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형이 대신들의 정전 조회 자리에서 한 손에 옹기 조각을 높이 든 채, 영안세제가 백성들의 옹기 노역을 도용하여 재를 낭비하니 마땅히 위계를 물어야 한다고 사령을 올리려 턱을 치켜든 찰나였다.
정전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정적을 가르는 발걸음 소리가 박석 위를 울렸다.
백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를 향했다. 붉은 융복 대신 단정한 대례복을 입은 영안세제 이강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서리를 밟으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리어 살얼음판 같은 조정을 구경하듯, 냉정한 눈빛만이 빛날 뿐이었다.
"예조판서의 충심이 참으로 눈물겹구려."
이강의 목소리가 낮고 명징하게 정전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김덕형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치켜들었던 옹기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강을 쏘아보았다. 조정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옥좌에 앉은 국왕 이도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우의 당당한 풍모를 주시했다.
"세제 저하, 이 자리는 전하를 뫼시고 국정을 논하는 신성한 조회이옵니다. 사사로이 천민들을 모아 요업을 벌이고 왕실의 재정을 탕진하신 분께서 어찌 그리 당당히 나중(羅衆)을 가르고 나오시는 것입니까!"
김덕형의 일갈에 사림 세력의 대신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동조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세제의 법도 없는 행동을 엄히 다스리셔야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서옵니다!"
"천한 옹기 가마에서 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이 어찌 대조선의 세제가 할 짓이란 말입니까!"
정전 안이 순식간에 이강을 규탄하는 성토장으로 변해갔다. 사대부들의 목소리에는 명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쥔 자들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강은 그들의 비난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정밀 설계의 안'이 보여주는 차가운 수치와 법전의 텍스트들이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이강은 천천히 국왕 이도를 향해 읍을 했다.
"전하, 신 세제 이강, 예조판서가 제기한 소위 '부역 도용'과 '왕실 재정 탕진'에 대해 국법에 의거하여 아뢰고자 하나이다."
이강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조정을 압도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제십이조, 공역(工役) 조항을 읊어 올리겠나이다. '국가에 중대한 재해나 구휼의 필요가 있을 시, 왕실의 직속 사저 및 관청은 소속 장인과 공노비를 동원하여 구휼에 필요한 기물을 제작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일반적인 공역 의무는 한시적으로 면제된다.' 또한, 동전(同典) 호전(戶典) 제칠조에는 '기근이나 동해(凍害)로 인한 백성의 구제는 그 어떤 사적인 부역보다 우선하며, 이를 위해 사용된 왕실 재원은 호조의 사후 승인을 통해 정산한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나이다."
막힘없는 낭독이었다. 이강의 목소리는 흡사 법전을 그대로 베껴 읽는 서리처럼 기계적이고 정교했다.
조정의 신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법전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듯한 세제의 모습에 김덕형조차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경국대전의 세부 조항까지 완벽히 꿰뚫고 있는 이강의 지식은, 평생 공맹의 말씀만을 외우던 사대부들에게 기괴한 공포감마저 안겨주었다.
"예조판서는 이 법조문을 모른다 하지 못할 것이오. 사헌부와 예조의 수장으로서 국법을 수호해야 할 자가, 어찌 백성을 구휼하려는 왕실의 법적 권한을 '요사스러운 기예'라 칭하며 깎아내리는가?"
이강의 서늘한 시선이 김덕형의 미간을 꿰뚫었다.
"구휼이라니요? 한낱 조잡한 옹기 가마에서 백성을 구휼할 기물을 만든다는 말이옵니까? 궤변이옵니다!"
김덕형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옹기 조각이 잘게 떨렸다.
이강은 냉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붉은빛이 도는 단단한 전돌(塼乭)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장인 박기현과 수십 번의 흙 배합 끝에 완성해 낸, 속이 특수하게 설계된 구운 벽돌이었다.
"전하, 그리고 조정의 대소신료들이여. 올겨울의 혹한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도성 안팎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얼어 죽는 백성들의 시신이 실려 나가고 있나이다. 예조판서가 따뜻한 사랑방에서 상소문을 다듬을 때, 성저십리의 빈민들은 땔감이 없어 냉골에서 사지가 뒤틀린 채 죽어가고 있소."
이강의 목소리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렸다.
"내가 사저의 가마터를 장악한 것은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 아니오. 바로 이 '온돌 전돌'을 대량으로 구워내기 위함이었소. 이 전돌은 내부의 미세한 공공(空孔) 구조 덕분에 열을 머금는 능력이 일반 구들장보다 다섯 배는 뛰어나오. 적은 땔감으로도 밤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백성들의 구명줄이란 말이오!"
그가 들고 있는 전돌은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었다. 이강의 지식과 조선의 토법 기술이 결합하여 탄생한, 빈민 구휼용 고효율 열 보존체였다.
이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국왕으로서 겨울마다 백성들이 동사하는 소식에 밤잠을 설치던 그였다. 아우가 사사로이 화포나 무기를 만드는 줄로만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실상은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구하기 위해 가마터에서 흙먼지를 마시고 있었다니.
"아우가…… 진정 백성들을 위해 그 고초를 겪었단 말인가?"
이도의 목소리에 깊은 안도와 물밀듯 밀려오는 감동이 묻어났다.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붉어졌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미 사저 인근의 빈민 이백여 가구에 이 전돌을 무상으로 배포하여 효용을 입증하였나이다. 신 세제 이강, 단 한 푼의 국가 재정도 사사로이 쓰지 않았으며, 오직 영지 내의 유휴 인력과 폐기된 옹기 가마를 활용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을 뿐이옵니다."
이강의 말은 거침없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대신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세제를 '왕실 재정을 탕진하고 법도를 어지럽힌 범죄자'로 몰아가려 했던 김덕형의 탄핵은, 이제 역으로 '추위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왕실의 선정을 가로막는 잔인무도한 패악질'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예조판서."
이강이 김덕형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조정의 권위가 실려 있었다.
"그대의 눈에는 저잣거리의 얼어 죽어가는 백성들은 보이지 않고, 오직 세제의 흠집을 잡기 위한 옹기 조각만 보인단 말인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사대부의 명분만 챙기려는 자가 어찌 예(禮)를 논하고 성리학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이, 이것은……!"
김덕형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지하던 사림 대신들은 일제히 시선을 피하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직감했다.
"전하! 예조판서 김덕형은 백성 구휼의 대업을 방해하고, 허위 사실로 왕실을 모독하였으니 마땅히 그 직을 거두고 엄히 치죄하셔야 하옵니다!"
이강을 지지하는 일부 실리파 대신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정전 안은 순식간에 김덕형을 탄핵하라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김덕형은 이강이 쳐놓은 완벽한 도덕적, 법적 덫에 걸려 제 발로 자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강의 반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에서 또 다른 상소문 한 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전하. 신이 가마터에서 구휼 기물을 제작하는 동안, 예조판서 김덕형이 뒤에서 벌인 기이한 행적을 고발하고자 하나이다."
김덕형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김덕형은 조선의 사림 세력이 조정의 제기(祭器) 및 야철(冶鐵) 독점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이를 명나라로 밀수출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료들을 은밀히 모집해 왔나이다. 여기 김덕형이 수집한 경국대전 외의 예서 사료들과, 가마터 수색을 빌미로 영지 내의 구리 도가니 분량과 야철 기술을 명조의 상인들에게 은밀히 넘기려 한 물증이 있나이다."
이강이 상소문을 이도에게 올리자, 도승지가 이를 받아 옥좌로 날랐다.
조정은 그야말로 깊은 심연 속에 빠진 듯 고요해졌다. 사림의 영수이자 대명 사대주의의 표상이었던 김덕형이, 실상은 조선의 기술과 자원을 명나라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의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정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도가 상소문을 훑어내려 갈수록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김덕형…… 네 이놈! 네가 정녕 나라의 법통을 핑계로 상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선의 철과 기술을 넘기려 하였단 말이냐!"
"전, 전하! 모함이옵니다! 저 요사스러운 세제가 소신을 매장하기 위해 위조한 장계이옵니다!"
김덕형이 바닥에 엎드러지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이강이 제시한 물증들은 너무도 정교하게 엮여 있어, 법률적 논리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당장 예조판서 김덕형을 사헌부에서 국문하라! 또한 사저의 가마터에 대한 모든 권한은 세제에게 전결로 위임하여 백성 구휼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이도의 사자후가 정전에 울려 퍼졌다.
"전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강은 차분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김덕형은 금군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 나갔다. 그가 떨어뜨린 조잡한 옹기 조각이 차가운 박석 위를 구르다 툭 하고 멈춰 섰다. 세제를 몰아내려던 사대파의 정교한 덫은, 도리어 그들의 숨통을 죄는 가차 없는 단두대가 되어 돌아왔다.
조회를 마치고 정전을 빠져나오는 이강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사대파들의 위선적인 기득권을 법전의 태두 안에서 완벽히 짓밟아 버렸다. 이제 옹기 가마터의 안전은 확보되었다. 아니, 단순한 가마터가 아니라 조선의 화력을 책임질 비밀 군기대조소의 기초가 합법적으로 다져진 것이다.
'이제 가마를 보강하고, 고순도 염초 정제를 완성한다.'
이강은 머릿속으로 다음 단계의 공정을 설계했다.
그는 지난번 발견하여 보관해 두었던 특수한 유황 결정을 떠올렸다. 가마 내벽의 온도 손실을 막기 위해, 유황과 황토를 특정 비율로 배합한 특수 도료를 가마 벽면에 바르는 공정이 진행 중일 터였다. 이 촉진제가 성공적으로 작용한다면, 가마의 온도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백련강 제련과 고순도 화약 제조를 위한 열적 기반이 완성된다.
이강은 걸음을 재촉하여 사저 남쪽의 비밀 가마터로 향했다.
말을 타고 도성을 나선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가마터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단단히 쳐진 삼중의 장막 너머로 불길의 붉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가마터에 가까워질수록 이강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기가 이상했다.
보통의 가마에서 나는 흙 타는 냄새나 장작의 향이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하고 역한 황(黃)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진동하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가리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하! 오시면 안 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장막을 헤치고 들어서는 이강을 발견한 장인 박기현이 얼굴이 온통 검댕이로 뒤덮인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왔다. 그의 눈에는 극도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강이 차갑게 물으며 가마터를 주시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도공용 가마, 다단계 초석 가루가 가득 차 있어야 할 정제 가마가 이상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가마의 이음새마다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마 내벽에 칠한 유황 배합 도료의 반응 속도가 이강의 정밀 설계 계산 범위를 초과하여 폭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직. 쿠구구구.*
가마의 흙벽에 쩍쩍 갈라지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푸르스름한 불꽃이 뱀의 혀처럼 튀어나왔다.
"가마 안의 압력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초석 가루를 정제하던 도중에 내벽 온도가 너무 급격히 상승하여…… 이대로 두면 가마 전체가 폭발할 것입니다!"
박기현이 가마 쪽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노역자들과 장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정밀 설계의 안'이 이강의 시야에 붉은 경고등을 켜며 가마의 미시 구조와 내부 압력 수치를 투사했다.
[위험: 내부 온도 1200도 돌파. 압력 임계치 초과율 140%. 30초 후 대폭발 발생 예정.]
공들여 쌓아 올린 가마터와 고순도 염초 정제 설비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였다.
이강의 눈동자에 붉게 타오르는 폭발 직전의 불꽃이 비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도망치는 장인들을 향해 서늘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