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단 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천 길 절벽 아래의 아가리로 추락한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백무린의 시야가 흑백의 탁류 속으로 침잠하는 와중에도, 절벽 끝에서 붕괴하듯 튕겨 나간 설자화의 신형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안구에 박혀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뜨거운 격류가 솟구쳤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연민이었고, 자신을 대신해 피를 흘린 동반자를 향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스스로 옭아맸던 금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뇌리를 강타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진기가 역류하며 혈도가 터져 나갔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쇄액-!
지면을 박찬 백무린의 신형이 허공을 디뎠다. 어떠한 신형도, 어떠한 기교도 없었다. 오직 허공을 평지처럼 즈려밟는 등공섭물의 신기(神技)였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설자화의 가냘픈 손목이 그의 투박한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힘껏 잡아당겨 그녀를 가슴 안으로 품어 안는 그 순간, 백무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화..."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을 넘어온 것은 끓어오르는 선혈의 뜨거움뿐이었다.
동시에 천지가 암전되었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오감이 급격히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눈앞을 메우던 붉은 노을과 흙먼지가 순식간에 칠흑의 어둠으로 변했다. 이어서 귓가를 찢을 듯 울리던 폭풍우와 마교도들의 광소 소리가 거짓말처럼 소멸했다. 혀끝을 적시던 비릿한 피비린내도, 바람의 서늘함도, 안고 있는 설자화의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을 아우르는 지독한 암흑의 백색 심마가 그의 육신을 완전히 지배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무(無)의 공간 속에서 오직 백무린의 영혼만이 홀로 격동하고 있었다.
그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설자화의 소매 자락 틈새에 숨겨져 있던 허름한 쇠붙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그녀가 백무린을 구하기 위해 천하를 뒤져 수집해 왔던, 고대 뇌겁의 기운에 공명하는 검의 파편이었다. 비록 백무린의 오감은 마비되었으나,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겁경무량의 기운이 그 파편이 뿜어내는 기이한 파동을 감지하고 있었다. 파편은 마치 다가올 거대한 천벌을 기다리는 피뢰침처럼,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인과의 실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슬픔을 받아들인 대가는 참혹했으나, 그 참혹함의 끝에서 기적이 잉태되었다.
모든 감각이 소멸한 백색의 심연 속에서, 도리어 백무린의 영혼이 눈을 떴다.
‘이것이... 나의 종착지인가.’
일체의 인위(人爲)가 가라앉자, 명경지수와도 같은 영안(靈眼)이 개안했다.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심안(心眼)이 열려 우주의 전 궤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그가 청명진과 깊은 인과적 교감을 나눌 때마다 발생했던 가벼운 시각 왜곡은, 실상 이 거대한 심안의 개안을 준비하기 위한 천도의 예조(豫兆)에 불과했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더는 형체와 색깔로 이루어진 물질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수한 인과(因果)의 실타래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아내는 찬란한 법륜(法輪)의 세계였다.
백무린의 심안이 화산의 산문을 굽어보았다. 가장 먼저 어둠 속에서 붉고 탁하게 요동치는 기운이 보였다. 청명진의 단전이었다.
과거 사패천이 청명진의 단전 깊은 곳에 심어두었던 검은 마교의 씨앗, 즉 마태(魔態)가 이 혼란을 틈타 마침내 만개하려 하고 있었다. 청명진의 자하진기가 아무리 맹렬히 회전해도, 뼛속 깊이 박힌 그 사악한 씨앗은 제자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그를 종국에는 마인(魔人)으로 타락시킬 터였다.
‘내 너에게 기연을 허락했으니, 그 대가 또한 내가 짊어지리라.’
백무린은 망설임 없이 겁경무량의 인과법율을 발동했다.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과 진기를 아낌없이 쪼개어 청명진의 단전으로 밀어 넣었다. 인위적으로 적중하는 기연을 설계하는 절대의 권능이 가동되는 순간, 백무린의 영혼에 천벌의 낙인이 깊게 새겨지며 수명이 급격히 단축되는 고통이 엄습했다. 육신은 피를 흘리며 무너져 내렸으나, 그의 영혼은 도리어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
화산의 대광장 한편에서 청명진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단전을 찢어발길 듯한 고통이 일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스하고 거대한 자색의 기운이 차올랐다. 사패천이 심어두었던 검은 씨앗이 백무린의 대속적 진기에 의해 영구히 정화되며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청명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하진기는 이제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화산의 정수로 거듭나 화창한 매화 향을 풍기며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백무린의 심안에 또 다른 간사한 궤적이 포착되었다.
기어이 살아남아 기회를 노리던 종남학이었다. 청명진에게 패해 무참히 짓밟혔던 그는 광기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사두했던 암기, 영혼을 좀먹는 파혼침(破魂針)을 꺼내 들고 청명진의 등 뒤를 겨누고 있었다. 한 번 박히면 영혼까지 부식시키는 영악한 마도의 암기였다.
백무린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심안이 인과의 실 한 가닥을 가볍게 튕겼다.
파앗-!
종남학의 손끝을 떠난 파혼침이 청명진을 향해 날아가던 찰나, 허공에 흐르던 보이지 않는 기류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인과의 궤적이 굴절된 것이다. 칠흑 같은 암기는 대기 속에서 곡선을 그리며 회전하더니, 도리어 발사했던 종남학의 미간을 향해 역류했다.
"억...?!"
종남학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신이 날린 파혼침이 제 이마에 정확히 박히는 순간, 그의 영혼은 스스로가 준비한 맹독에 잠식되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종남학의 시신이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사그라지는 광경은, 비열한 자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과응보의 극치였다.
백무린은 이제 자신을 둘러싼 천도의 법리(法理)를 온전히 이해했다.
천도가 그에게 내리는 무신(武神)으로서의 권위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았다. 도(道)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그 의협의 마음 자체가 곧 천도였고, 우주의 영원한 질서였다. 수명에 연연하지 않는 도심(道心)이 확립되자, 그의 내력은 범속한 무인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하여 대자연의 흐름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사패천이 광포하게 울부짖으며 역천사마도의 장막을 흔들었다. 수백, 수천의 마물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붉은 이빨을 드러내며 백무린과 설자화가 서 있는 절벽을 향해 들이닥쳤다.
"죽어라! 감각을 잃은 시체 놈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백무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칠흑 속에 잠겨 있었고,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가볍게 소매를 떨치자, 그를 중심으로 눈부신 무형의 진기가 해일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빛보다 찬란하고, 강철보다 견고한 인과의 장막이었다.
콰아아앙-!
밀려들던 마물들이 백무린의 신형에서 십 장도 더 떨어진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마치 성난 파도가 거대한 절벽에 부딪혀 포말로 흩어지듯, 마교의 그 어떤 사악한 기운도 그의 영역 안으로 단 한 치도 침범하지 못했다.
오감이 마비되었으나 도리어 우주와 일체가 된 은거고수의 위용. 보이지 않는 기운만으로 마물이 오는 방향 전체를 지배하고 억누르는 그 초절정의 격조 앞에, 사패천의 눈동자가 극도의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것이 정녕 인간의 무공이란 말이냐...! 오감이 멀었는데 어찌 나의 검로를 읽는단 말이냐!"
사패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토록 고고하게 정의를 조롱하던 마두의 안면에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졌다.
백무린은 천천히 가슴에 안은 설자화를 안전한 바위 뒤에 뉘어놓았다. 비록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심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인과의 실은 아직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죽게 두지 않는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패천이 있는 방향을 향해 섰다.
오감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오직 단 하나의 인과만이 선명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지은 피의 업보를 씻어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화산파에 영원한 평화를 안겨줄 최종의 의식이었다.
스스스...
백무린이 등 뒤에 꽂아두었던, 먼지투성이의 낡고 허름한 검집에 손을 얹었다. 평범한 무쇠로 만들어져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만화객잔의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바로 그 검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가볍게 쥔 순간.
쿠르릉-!
구름 한 점 없이 검붉게 타오르던 대낮의 하늘이 일순간 반으로 갈라졌다. 사방 십 리의 대기가 숨을 죽인 가운데, 느닷없이 하늘의 심장부에서 은빛의 거대한 천벌 뇌성이 대지를 향해 사납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