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자신의 원대한 마도 씨앗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이성을 잃은 사패천이 품에서 역천사마도의 본장을 꺼내 우주에 펼친다.

화산의 서늘한 밤공기를 찢으며 전개된 가죽 두루마리는 단순한 서책의 외형을 초월해 있었다. 그것은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장막이자, 대지 아래 도사린 심연의 입구였다. 두루마리의 표면에 새겨진 주사(朱砂)의 문양들이 일제히 핏빛 광망을 뿜어내며 공중으로 솟구친다.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던 밤하늘이 마치 거대한 칼날에 베인 듯 반으로 갈라지고, 그 틈새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의 검고 탁한 기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사패천의 안광은 이미 녹색의 마광(魔光)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찢어진 미소가 걸렸고, 전신의 가죽이 해골처럼 밀착되어 뼈마디가 도드라진다.

"내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마태(魔胎)를 감히 소멸시키다니. 화산의 버러지 같은 놈들이 천도를 논하며 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좋다, 이 산 전체를 피의 제단으로 삼아 만마(萬魔)의 밥으로 던져주마!"

사패천의 노효(怒哮)와 함께 역천사마도의 본장에서 검붉은 안개가 분수처럼 뿜어 나온다. 안개는 공중에서 스스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더니, 이내 무수한 귀곡(鬼哭)의 군대로 화한다. 목이 잘린 장수, 가슴에 구멍이 난 병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짓겨진 원혼들이 검은 쇠사슬을 휘두르며 대지를 향해 돌진한다. 그들이 내지르는 통곡과 비명은 화산의 영맥을 뒤흔들며 사방의 바위들을 모래알처럼 바스러뜨린다.

귀곡의 군대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화산의 기틀을 지탱하던 정순한 영기가 뿌리째 뽑혀 나가기 시작한다. 땅바닥이 갈라지며 검은 진흙 같은 마수가 솟구쳐 오르고, 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던 홰나무들이 일제히 검게 말라 죽어간다. 가히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묵시록적인 광경이었다.

그 압도적인 어둠의 해일 앞에서, 청명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단전 내부에서는 방금 전 사패천이 심어해 놓았던 검은 마교의 씨앗, 즉 마태가 백무린의 대속과 자하진기의 맹렬한 회전으로 인해 완전히 정화되어 순수한 자색의 불꽃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내 단전을 더럽히던 그 더러운 벌레 놈은 이미 재가 되었다. 사패천, 네놈의 사술은 이 화산의 흙 한 줌조차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청명진이 녹슬고 이가 빠진 철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그의 검끝에서 피어오르는 자하진기는 이제 번뜩이는 황금빛 뇌전과 결합하여 한층 더 기품 있고 묵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백무린의 시야가 급격히 흔들렸다.

'겁경무량'의 반동으로 인해 오감이 마비되어 가던 그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청명진이 바라보는 시야와 자신의 시야가 마치 얇은 초지 한 장을 사이에 둔 것처럼 겹쳐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그가 청명진에게 인과의 기연을 설계하며 영혼의 가느다란 가닥을 연결해 두었기에 발생하는 천벌의 중간 발현, 즉 시각 왜곡이었다.

백무린의 동공에 비친 세상은 흑백의 무채색이었으나, 오직 청명진의 시야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자색의 진기 흐름만은 핏빛처럼 선명하게 타올랐다. 제자의 맥박, 단전의 고동, 검을 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백무린의 전신 신경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지독한 감각의 공유는 백무린의 뇌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을 유발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청명진의 검로를 가장 완벽하게 보좌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진(振)... 우측 삼 보, 검을 눕혀 사선으로 그어라."

백무린의 갈라진 목소리가 청명진의 이조(耳祖)에 직접 꽂히듯 전달된다. 청명진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형을 움직였다. 우측으로 세 걸음 비껴서며 철검을 비스듬히 눕혀 허공을 가른다.

그 궤적은 놀랍게도, 아수라장 속에서 은밀히 죽음을 몰고 오던 비열한 침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내 움직임을 읽은 거냐!"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튀어나온 자는 다름 아닌 종남학이었다. 청명진에게 패배해 오른쪽 어깨를 관통당하고 검을 잃었던 그는, 질투와 광기에 눈이 멀어 마교의 혼란을 틈타 마지막 암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시커먼 독기가 서린 얇은 침 세 대가 쥐어져 있었다.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 단전을 영구히 파괴한다는 종남파의 금지된 비련 암기, '파혼침(破魂針)'이었다.

종남학은 청명진의 등 뒤를 노려 파혼침을 비열하게 사출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백무린과 시각을 공유하며 사방의 인과율을 꿰뚫어 본 청명진의 검끝이 먼저 그의 손목을 스쳐 지나갔다.

*챙-!*

맑은 쇳소리와 함께 청명진의 철검이 파혼침의 침로를 정확히 때려 눕혔다. 자하진기의 강력한 탄성에 탄 배로 튕겨 나간 파혼침 세 대는, 공중에서 궤적을 꺾어 도리어 그것을 날린 종남학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억...!"

종남학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확장되었다. 그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세 대의 파혼침이 푸른빛의 독무를 뿜어내며 그의 살을 녹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종남파의 영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독문 암기의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그의 단전이 안쪽에서부터 찢어발겨지며, 그가 평생을 쌓아온 내공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내, 내 무공이... 내 영혼이...! 청명진, 네놈이 감히...!"

종남학은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굴렀다. 비열한 음모로 남을 해치려던 자가 결국 자신이 준비한 가장 잔인한 덫에 걸려 자멸하는 꼴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탁한 진기는 이내 사패천이 펼쳐놓은 역천사마도의 검은 안개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비참하고도 당연한 인과의 단죄였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크하하하! 하찮은 불나방들이 제 몸을 태우는구나! 그러나 이 본장의 위력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고기반죽이 될 뿐이다!"

사패천이 허공을 향해 양손을 뻗자, 역천사마도에서 흘러나오던 귀곡의 군세가 거대한 하나의 소용돌이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수천 마리의 원혼이 서로의 몸을 짓이기며 만들어낸 거대한 검은 구체가 화산의 산문을 통째로 짓누를 듯이 하강한다. 그 가공할 중압감에 백무린의 무릎이 꺾이려 했다.

'겁경무량'의 최종 대가. 그의 단전은 이미 완전히 비어 있었고, 전신의 혈관이 파열되어 흘러내린 피가 그의 도포 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석화가 진행되는 그의 두 다리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고,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찢어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바로 그때, 거친 바람을 뚫고 붉은 비단 자락이 백무린의 시야를 가로막아 섰다.

"이 미련한 영감태기야!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을 것이지, 왜 사서 고생이란 말이냐!"

날카로우면서도 물기가 젖어 있는 목소리. 설자화였다. 그녀의 손에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옥색의 둥근 패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백무린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일찍이 자신이 수집해 주었던 고대 검의 파편이 뇌겁의 기운에 거세게 공명하며 붉은 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 파편이 백무린의 생명을 갉아먹는 천벌의 매개체임을 직감한 그녀는, 더는 지켜만 볼 수 없다는 듯 백무린의 앞을 호위하며 가로막아 섰다.

"자화... 물러서라. 이것은 내가 치러야 할..."

"시끄럽다! 네놈이 멋대로 강호의 은원이니 대속이니 논하며 목숨을 버리려 해도, 내 눈앞에서는 절대 안 된다!"

설자화가 들고 있던 옥색 패를 대지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웅-!*

그녀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전 방패막이자, 천하의 어떤 공격도 세 번은 막아낸다는 '현무도천결(玄武渡天結)'의 진기 장막이 백무린과 청명진의 전면을 감싸 안으며 펼쳐졌다. 투명한 옥색의 반원형 결계가 형성되자마자, 사패천이 보낸 귀곡의 소용돌이가 그 표면을 사납게 들이받았다.

*쿠구구구궁-!*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검은 원혼들이 손톱으로 옥색 결계를 긁어대며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낸다. 결계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설자화의 가녀린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흡...!"

설자화는 이를 악물고 제 단전의 진기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쥐어짜 내 결계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고운 이마에 핏줄이 돋아나고, 이내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자화 누님!"

청명진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설자화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오지 마라! 검을 잡아라, 명진아! 네 사부가 목숨을 걸고 열어준 길이다. 단 한 보도... 이 어둠이 우리를 침범하게 두지 마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계산적이고 영악한 장사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자신이 믿고 따르기로 맹세한 이들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의협의 도(道)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각혈을 하면서도 그녀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결계를 유지해 냈다.

그 굳건한 아군들의 유대와 숭고한 구도의 정신 앞에서는, 마교의 천재지변과도 같은 주술조차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결계의 표면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사패천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과 공포의 빛이 스쳤다.

"이것들이... 한낱 인간의 감정 따위로 내 마도의 위력을 막아서려 한단 말이냐!"

사패천이 광포하게 역천사마도의 본장을 겉잡을 수 없이 흔들었다.

그 순간, 대지 전체가 거대한 격랑에 휩쓸린 듯 요동쳤다. 화산파 산문의 지붕을 덮고 있던 수만 장의 기와들이 일제히 뜯겨 나가 허공으로 승천하듯 날아올랐다. 땅바닥의 흙과 돌가루가 폭풍에 휩쓸려 하늘을 뒤덮으며, 사방 십 리 안의 모든 시야를 차단하는 묵시록적 우림(雨林)의 구도가 연출되었다. 붉은 번개가 그 흙먼지 사이를 칼날처럼 가르고, 자색의 자하진기가 그 틈새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린다.

"다 함께 죽어라!"

사패천이 가슴을 쥐어짜 짜내어 터뜨린 마지막 마기의 격류가, 결국 한계에 달했던 설자화의 현무도천결을 관통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옥색 결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가공할 충격파가 설자화의 전신을 강타했다.

"아악!"

가녀린 신형이 낙엽처럼 허공으로 붕괴하듯 튕겨 나갔다. 하필이면 그녀가 날아간 방향은, 화산의 영맥 아래로 가파르게 깎아지른 천 길 낭떠러지 절벽 끝이었다.

석화되어 가던 백무린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붉은 비단 자락이 중력을 잃고 절벽 아래의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광경이 느리게 박혀 들어왔다.

"자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목구멍을 찢으며, 백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감이 완전히 마비되어 가던 임사의 고통 속에서, 그는 굳어버린 한계를 깨부수고 허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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