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한양 객사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별채.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촛불의 미세한 떨림만이 벽면에 길게 늘어진 두 그림자를 흔들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붉은 비단으로 감싼 밀서 한 통이 놓여 있었고, 그 끝을 지시하는 손가락은 해골처럼 앙상했다.

“이것이 영안세제 이강이 도성 외곽의 옹기 가마터로 위장해 둔 비선 야철소의 상세한 위치와 내부 구조입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명 세도가 양서화였다. 그의 단정한 도포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세제 이강의 손에 수하들을 잃고 벼랑 끝까지 밀려난 그에게 남은 카드는 단 하나, 대명 천자의 권위를 빌려 조선의 싹을 짓밟는 것뿐이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명나라 칙사단의 수장, 사 태감이 가느다란 눈매를 좁히며 밀서를 집어 들었다. 사 태감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호선을 그렸다.

“조선의 세제가 감히 상국의 눈을 속이고 사사로이 무쇠를 녹여 병기를 만든다?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발악이구나. 천자국의 사열단이 직접 나서서 그 요사스러운 소굴을 짓밟아 주지. 제아무리 영리한 세제라 한들, 대명(大明)의 군사 사열권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서화의 얼굴에 어두운 희열이 번졌다. 사태감의 기습적인 군사 사열 요구는 조선 조정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천자의 명령이었다. 그 사열의 칼날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영안세제 이강의 목줄이었다.

* * *

같은 시각, 도성 외곽의 영안궁 비선 가마터.

“저하! 궐에서 급보가 내려왔사옵니다!”

전령의 비명 섞인 외침이 가마터의 매캐한 연기를 찢었다. 땀과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채 도가니를 살피던 이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전령이 내민 서찰로 향했다. 국왕 이도의 친필로 쓰인 급보였다.

[명나라 칙사 사태감이 내일 아침, 천자국의 사열권을 행사하겠다며 도성 내의 모든 조병창과 사저 가마터의 전면 개방을 요구했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동조하여 과인으로서도 더는 막아설 명분이 없구나. 세제는 즉시 대비하라.]

서찰을 읽어 내리는 이강의 눈빛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주변에 서 있던 호위청 신료들과 장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명나라 사신단이…… 벌써 강을 건넜단 말입니까?” “사열이라니요! 이곳의 백련강 단조 설비와 제작 중인 화포 도면이 천자의 사냥개들에게 넘어가면, 세제 저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이 달아날 것입니다!”

사색이 된 신료들이 우왕좌왕하며 절망적인 탄식을 뱉어냈다. 가마터의 장인들 역시 망치를 쥔 손을 덜덜 떨며 이강의 처분만을 바라보았다.

“시끄럽다.”

이강의 나직한 한마디에 소란스럽던 가마터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강은 구겨진 서찰을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불꽃이 서찰을 집어삼키며 붉게 타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백 개의 전술적 계산과 물리적 수치들이 폭풍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사태감의 사냥개들이 마침내 냄새를 맡고 움직이기 시작했군. 양서화 그자가 결국 뱀의 대가리를 부추겨 둥지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이강이 차갑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가마터 한편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도가니로 향했다.

“박기현.” “예, 예! 저하!”

천민 철화장 박기현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백련강의 주조 상태는 어떠하냐?” “그것이…… 가마 내벽의 열 손실이 너무 심해 쇳물의 온도가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탄소 분리율을 높이려면 온도를 더 올려야 하는데, 지금의 옹기 가마 구조로는 열기가 자꾸 밖으로 빠져나가 백련강의 순도가 떨어집니다요. 이대로 사열단을 맞이하면 조악한 쇳덩이만 보여주게 될 판입니다.”

박기현이 이빨을 악물며 분통해했다. 가마를 수백 번 깨부수며 토법을 개량해 왔지만, 단시간 내에 가마의 밀폐성과 열 보존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이강의 눈앞에 ‘정밀 설계의 안(眼)’이 파랗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가마의 내부 온도와 열전도율이 3D 그래픽의 수치로 투사되었다.

[가마 내벽 열 손실율: 34%] [목표 온도 도달 불가. 주강포 주조 실패 확률: 92%]

이강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물리적 한계라. 하지만 화학적 촉매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이강은 품 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과거 가마터 수색 도중 우연히 발견해 보관해 두었던 기묘한 노란빛의 결정체가 들어 있었다. 유황 광산의 깊은 갱도에서 추출한, 특수 화성(火成) 결정이었다.

“이것을 보아라.” “이건…… 유황 결정이 아닙니까? 하지만 유황은 화약의 원료일 뿐인데, 이것으로 어찌 가마를 보강한단 말씀이십니까?”

박기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강은 결정을 흔들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유황이 아니다. 황화수소와 고순도 규산염이 극도로 압축되어 결합한 미시 구조를 지니고 있지. 이것을 곱게 갈아 점토, 그리고 흑연 분말과 특정 비율로 배합해라. 그리고 가마 내벽에 얇고 고르게 도포해라.” “예? 가마벽에 유황 배합 도료를 바른다고요? 불이 붙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유황의 가스화 온도를 제어할 만큼의 황토 점토 비율을 유지하면 폭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결정의 규산 성분이 고온에서 유리질막을 형성해, 열기가 가마 외벽으로 방출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할 것이다. 대류 열 보존율이 최소 두 배 이상 상승한다. 내 말이 맞는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이강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박기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제의 기묘한 지식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당장 장인들을 소집해 도료를 배합하겠습니다!”

박기현이 소리치며 장인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가마터는 다시 한번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강은 가마벽에 발라지는 도료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다음 단계의 법적 전장을 설계했다. 사열단이 들이닥치기 전에, 조정의 사대부들이 쳐놓은 법적 그물망부터 찢어발겨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근정전.

조정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백색 소복을 입은 사림의 영수 예조판서 김덕형이 앞장서서 국왕 이도 앞에 엎드렸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사대부들이 줄을 지어 엎드려 있었다.

“전하! 영안세제의 요사스러운 행보가 마침내 천자국의 대노를 샀사옵니다! 명나라 칙사단이 세제의 사사로운 야철 행위를 엄중히 다스리기 위해 군사 사열을 요구한 것은 사대(事大)의 도리를 저버린 세제의 자업자득이옵니다!”

김덕형의 목소리가 전각 천장을 울렸다. 그는 품 안에서 두꺼운 예서 사료 뭉치를 꺼내 들어 올렸다.

“본직이 세제의 행적을 감시하며 모은 사료들에 따르면, 우리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 명시된 제기(祭器) 및 야철 독점권은 오직 조정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사옵니다! 세제가 사사로이 가마를 짓고 쇳물을 녹인 것은 경국대전을 참람히 위반한 것이며, 상국에 대한 불충이옵니다! 당장 세제의 가마터를 폐쇄하고, 세제를 대명 칙사단 앞에 꿇려 사죄하게 하소서!”

사대부들의 웅성거림이 조정을 가득 채웠다. 김덕형의 얼굴에는 승전보를 울리는 장수와 같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가 수개월 동안 은밀히 수집한 예서 사료들은 세제의 목을 죄기에 충분한 법적 칼날이었다.

그때, 전각 뒤편에서 단호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제 이강이 곤룡포 자락을 휘날리며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예조판서. 그대가 가져온 그 사료들, 참으로 가상하구나.”

이강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김덕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세제 저하! 법전의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가벼운 입놀림으로 죄를 피하려 하십니까!” “죄라?”

이강은 김덕형의 손에 들린 사료 뭉치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사료의 특정 페이지를 펼쳐 김덕형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네가 가져온 이 예장(禮裝) 사료를 똑똑히 읽어 보아라. 태종 대왕과 선대 대왕 시절,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거나 북방의 여진을 방비하기 위한 ‘왕실 직속의 특수 수호 기물’을 제작할 때는 야철 독점권의 예외를 둔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종묘의 제기를 보수하고 왕실의 온돌 전돌을 굽는 옹기 가마는 사헌부의 감찰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예외 원칙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지.”

“그, 그것은…….” “네놈이 세제를 탄핵하겠답시고 샅샅이 뒤져 모은 그 예서들이, 오히려 내가 행한 야철과 가마 운영이 완벽하게 합법적임을 증명하는 전례(前例)가 된 것이다! 내가 만든 가마는 선대 대왕의 묘역에 바칠 특수 수호 기물과 백성들을 위한 구휼용 온돌을 굽는 곳이다. 상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왕실의 권한으로 임시 가동하는 야철이 어찌 참람한 짓이란 말이냐!”

이강의 벼락같은 호통이 조정을 뒤흔들었다. 김덕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세제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법적 무기가, 오히려 세제의 방패가 되어 자신을 꿰뚫은 격이었다.

“경국대전을 논하며 사대를 외치는 자들이, 정작 선대 대왕들이 세워둔 왕실의 예외 전례조차 모르고 날뛰다니. 이것이야말로 왕실을 기만하고 조정을 어지럽히는 불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강의 서슬 퍼런 역공에 사림 세력은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법전의 맹점을 완벽하게 꿰뚫고 역이용한 이강의 정밀한 법리적 승리였다.

* * *

조회가 끝난 후, 편전.

국왕 이도는 깊은 한숨을 쉬며 동생 이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우려와 신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강아. 방금 전의 논쟁으로 김덕형의 입은 막았으나, 명나라 사신단의 사열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태감 그자가 군사 백 명을 이끌고 도성 외곽 일 백 미터 앞까지 사열을 강제하며 우리의 무력을 짓밟고자 한다면, 정녕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도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는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짊어진 슬픈 운명과도 같았다. 이강은 형이자 군주인 이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하. 사대(事大)라는 명분 뒤에 숨어 조선을 영원히 자신들의 위성국으로 묶어두려는 저들의 자만을 꺾지 못한다면, 조선의 자립은 영원한 신기루일 뿐입니다.”

이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저들이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 힘을 아득히 초월하는 물리적 실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단 한 번, 저들의 자만을 일도양단할 기계를 보여주겠습니다. 조선이 상국의 사냥개가 아닌, 스스로 발포할 수 있는 거대한 포신을 가졌음을 천하에 공표하겠나이다.”

이강의 웅장하고도 단호한 맹세에 이도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이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과인이 조정의 사대부들을 막아서며 시간을 벌어줄 터이니, 너는 네가 공언한 그 강철의 힘을 증명해 보이거라.”

* * *

비선 가마터로 돌아온 이강은 즉시 영지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지금 이 시간부로 영안궁 비선 가마터의 모든 사문을 철저히 폐쇄한다. 외부로 통하는 길목에는 옹기 가마의 폐열을 내뿜어 연막을 치고, 겉으로는 조잡한 그릇만을 굽는 것처럼 위장해라.”

이강의 영민한 눈속임 아래, 가마터의 겉모습은 평범한 옹기 공장으로 완벽하게 위장되었다. 감시하러 온 사대부들의 세작들은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연기와 조잡한 그릇 무더기만을 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안궁 배후의 지하 야철소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돌려라! 수력 기어를 더 세게 연동해라!”

박기현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물소리가 지하를 가득 채웠다. 과거 박기현이 제철 중 송풍의 위력 부족으로 흘렸던 아이디어, 즉 가죽 풀무 대신 큰 개울의 물살을 연동하는 기초적인 구상이 이강의 정밀 설계도를 통해 마침내 거대한 실체로 구현된 것이다.

이강은 개울의 강한 수압을 이용해 회전하는 대형 수차를 설치하고, 이를 목제와 청동 기어로 연결하여 대용량 수력 야철 송풍기를 완성해 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엄청난 양의 공기가 밤새도록 용광로 내부로 뿜어져 들어갔다.

“온도가 도달합니다! 저하가 주신 유황 도료 덕분에 가마 내벽이 쇳물의 열기를 완벽하게 가두고 있습니다!”

박기현이 흥분해 소리쳤다. 용광로 내부의 온도는 이미 임계점을 돌파해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백련강의 불순물이 완벽하게 타들어가며, 순도 높은 강철 액체가 도가니 속에서 요동쳤다.

어두컴컴한 가변 회랑 끝, 이강은 팔짱을 낀 채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정밀 설계의 안’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은색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동기화 완료: 수력 야철 송풍 압력 100%] [가마 내벽 열 보존율: 98%] [주강포 주조 오차율: 0%]

이강의 시야 속에서 미완성 상태였던 백련강 대포의 장약 강선 내벽 투사 도면이 미완의 오차율 0%를 기록하며 완벽한 은색 빛의 입자로 조립되어 나갔다. 어둠을 가르고 찬란하게 빛나는 물리적 도면의 정밀한 선들이 이강의 동공에 깊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대명 천자의 오만한 목덜미를 후려칠, 조선 역사상 최초의 수력 주강식 대포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사냥개를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이강의 입가에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내일 아침, 조선의 대포가 천하를 향해 포효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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