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만화객잔을 허물어뜨린 마도의 손길을 백무린이 제 목숨과 바꾸어 걷어낸 뒤, 화산의 영맥은 붉은 피를 토하듯 요동쳤으나 마침내 대조회의 아침이 밝았다. 청명진이 깊고 눈부신 대도의 마음을 터득해 마침내 일어서자, 화산의 대조회 당일의 웅장한 종소리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진다.

태고의 침묵을 깨우듯 웅혼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낙안봉의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구름을 갈랐다. 화산파의 영기가 무참히 꺾여 매화나무조차 꽃을 피우지 못하던 가혹한 계절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서른여섯 봉우리를 감싼 안개가 자색의 서기를 품고 넘실거렸다. 백색 무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청명진이 비무대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의 단전에서는 사흘 전 만화객잔의 잔해 속에서 완성된 정종 자하진기(紫霞眞氣)가 태극의 형상을 그리며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비무대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종남파의 장로들과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던 무림의 군웅들이 낙안봉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청명진의 손에 쥐어진, 이가 빠지고 녹이 슨 초라한 철검에 머물렀다. 천하의 검협대회에 저토록 비루한 쇳조각을 들고나오다니. 무엄하기 짝이 없다는 조롱과 멸시가 사방에서 빗발쳤으나 청명진의 눈빛은 거울처럼 맑고 고요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처절한 도심(道心)이 그의 곧은 척추를 타고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종남파의 천재, 종남학이 서 있었다. 사흘 전 청명진의 검에 오른쪽 어깨를 관통당하는 비참한 패배를 겪었음에도, 그의 안색은 기이할 정도로 푸른 광채를 띠고 있었다. 어깨의 상처는 검붉은 가죽 두루마리에서 흘러나온 사악한 마기로 강제로 봉합되어 있었고, 그가 내뿜는 진기는 정종의 흐름을 벗어나 광포하게 요동쳤다. 열등감과 질투로 이성을 상실한 종남학의 눈동자가 귀태(鬼胎)처럼 번들거렸다.

"화산의 망나니 녀석이 제 무덤을 스스로 찾아왔구나."

종남학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성은 쇠가 긁히는 듯 불길했다. 그의 손에 들린 태을신검이 자아내는 검기가 비무대 바닥의 돌판을 사정없이 긁어내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러나 청명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채, 만화객잔의 늙은 점소이가 가르쳐 주었던 호흡을 되새길 뿐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하늘의 이치를 담으라던 그 무뚝뚝하고 잔혹한 훈육의 말씀이 귓가를 스쳤다.

연무장 구석, 그늘진 관중석의 아래편에 한 사내가 묵묵히 서 있었다. 헤어지고 때 묻은 청색 장포를 걸친 백무린이었다. 그의 내면은 현재 지옥과도 같았다. 사흘 전 청명진을 구하기 위해 인과의 비기인 겁경무량(劫境無量)을 무리하게 발동한 대가로, 그의 단전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남은 수명은 또다시 수년이 깎여 나갔으며, 심마의 저주가 전신을 파고들어 시야는 이미 흑백의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백무린의 눈앞에 기이한 왜곡이 발생했다.

흑백의 세상 속에서 오직 청명진의 신형만이 찬란한 자색(紫色)의 선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청명진이 들이쉬고 내쉬는 진기의 흐름, 그의 단전에서 회전하는 자하진기의 궤적이 백무린의 망막 위로 생생하게 겹쳐 들었다. 타인과 깊은 인과적 교감을 나눌 때 발생하는 가벼운 시각 왜곡이자, 심마의 오감마비 패널티가 시각 공유의 형태로 발현된 전조였다. 무린은 밀려드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품속을 지그시 눌렀다. 설자화가 수많은 난관을 뚫고 구해다 준, 뇌겁의 기운에 공명하는 고대 검의 파편이 그의 온기를 따라 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제자가 제 손으로 화산의 영광을 되찾는 이 순간을, 눈이 멀기 전에 반드시 지켜보아야 했다.

"죽어라, 화산의 잔당!"

종남학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검 끝에서 종남파가 자랑하는 태을십팔수(太乙十八手)의 정수가 폭발했다. 수십, 수백 개의 검로가 허공을 수놓으며 청명진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 쏘아져 내렸다. 그것은 정종의 거대한 검막이 아니라, 마교의 기운이 섞여 기괴하게 뒤틀린 살인의 그물망이었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저토록 정교하고 매서운 검로를 화산의 일개 후기지수가 막아낼 방도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청명진의 신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종남학의 검로는 난잡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백무린이 설계해 준 지옥 같은 참오 속에서, 청명진은 이미 세상 모든 검의 근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화산의 뿌리이자 강호의 모든 검학이 시작되는 기초 중의 기초, 삼재검(三才劍)의 첫 초식이 청명진의 손끝에서 무심히 펼쳐졌다.

스윽.

허공을 가르는 것은 화려한 검초가 아니었다. 앙상한 매화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극히 평범하고 완만한 궤적이었다. 천(天), 지(地), 인(人)의 이치를 담은 단순한 종단(縱斷)이 종남학이 펼친 태을십팔수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콰아아앙!

기괴하게 얽혀 있던 푸른 검기들이 청명진의 녹슨 철검이 만들어 낸 단 한 줄기의 선에 부딪쳐 유리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단순한 삼재검의 일초가 종남파의 비전 검로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것이다.

"무, 무슨……! 삼재검 따위가 어찌 내 태을검을 깨뜨린단 말이냐!"

종남학이 허공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관중석의 무림맹 고수들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식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아니라, 검의 근원을 이해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극의(極意)의 도가 화산의 애송이에게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초식이 화려한들 근본이 썩어 있다면 한낱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청명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리지 않는 대도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

"이 건방진 놈이!"

종남학은 광포하게 자하진기를 가동하려는 청명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청명진의 단전 깊은 곳, 백무린의 혜안에는 뚜렷이 보이는 사악한 움직임이 있었다. 사패천이 심어둔 검은 마교의 씨앗(마태)이 청명진이 정종의 기운을 끌어올릴 때마다 검은 독무를 뿜어내며 그의 도심을 갉아먹으려 꿈틀대고 있었다. 청명진은 고통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단전이 찢어지는 듯한 마기의 침투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검을 뻗었다.

화산의 비전, 자하검법(紫霞劍法)의 일초가 대조회의 하늘을 자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자색의 검기가 녹슨 철검의 이 빠진 틈새를 메우며 거대한 매화꽃 봉오리를 형상화했다. 화산의 진정한 정수가 실체화되는 순간이었다. 종남학은 제 모든 검로가 청명진의 단순한 일초 아래 완벽한 하위의 무학으로 격하당하는 굴욕을 견디지 못했다. 그가 평생을 쌓아 올린 천재라는 명성이, 화산의 무명 제자가 펼치는 기초 검법 앞에 초라한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질 리가 없다!"

종남학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금 검을 휘둘렀으나, 청명진의 자하검기는 이미 그의 모든 방어망을 종이 찢듯 찢어발기고 있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종남학의 검기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완벽한 압도였고, 철저한 단죄였다. 종남학은 무릎을 꿇기 직전의 굴욕적인 태세로 비무대 구석까지 밀려났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자하진기의 강력한 정화의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싼 마기를 태워 들어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종남학의 눈에 비열한 살기가 스쳤다. 관중들의 시선이 청명진의 찬란한 자하검기에 쏠려 있는 바로 그 찰나, 종남학의 왼손 소매 속에서 은밀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종남파의 금기이자, 영혼을 좀먹는 파혼침(破魂針)이었다. 극독과 원한의 저주가 서린 세 자루의 검은 바늘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무 도중 암기를 사용하는 것은 무림의 엄격한 규율을 위배하는 짓이었으나, 이성을 잃은 종남학에게는 더 이상 정파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오직 청명진을 죽이고 이 치욕을 씻어내겠다는 맹목적인 일념뿐이었다.

'죽어라, 화산의 개새끼야!'

종남학이 내공을 쥐어짜 청명진의 목덜미를 조준했다. 그의 손끝에서 세 자루의 파혼침이 소리도 없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침끝에는 살을 썩히고 뼈를 녹이는 극독이 발라져 있어, 스치기만 해도 단전이 무너지고 영혼이 파괴되는 절명의 일격이었다. 청명진은 자하검법의 초식을 완성하느라 미처 방어할 틈을 찾지 못했다.

그 암습의 궤적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연무장 구석의 백무린이었다.

그의 흐려져 가는 백색의 시야 속에서, 세 가닥의 검은 인과의 실이 청명진의 목덜미를 향해 똑바로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침이 청명진의 몸에 닿는 순간, 단전의 마태가 폭주하여 제자는 영원히 마인으로 타락할 것이었다.

무린의 가슴속에서 격렬한 안도와 제자를 구하고자 하는 정념이 폭발하듯 일어났다.

동시에 살업의 심마가 그의 남은 청각마저 삼키기 위해 흉포한 이빨을 드러냈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리며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시각에 이어 청각마저 마비되는 천벌이 시작된 것이다. 전신의 혈도가 터져 나가며 장포 속으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무린은 냉혹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수명 중 또 한 해를 주저 없이 불태웠다.

"겁경무량(劫境無量)——."

소리 없는 외침이 그의 마음속에서 대종을 치듯 울렸다.

무린이 묵묵히 관중석 아래에서 비틀린 인과의 기운을 향해 오른손 끝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공간의 인과율이 강제로 뒤틀리는 기괴한 진동이 비무대 허공을 휩쓸었다. 청명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지던 세 자루의 파혼침이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붙잡힌 듯 기괴하게 뒤틀렸다.

"뭐, 무슨……?!"

종남학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순간, 인과의 법칙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쉬이익!

반사된 인과의 실을 따라, 세 자루의 파혼침이 원래 날아왔던 궤적을 고스란히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의 방향 전환이 아니었다. 인과를 비틀어 가해진 업보를 시전자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는, 하늘의 단죄였다.

"억……!"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역류한 파혼침 중 가장 날카로운 한 자루가 종남학 자신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에 정확하게 수직으로 꽂혀 들어갔다.

푸학!

검붉은 마기와 함께 종남학의 백회혈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영혼을 좀먹는 극독이 그의 전신 혈도를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종남학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죽어 가며, 그의 단전에 깃들어 있던 마교의 기운이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자멸의 불꽃으로 변했다.

"커, 헉! 으아아아악!"

종남학이 사지를 비틀며 비무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비열한 암기에 스스로 찔려 영혼이 바스러지는 천벌을 받는 꼴이었다. 비무대 위에는 지독한 악취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종남학의 육신은 스스로 타오르는 사마의 불길 속에서 무참히 붕괴해 갔다. 독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야비한 반칙의 구도가, 백무린이 설계한 무결점의 인과 법칙에 의해 완벽한 자멸의 단죄로 귀결된 것이다. 연무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종남학이 사지가 불타며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는 바로 그 찰나.

쿵——!

낙안봉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지동(地動)과 함께, 화산의 푸른 하늘 전체가 피처럼 시뻘겋게 침식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지상으로 내려앉았고, 대조회장의 하늘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심연의 가마가 소리 없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어둠의 틈새로, 은밀하게 숨어 있던 마교의 장로 사패천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온 산천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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