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중환자실(ICU)의 공기는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건조하다. 규칙적인 맥박음(ECG beep)과 인공호흡기(Ventilator)의 정교한 풀무 소리만이 고요한 어둠 속을 채운다. 불과 몇 시간 전, 정전과 폭발의 아비규환 속에서 당신은 혼신을 다해 사투를 벌였다. 전기가 끊긴 암흑 속에서 오직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한 채 센트럴 라인을 잡고, 수동식 앰부백을 쥐어짜며 환자들의 맥박을 붙잡아 두었던 오른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린다.

기적이었다. 당신의 신속한 판단과 시스템의 정밀한 보조 덕분에 임종 직전의 비상경보(Code Blue) 환자들은 모두 생사의 문턱을 넘어 돌아왔다. 바이탈 모니터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동방결절(Sinus node)의 규칙적인 파형이 그 증거다. 의사로서 이보다 완벽한 구명(救命)은 없다.

하지만 당신의 시선은 중환자실 모니터 너머, 차갑게 꺼진 스마트폰 화면에 멈춰 서 있다. 조금 전 전달받은 수사팀의 짤막한 문자 메시지가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한다. [피의자 일당, 남해 해상을 통해 밀항 완료 확인. 선박 추적 불가. 지하 서버 화재로 비자금 실물 및 회계 장부 완벽 소실. 공소권 처분 사실상 불가능.]

그들이 빠져나갔다. 이사장과 박 실장,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타락한 권력으로 병원을 좀먹던 주범들은 사법 시스템의 그물코를 비웃으며 완벽히 도주했다. 그들이 저지른 의료 범죄와 살인 공모의 증거가 담긴 메인 서버는 폭발과 함께 고열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추악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재단과, 살아남은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 명예로운 ‘영웅 레지던트’ 윤우주라는 허울뿐인 타이틀이다.

"윤 선생, 정말 대단해. 자네가 우리 병원의 품격을 지켰어." 소동이 가라앉자 슬그머니 나타난 행정부원장이 당신의 어깨를 치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그의 눈빛에는 숭고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없다. 그저 파산을 면했다는 안도감과, 언론에 홍보할 가치가 충분한 젊은 천재 의사를 향한 만족스런 탐욕이 일렁일 뿐이다.

당신은 대꾸 없이 부원장의 손길을 흘려보낸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당직실로 돌아와 홀로 문을 잠근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11번 메스(Scalpel) 날이 무정형의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날카롭게 번뜩인다.

의사로서 승리했으나, 복수자로서 당신은 완벽하게 패배했다. 환자의 육체는 살려냈으되, 당신의 영혼을 얽맨 복수의 갈증은 채워지지 못한 채 밤하늘 너머로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푸르게 일렁이는 시스템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당신은 메스를 쥔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를 하얗게 움켜쥔다. 닿지 않는 적을 향한 차가운 살의만이, 빈 껍데기만 남은 수술실의 정적 속에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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