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푸른 달빛이 가마터의 매캐한 매연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야철대 위에 놓인 강철 막대는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대지를 흔들던 철퇴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추자, 사방에는 오직 장인들의 거친 숨소리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만이 남았다.

쇳물이 식어 가며 내뿜는 은은한 광채가 푸르스름한 수은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표면은 굴곡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수백 번의 메질을 견뎌 낸 철의 표면에는 미세한 물결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탄소 함량 0.62%. 마르텐사이트 조성율 94.8%. 미시 균열 제로.]

이강의 시야에 떠오른 정밀 설계의 안(眼)이 완벽한 청색 신호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대의 최첨단 방산 연구소에서 특수 합금강을 정밀 측정했을 때에나 볼 수 있던 극상의 수치였다.

"저, 저하……."

박기현이 떨리는 손으로 강철의 단면을 쓸어내렸다. 거칠고 굳은살 박인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우리가 아침부터 밤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두들긴 그 무쇠가 맞사옵니까?"

장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강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얼굴은 그을음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가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불꽃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강은 차가운 강철 막대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목을 타고 뇌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강철의 차가운 물성이 온몸의 감각을 깨웠다.

"백련(百鍊)이다."

이강의 목소리가 고요한 가마터에 나직하게 울렸다.

"한 번 접을 때마다 불순물이 날아갔고, 두 번 접을 때마다 기포가 깨졌다. 백 번을 접고 만 번을 두들겨 마침내 탄소의 성질을 완전히 다스린 진짜 강철이다. 조선의 흙과 철로, 오직 너희들의 손으로 빚어낸 백련강이란 말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박기현의 무릎이 털썩 흙바닥에 꺾였다. 뒤이어 내화 가죽 장갑을 낀 장인 수십 명이 차례로 엎드렸다.

"저하! 천한 소인들이 감히 나라의 대업에 한 손을 보태었나이다!"

"이 은혜, 뼈에 새기겠나이다!"

바닥에 머리를 찧는 장인들의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조선에서 야철 장인이란 천대받는 역졸이자, 언제든 가마가 터지면 목숨을 잃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에게 세제 이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불가능해 보이던 도면을 현실로 구현해 내고, 그들의 땀방울 하나하나에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준 유일한 군주였다.

이강은 부복한 장인들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가마의 내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1550도라는 미친 듯한 고온을 견뎌 내고 멀쩡히 서 있는 가마의 자태. 이것은 단순히 점토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유황 내의 화성 결정. 그것이 없었다면 내화 단열막은 진작 녹아내렸겠지.'

이강은 품속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조그만 목곽을 떠올렸다. 1화에서 이 사저의 옹기 가마터를 처음 수색할 당시, 널브러진 광물 무덤 속에서 발견했던 기묘한 결정체였다. 정밀 설계의 안으로 투시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황이 아니라 화산 지대의 고온 고압을 견디며 형성된 극미세 규산염계 화성 결정이었다.

황산염과 결합하여 열의 전도를 극도로 차단하는 천연의 단열 촉진제.

이강은 가마를 축조할 때 이 결정을 곱게 갈아 점토와 석회 배합 비율에 정확히 0.3%의 농도로 섞어 넣었다. 그 결과, 가마 내부의 열기가 외부로 발산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아내어 조선의 조악한 가마로도 1500도가 넘는 선철 용융 온도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저히 계산된 화학적 인과관계의 승리였다.

"박기현, 일어나라."

이강의 명령에 박기현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야철대 위의 백련강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칼날의 진가를 시험해 보아야겠지."

이강의 손짓에 호위무사가 마당 한구석으로 궤짝 하나를 들고 왔다. 궤짝이 열리자, 붉은 비단에 싸인 화려한 도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자루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고, 검날은 상국의 정교한 연마 기술로 다듬어져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그것은 예조판서 김덕형이 명나라 연경의 황실 장인에게서 수백 냥을 주고 수입해 온 수입 명검이다. 사림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대국의 야철 기술의 정수지."

이강이 백련강으로 임시 제련한 무딘 칼날을 박기현에게 건넸다.

"쳐라."

"저, 저하! 이 천한 손으로 어찌 감히 대국의 명검을……."

"치라면 쳐라. 철의 가치는 명성이 아니라 물성이 증명하는 법이다."

이강의 단호한 음성에 박기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백련강 칼날을 두 손으로 굳게 쥐었다. 거친 숨을 고른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달빛 아래, 두 개의 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쉬이익- 깡-!*

짧고 예리한 금속음이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순간, 사방이 정적에 휩싸였다. 장인들의 호흡이 멎었고, 호위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나라 황실 장인이 만들었다는 수입 명검의 날 부분이 처참하게 찌그러지더니, 이내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세 조각으로 부러져 마당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챙강.*

부러진 검날이 흙바닥을 구르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반면, 박기현이 쥔 조선의 백련강 칼날은 이 하나 빠진 곳 없이 푸르스름한 광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호위무사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명나라의 최고급 강철 도검이 조선의 무명 장인이 갓 두들겨 만든 쇳덩이에 이토록 무력하게 박살 날 줄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이것이 수치(數値)의 힘이다."

이강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명나라의 제철 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들은 경험과 직관에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철의 분자 구조와 탄소의 비율을 통제했다. 감정적인 맹신과 사대주의가 과학적인 계산을 이길 수 없는 이유다."

가마터의 장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전율했다. 대국의 권위라는 거대한 장벽이, 오직 강철의 단단함 하나에 무참히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통쾌한 증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강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의 가차 없는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공은 했으나, 이 방식으로는 안 된다.'

이강은 머릿속의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백련강 한 자루를 뽑아내기 위해 장인 서른 명이 교대로 들러붙어 가죽 풀무를 밟아댔다. 그들이 흘린 땀과 소모된 인력, 그리고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주일에 고작 검 한 자루, 혹은 대포의 포신 부품 하나를 겨우 만드는 수준으로는 자주 국방은커녕 영지 방어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가죽 풀무와 망치질에는 한계가 있다. 에너지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외적 동력이 필수적이었다.

"저하……."

박기현이 부러진 명검의 파편을 보며 감탄하다가, 이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이 백련강이 천하제일의 쇠인 것은 분명하오나, 이 천한 놈들의 뼈마디가 남아나지 않겠사옵니다. 가마의 온도를 유지하려 풀무를 밟던 녀석 둘은 벌써 무릎 관절이 부어올라 걷지도 못하나이다. 가마의 세기를 더 키우고 메질을 편하게 하려면……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옵니다."

박기현이 가마터 너머, 밤새 세차게 흐르는 인근 계곡 쪽을 바라보았다.

"저 거센 계곡의 물살을 어찌 이용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물의 힘으로 거대한 나무 바퀴(기륜)를 돌리고, 그 회전하는 힘으로 가죽 풀무를 누르고 거대한 철퇴를 내리치게 만든다면…… 장인들이 제 풀에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이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수력 야철(水力 冶鐵).'

현대 방산 연구원 시절, 역사 속 제철 발전사를 공부하며 보았던 동력의 전환점이었다. 놀랍게도 이 천민 장인은 수백 번의 실패 속에서 스스로 동력의 한계를 깨닫고 수력을 이용한 야철 기제라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이강의 시야에 즉각 새로운 3D 설계 도면이 전개되었다.

[수력식 회전축 및 캠 기어 장치 설계도.] [오차 오차율 0.05% 미만의 정밀 목재 베어링 접합부 투시.]

계곡의 낙차를 이용해 수차를 돌리고, 그 회전 운동을 왕복 운동으로 전환하여 대형 풀무와 수력 단조 망치를 구동하는 장치. 이것만 완성된다면 생산성은 최소 수십 배에서 수백 배로 폭등할 것이다.

이강은 박기현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박기현."

"예, 저하."

"네 녀석의 그 머리가 조선의 수만 군사를 살릴 것이다."

이강의 목소리에 평소의 차가움 대신 묵직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강은 소맷자락 속에 든 종이 한 장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국왕 이도에게서 사전에 받아 둔, 박기현의 이름을 공란으로 비워둔 면천 첩지(免賤 帖紙)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 수력 야철 장치까지 완벽히 구동하여 대포를 주조해 내는 순간, 너는 조선 역사상 가장 고귀한 공학 장인으로서 천민의 굴레를 벗게 될 것이다.'

이강은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하며 첩지를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마터의 굳게 닫힌 목조 정문 너머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밤이 깊은 이 시각에 세제의 비밀 사저를 향해 달려올 마차나 마필은 흔치 않았다.

"저하! 저하!"

동궁전의 내관이자 이강의 측근인 상선이 땀범벅이 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의 의관은 사정없이 흐트러져 있었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냐. 상선이 체통을 잃고 이리 소란을 피우다니."

이강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상선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기었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큰, 큰일이옵니다, 저하! 사림들이…… 예조판서 김덕형 대감이 움직였습니다!"

이강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김덕형이? 그 늙은이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그게 아니옵니다! 지금 궐 앞뜰이 아수라장이옵니다! 김덕형 대감이 이끄는 사림의 영수들과 사헌부 대간 일백여 명이…… 모두 백색 소복을 입고 대궐 뜰에 멍석을 깔았사옵니다!"

상선의 전언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내용이었다.

"그들이 연명으로 서명한 상소문을 들고, '세제 저하가 사사로이 무뢰배와 천민들을 모아 사저에서 군장을 단련하고 병기를 주조하니, 이는 조정을 겁박하고 사직을 찬탈하려는 대역부도한 야심'이라며 단식 상소에 돌입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도 지금 편전에서 사림들의 기세에 밀려 대간들의 윤허 요구를 막지 못하고 계시옵니다!"

대궐 뜰을 가득 메운 일백 명의 대간들과 백색 소복. 그리고 단식 투쟁.

성리학적 명분론을 무기로 왕실을 압박하는 사림 특유의 극단적인 정치적 공세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이강의 눈빛이 푸른 백련강의 불꽃처럼 차갑고도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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