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天地)를 가르는 청색의 뇌정(雷霆)이 만화객잔의 지붕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수십 년 세월을 버텨온 목조 지붕이 처참하게 분쇄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과 타오르는 불씨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중심, 붉은 안개를 토해내며 기이하게 고동치는 거대한 혈단(血丹)이 마침내 그 흉포한 자태를 세상에 드러냈다. 만화객잔의 지맥과 백무린의 남은 생명선이 얽혀 있는 최후의 금기가 천벌의 빛 아래 무참히 노출된 것이다.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이 무린의 창백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붕이 날아간 객잔 내부로 거센 밤바람이 몰아쳐 먼지와 그을음을 흩뿌렸으나, 그의 시선은 오직 제자 청명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부…… 윽, 으아아악!"
청명진의 입술 틈새로 한 줌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백무린의 겁경무량(劫境無量)으로 전수된 정순한 자하진기가 그의 단전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사패천이 심어둔 검은 마태(魔胎)가 천벌의 기운에 감응하여 발악적인 저항을 시작한 탓이었다.
정(正)과 사(邪)의 극렬한 충돌은 청명진의 나약한 기경팔맥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이미 종남학이 비열하게 쏘아 보냈던 파혼침(破魂針)의 독기와 단전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던 마교의 씨앗이 한데 엉켜, 그의 혈도는 마치 성난 파도에 뒤틀리는 밧줄처럼 기괴하게 꼬이고 있었다.
"참아라. 도심(道心)을 잃지 마라."
무린의 음성은 낮고 무거웠으나, 단전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기의 파동은 이미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지붕의 파편 틈새에서 설자화가 수집해 왔던 고대 검의 파편들이 청색 번개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쇠붙이가 울부짖는 공명음이 사방을 메웠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매개체조차도 천도가 내리는 단죄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매서운 뇌겁의 유탄이 사방으로 튀며 청명진의 전신 혈도를 자극할 때마다, 소년의 신형은 부러질 듯 요동쳤다.
그 처절한 고통의 광경을 바라보던 무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세한 일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은 아비의 참담함이자, 대속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스승의 숭고한 연민이었다.
그 정서적 파동이 일어난 찰나, 무린의 단전 깊은 곳에 각인된 살업의 심마가 무자비하게 깨어났다.
스스스스.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색채가 바래기 시작했다. 불타는 객잔의 붉은 화염도, 청명진의 옷자락을 적신 선혈의 붉은빛도 순식간에 회청색의 무채색으로 가라앉았다. 오감을 마비시키는 심마의 저주가 그의 영혼을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무린의 두 눈에 기이한 환영이 겹쳐졌다.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는 동시에, 청명진이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이 그의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타오르는 천장의 불꽃과 무너져 내리는 대량(大樑), 그리고 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종남파의 사악한 그림자까지. 인과의 기연을 전수하며 맺어진 깊은 영적 교감이, 심마의 패널티와 천벌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벼운 시각 왜곡과 시각 공유의 중간 형태로 발현된 것이었다.
'이것은…… 저 아이의 눈인가.'
무린은 짧은 경탄을 삼켰다. 제자의 시야와 자신의 시야가 하나로 포개지며 강호의 인과율이 요동치는 감각은 경이로웠으나, 천도는 그마저도 무참히 앗아갔다.
툭.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지듯, 뇌리를 채우던 제자의 시야가 사라짐과 동시에 무린의 눈앞이 완벽한 암흑으로 뒤덮였다. 시각의 완전한 마비였다.
눈을 뜨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칠흑의 심연 속에서 오직 불타는 나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살을 에는 듯한 열기, 그리고 귀를 찢는 뇌성의 잔향만이 고막을 때릴 뿐이었다.
"사부님! 사부님……! 제 몸이, 단전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청명진의 비명이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자하진기가 뒤틀린 혈도를 뚫지 못하고 역류하여 심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 혈맥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소년은 자폭하거나 마태에 잠식되어 마인(魔人)으로 전락할 터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체절명의 위기.
범인(凡人)이라면 절망하여 손을 놓았을 순간이었으나, 천하를 평정했던 무신의 안광은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눈이 멀었다 하여, 도(道)마저 멀어지겠는가."
무린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손끝이 천천히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갔다.
시각은 사라졌으나, 그의 영혼에는 또 하나의 눈이 존재했다. 겁경무량의 인과율이 그려내는 붉은 실타래, 하늘의 운명과 제자의 생명선이 얽힌 숭고한 벼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육신의 안구가 아닌, 심안(心眼)으로 바라보는 천기(天機)의 지도였다.
스윽.
무린의 신형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검처럼 날카롭게 세워지며 청명진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갔다.
타앗!
정확하게 수돌혈(水突穴)을 짚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백발백중의 지법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정밀하고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크흑!"
청명진의 몸이 크게 들썩였으나, 역류하던 진기의 물줄기가 한 갈래 꺾이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오직 마음의 통로만을 의지한 채, 제자의 폭주하는 대단전을 향해 자신의 정순한 기운을 실어 보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청명진의 뒤틀린 혈도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천돌(天突), 거궐(巨闕), 기해(氣海)를 거쳐 관원(關元)에 이르는 맥로가 백 발 백 중으로 교정되며, 기연의 붉은 실이 그 위를 촘촘히 수놓았다.
"사부의 마음을 보아라. 화산의 검은 기운이 아니라, 스스로 피는 꽃이다."
무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하진기가 청명진의 단전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전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남은 수명과 생명력을 깎아 제자의 영혼에 정종의 도(道)를 새겨 넣는 숭고한 구도 행위였다.
청명진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인도하는 사부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했다.
사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손끝에 실린 진기가 급격히 쇠락해가며 수명을 다해가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청명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아집과 원한의 찌꺼기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사부의 대속(代贖)이야말로 자신을 살리는 유일한 빛임을 깨달은 것이다.
우웅-!
청명진의 단전 내부에서 마침내 정종 자하진기가 완전한 구 형태를 이루며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패천의 사악한 마태는 무린의 위대한 대화(大化)의 진기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정화되어 갔고, 종남학이 심어둔 파혼침의 독기 또한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소년의 전신에서 오색의 찬란한 자하의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쇠락한 화산파에 수백 년 만에 다시 피어난 진정한 자하도인의 기상이었다.
사부가 눈 먼 어둠 속에서 오직 심안과 인과의 실만으로 폭주하는 제자의 대단전을 완벽하게 구출해 내는 정점의 감응. 그 위대한 기적이 불타는 만화객잔의 잔해 속에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마침내 내리치던 청색 번개가 잦아들고, 객잔을 집어삼키던 불길도 자하진기의 장막에 밀려 서서히 사그라졌다.
청명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깊고 눈부신 자하의 광채가 서려 있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던 독종의 기질 위에, 천지의 도리를 품은 웅혼한 도심(道心)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내 화산의 참된 검이자 수호자로 일어선 것이다.
그가 감격에 겨워 사부를 향해 무릎을 꿇으려던 그 찰나였다.
뎅————!
멀리 화산의 주봉, 옥녀봉 정상에서부터 시작된 웅장하고 무거운 구리 종소리가 온 산하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끊임없이 이어지는 종소리는 정파 무림의 모든 명숙들과 종남파의 무리들이 모여드는 화산파 대조회(大朝會)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침내 종남파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 그리고 화산의 운명을 가를 최후의 장이 열린 것이다.
청명진은 청아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검가에 꽂힌 녹슨 철검을 굳게 쥐었고, 눈 먼 사부 백무린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대조회(大朝會)를 알리는 종소리는 화산의 영봉을 타고 장엄하게 메아리쳤으나, 그 웅장한 울림의 끝자락에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한기(寒氣)가 묻어 있었다.
"사부님, 저 소리는……."
청명진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하진기를 이룩한 자의 단단한 공력이 실려 있었으나, 스승의 멀어버린 눈을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을 숨기지 못했다.
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이목(耳目)은 도리어 한층 예리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바람의 결, 대기의 요동, 그리고 산자락을 타고 밀려오는 불길한 탁기(濁氣). 그것은 단순한 무림인들의 조회가 아니었다. 화산의 지맥을 송두리째 옭아매고, 그 영맥을 마교의 붉은 피로 물들이려는 거대한 제단(祭壇)이 화산파의 본산에 차려지고 있음을 뜻했다.
스스스스.
객잔의 타버린 지붕 틈새로 검붉은 안개가 연기처럼 기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잔해 속에서 옥빛 장포자락을 털며 일어선 설자화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녀의 품 안에서 가늘게 공명하던 고대 검의 파편이 뇌겁의 잔열을 머금은 채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천벌의 천기(天氣)에만 반응하는 영물. 검의 파편이 이토록 거칠게 울부짖는다는 것은, 천벌의 법칙을 사악한 방법으로 비틀어 내리는 역천(逆天)의 사마도가 지척까지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무린, 종남의 기운이 아니야. 마교의 흑화사마(黑化邪魔)들이 이미 산을 에워쌌어. 대조회는 저들이 판을 짜놓은 도살장이야!"
설자화의 다급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너진 만화객잔의 마당 한가운데가 검은 불길에 그슬리듯 쩍쩍 갈라졌다.
스스스슥!
갈라진 흙바닥 틈새로 솟구친 것은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괴이한 그림자였다. 그림자의 중심에 선 사내, 종남학이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는 이미 청명진의 자하검기에 꿰뚫려 해골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었으나,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검붉은 마기(魔氣)의 형상이었다. 종남학의 품에서 피어오른 검붉은 가죽 두루마리가 허공에 둥글게 펼쳐지며, 그 표면에 새겨진 악귀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붉은 빛을 토해냈다.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이 힘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종남학의 목소리는 쇠가 긁히는 듯한 파성(破聲)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마교의 흉포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패배의 굴욕과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마교의 장로 사패천이 던져준 검붉은 가죽 두루마리의 금기를 완전히 열어젖힌 대가였다.
"청명진! 네놈이 화산의 자하를 얻었다 한들, 역천사마도의 위력 앞에서는 한낱 불씨에 불과하다. 오늘 이곳이 너와 네 늙은 스승의 무덤이 되리라!"
종남학이 광소하며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 광채를 뿜어내는 정교하고 날카로운 비수들이 벼락처럼 일어섰다. 영혼을 좀먹는 파혼침(破魂針)이었다. 단순한 암기를 넘어, 사패천의 사악한 마도 주술이 결합된 절대의 절명침(絶命針).
그 비수들이 가리키는 끝에는 청명진뿐만 아니라, 무린의 단전 깊숙이 도사린 혈단(血丹)이 있었다. 종남학은 만화객잔의 지맥과 얽힌 무린의 생명선을 끊어놓음으로써, 청명진의 도심을 꺾고 그 단전 속 마태를 완전히 폭발시키려 하는 것이다.
스으으읍.
무린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시각이 완전히 마비된 암흑 속에서, 종남학이 뿜어내는 마기의 궤적과 파혼침의 차가운 궤적이 붉은 인과의 실선으로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이미 겁경무량의 대가를 치르느라 한계에 달해 있었다. 전신의 혈도가 타들어 갈 듯한 격통이 밀려왔고, 폭주하려는 진기를 누르느라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처지였다.
"사부님, 제 뒤에 서십시오."
청명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년의 등에 짊어진 녹슨 철검이 자하진기의 공명에 호응하여 은은한 자색 빛을 발했다. 도심을 깨달은 그의 신형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화산의 참된 기상이 그의 어깨 위로 웅장하게 내려앉았다.
"어리석은 놈. 스스로 파멸을 재촉하는구나!"
종남학이 손목을 털었다.
슈우우우웅!
검은 파혼침 세 자루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청명진의 안면과 가슴, 그리고 무린의 혈단을 향해 동시에 쏘아져 왔다. 단순한 속도가 아니었다. 허공을 가르며 공간 자체를 기괴하게 동결시키는 마도의 사법이 결합된 죽음의 일격이었다.
그 순간, 무린의 심안(心眼)이 강렬하게 요동쳤다.
청명진이 자하진기로 두 자루의 침은 막아낼 수 있을지언정, 마도의 궤적을 그리며 꺾여 들어오는 마지막 한 자루의 파혼침이 그의 단전 깊은 곳, 겨우 억눌러둔 마교의 씨앗(마태)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음을 간파한 까닭이었다. 그 침이 단전에 닿는 순간, 청명진은 마인으로 타락한다. 스승으로서 그것만큼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파멸의 인과였다.
무린의 가슴속에서 제자를 구하고자 하는 거대한 정념(情念)이 폭발했다.
동시에, 살업의 심마가 그의 남은 오감마저 삼키기 위해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며 단전의 진기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리더니, 서서히 세상의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청각마저 마비되는 심마의 천벌이 시작된 것이다.
진기의 폭주로 전신 혈도가 터져 나가며 피안개가 피어오르는 와중에도, 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남은 수명 중 또 한 해를 기꺼이 불태웠다.
"겁경무량(劫境無量)——!"
무린이 마음속으로 비기를 종치듯 울렸다.
그의 흐려져 가는 청각 너머로, 공간의 인과율이 강제로 뒤틀리는 기괴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무린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무형의 인과의 실이, 허공을 날아오던 마지막 파혼침의 궤적을 강제로 옭아매었다.
콰드득!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힌 듯 파혼침이 멈칫하며 궤적을 잃고 비틀거렸다.
"무, 무슨……?!"
종남학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늦었다.
청명진의 녹슨 철검이 자색의 사선(斜線)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자하진기가 벼려낸 찬란한 검기가 어둠을 찢고 종남학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쏘아져 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패천이 남긴 검붉은 가죽 두루마리가 스스로 타오르며 기괴한 마기의 결계를 형성했다. 청명진의 자하검기가 마기 결계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만화객잔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개(無蓋)의 절벽 아래, 굉음과 함께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무린은 전신의 감각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지옥 같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각에 이어 청각마저 잃어버린 암흑의 세계.
그리고 그 침묵의 장막을 찢고, 무너지는 객잔의 기와 더미 너머로 정체 모를 거대한 마도의 손길이 청명진의 정수리를 향해 소리 없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대조회의 종소리가 여전히 메아리치는 화산의 품 안에서, 사패천의 진정한 음모가 마침내 이 비극적인 객잔의 잔해 위로 그 검은 이빨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