의 검날에는 푸른 검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삿갓을 쓴 수십 명의 사병들이 살기를 품은 채 객잔 안으로 들이닥쳤다.
"결국 여기 숨어 쥐새끼처럼 떨고 있었구나, 청명진!"
종남학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청명진과, 그 뒤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백무린에게 닿았다. 종남학의 얼굴에 기괴하고도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에 서린 질투와 열등감이 폭우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산의 마지막 천재라 불리던 네놈이, 겨우 이런 싸구려 객잔의 서생 놈 뒤에 숨어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눈물겨운 사제 정이로구나. 하지만 오늘로 화산의 맥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종남학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 끝이 청명진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모두 죽여라. 흔적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라!"
종남학의 잔인한 명령과 함께, 사병들이 일제히 대도를 치켜들고 백무린과 설자화를 향해 쇄도했다. 종남학의 검날이 청명진의 목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쳐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청명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 속에서, 자색의 매화가 만개했다.
쿠구구구궁!
청명진의 단전 깊은 곳에서, 그리고 만화객잔의 심처에서 억눌려 있던 거대한 힘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 백무린이 설계한 기연의 씨앗이, 제자의 꺾이지 않는 도심과 만나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콰르릉!
객잔 내부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자색의 광망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올랐다. 빗줄기마저 허공에서 증발시키는 맹렬한 기세였다. 종남학의 검날이 그 자색의 광막에 부딪히며 쨍강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이, 이것은……?!"
종남학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광망의 중심에서, 청명진이 천천히 대지를 딛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자색의 검기가 만화객잔 전체를 뒤흔들며, 종남의 무리들을 집어삼킬 듯이 팽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