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동성심병원의 최상층, 이사장실의 광활한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도심의 불빛들은 마치 거대한 심전도 모니터의 파형처럼 명멸하며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당신은 천연 가죽 시트의 깊은 감촉을 느끼며 이사장 직인이 찍힌 명패를 손끝으로 쓸어내립니다. 윤우주. 재단 역사상 최연소 이사장 겸 병원장.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손에는 피 묻은 메스와 차가운 석션 팁이 들려 있었습니다. 관동맥 우회술을 집도하며 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미세 현미경의 시야 속에서, 당신은 오직 생과 사의 경계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환자의 바이탈 사인이 아닙니다. 계열사 주식 보유 현황, 이사회 우호 지분율, 그리고 반대파 의원들의 약점을 기록한 두꺼운 비밀 보고서입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

당신은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박 실장을 비롯해 재단을 갉아먹던 암세포들은 완벽하게 절제되었습니다. 법정이라는 이름의 수술대 위에서,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지가 도려 나갔습니다. 복수는 단 한 방울의 잔혈도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집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슴팍이 기이할 정도로 서늘합니다.

눈을 감자, 언제나 당신의 망막 위에 푸르게 빛나던 ‘정밀 수술 라이선스 시스템’의 홀로그램이 희미하게 명멸합니다. 환자의 심장 근육 상태를 실시간으로 스캔하고, 협착된 혈관의 정확한 문합 위치를 짚어주던 그 신비로운 빛. 하지만 지금 시스템의 메시지 창에는 붉은색 노이즈가 가득합니다.

[경고: 집도 의사의 생체 신호 동기화 실패.] [알림: 시스템의 잔여 가동 능력이 0%에 수렴합니다. 의사로서의 핵심 가치 소실.]

어느샌가 시스템은 당신을 '의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메스를 들어 생명을 살리기보다, 펜을 들어 권력을 쳐내는 손길에 시스템의 정밀함은 마모되어 썩어 들어갔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던 푸른 광휘는 기름진 탐욕의 그을음에 덮여 결국 차갑게 꺼져 버립니다. 당신은 더 이상 신의 손을 가진 천재 외과의가 아닙니다. 그저 웅장한 병원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심장부를 차지한 포식자일 뿐입니다.

비정하고 적막한 이 방에 이제 당신의 편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던 레지던트들도, 끝까지 생명을 살리자며 눈물을 글썽이던 동료 의사들도, 이제는 당신을 공포와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당신이 몰아냈던 옛 정적들과 똑같은 눈빛을 한 채로.

탁, 탁.

노크 소리와 함께 이사장실의 묵직한 목조 문이 열립니다. 새로 부임한 기획실장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입니다. 그의 손에는 경쟁 병원을 무너뜨릴 또 다른 비자금 세무조사 기획서가 들려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어둠 속에 반쯤 잠긴 그 차가운 미소는, 당신이 그토록 증오하며 끌어내렸던 박 실장과 전임 병원장의 그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습니다.

당신은 천천히 보고서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도려내야 할 적들이 아직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고, 당신은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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