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가슴춤에 서신을 찔러 넣은 세작의 발끝이 마른 낙엽을 짓밟았다. 그 미세한 마찰음이 숲의 정적을 깨뜨리는 순간, 사내의 등 뒤로 서늘한 쇠 냄새가 밀려들었다.
도망칠 틈은 없었다.
"움직이지 마라."
낮고도 단호한 음성과 함께, 세작의 목덜미에 차가운 환도의 날붙이가 와닿았다. 영안세제 사저를 호위하는 위사들이 그림자처럼 수풀 속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사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품 안의 한지를 움켜쥔 손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사내를 제압한 위사들이 그를 거칠게 끌고 가 가마터 뒤편의 어두운 그늘 아래 무릎 꿇렸다.
흙바닥에 처박힌 세작의 시야 끝에, 단정한 가죽신 한 켤레가 멈추어 섰다.
이강이었다.
병약하여 숨만 겨우 붙어 있다던 세제의 눈빛은 밤안개보다 차갑고 맑았다. 이강은 무릎을 꿇은 채 부르르 떠는 세작을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품에서 강제로 빼앗아 낸 서신이 이강의 손끝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예조판서 김덕형의 가솔이라."
이강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당혹감도 없었다. 그저 잘 만들어진 기계를 관찰하듯 건조하고 무감각한 시선만이 사내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소, 소인은 그저 옹기를 사러 왔다가 길을 잃은 자이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하!"
사내가 이마를 흙바닥에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가짜 신분을 대며 빠져나가려는 수작이었다. 배후를 캐물으며 매질을 가할 것이라 예상한 사내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강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문 도구의 이름이 아니었다.
"대명률(大明律) 적신조(賊臣條) 제오 항."
차가운 음성이 솔바람 사이로 흐트러졌다. 조용히 읊조리는 그 구절에 세작의 몸짓이 굳어졌다.
"황실의 사저를 무단으로 침입하여 동태를 살피고, 이를 사사로이 조정의 외신에게 밀고하는 자는 간세(奸細)로 다스린다. 그 죄는 능지처참에 처하며, 가산은 적몰하고 처자는 변방의 노비로 삼는다 하였지."
"저, 저하……!"
"내가 너를 사헌부로 보내 김덕형의 이름을 불게 할 것 같으냐?"
이강이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틀렸다. 나는 너를 의금부나 사헌부에 넘기지 않는다. 대명률의 간세법을 적용하여, 명나라 칙사가 머무는 태평관의 정문 앞에 네 목을 걸어둘 것이다. 조선의 법이 아닌, 너희가 그토록 숭상하는 어버이 나라 대명(大明)의 법률 그대로 말이다."
사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조선 내부의 정쟁으로 다루어진다면 가문이나 배후의 힘으로 꼬리를 자르고 살아날 구멍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대명률의 간세법을 적용해 명나라의 권위를 침해한 죄목으로 묶여 태평관 앞에 던져진다면, 김덕형은 자신과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하기 위해 사내의 일가친척을 가장 먼저 소리소문없이 몰살할 터였다.
사림의 영수가 지닌 위선적인 사대주의를 역이용하는 가차 없는 그물망이었다.
"내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사내가 절박하게 물었다. 이강은 손에 든 서신을 가마터의 벌건 불길 속으로 툭 던져 넣었다. 종이가 순식간에 불꽃을 일으키며 재로 변해갔다.
"알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종이 조각에 적힌 글귀가 김덕형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될 테니까. 위사들은 들어라."
이강이 뒤를 돌아서며 담담히 명령했다.
"이 자의 결박을 풀고 사저 밖으로 던져라. 그리고 전하라. 세제의 사저에는 옹기 굽는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노라고. 만일 한 자라도 다르게 고한다면, 네 가솔들의 이름이 적힌 대명률의 판결문이 내일 아침 김덕형의 대문 앞에 붙을 것이다."
살려준다는 안도감보다, 언제고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올가미를 쥐여주었다는 공포가 사내의 전신을 지배했다. 사내는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린 뒤, 위사들의 손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이강은 불타오르는 가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가상 시뮬레이션의 푸른 반투명 도면이 떠올랐다. '정밀 설계의 안(眼)'이었다. 가마 내벽의 온도 변화가 실시간으로 붉고 푸른 열분포 선으로 나타났으나, 이내 열손실을 뜻하는 경고등이 깜빡였다.
[경고: 가마 내벽 열 보존율 42% 미만. 불순물 유입율 18% 초과.] [현재 인프라 수준으로는 백련강용 극저 탄소강 제련 불가.]
현대의 무기 설계도를 머릿속에 지니고 있어도, 조선의 조악한 황토 가마와 숲에서 베어 온 소나무 숯으로는 철을 녹일 열량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다. 이강의 미간이 좁아졌다. 물리적 법칙은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한계를 깨뜨리려면 철화장의 숙련된 손기술과 정밀한 토법 개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요!"
가마터 한편에서 박기현의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이강이 나무판자에 백분(白粉)으로 그려 놓은 기하학적인 수치와 도표들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쇠를 달구는 일은 오직 불의 빛깔과 쉭쉭거리는 쇳소리로만 가늠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무슨 척도니, 도(度)니 하는 해괴한 숫자를 들이밀며 불을 다스리라 하십니까! 이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철화 장인들의 법통을 모독하는 처사이옵니다!"
박기현이 들고 있던 진흙 도가니를 바닥으로 팽개쳤다.
쨍그랑!
도자기가 깨지는 날카로운 파편음이 가마터의 정적을 깼다. 주위의 장인들이 겁에 질려 바짝 엎드렸다. 왕실의 종친이자 세제인 이강의 앞에서 도가니를 던진 것은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대역죄였다.
하지만 이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파편이 그의 비단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음에도, 차가운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법통이라 했느냐."
이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박기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예! 쇳물을 다스리는 것은 장인의 혼과 감각이옵니다! 숫자로 쇠를 녹인다는 것은 천하의 이치에 어긋나는 짓거리입니다요!"
박기현이 씩씩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강은 대답 대신 박기현의 거친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고귀한 왕세제의 손이 천민의 굳은살 박인 손을 움켜쥐자, 박기현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이게 무슨……."
"이 손에 새겨진 흉터들을 보아라."
이강이 박기현의 손등에 길게 뻗은 화상 자국들을 가리켰다.
"불길이 치솟는 온도를 짐작하지 못해 살이 타들어 간 흔적이다. 쇳물의 온도가 너무 높아 도가니가 터졌을 때 생긴 상처지. 네 감각이라는 것의 대가가 이것이더냐?"
"저, 저하……."
"네가 말하는 장인의 혼이란, 결국 수많은 자들의 피와 살을 태워 가며 얻은 요행에 불과하다. 쇳물이 끓는 정확한 수치를 알고, 가마의 구멍을 언제 여닫아야 하는지 규격화한다면,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이강의 목소리에 서린 것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다. 철저한 수치와 효율성,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려는 공학자로서의 차가운 신념이었다.
"이강아, 아니 박기현."
이강이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나는 민주(民主)니, 만민평등이니 하는 허울 좋은 사상으로 너를 위로할 생각이 없다. 이 나라는 군신이 엄연하고 신분의 귀천이 뼈대인 조선이다. 네가 아무리 도망쳐 다녀도 네 자식들은 다시 천민이 될 것이요, 군기시의 매질 아래서 평생 쇠나 만지다 죽을 것이다."
박기현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칼날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의 도리 또한 군신 간의 신의를 으뜸으로 친다. 네가 나를 보좌하여 왕실의 백련강 제국을 세우는 데 공헌한다면, 나는 세제의 권한으로 네 자식들의 천적(賤籍)을 영구히 도말(塗抹)해 줄 것이다. 사대부의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면천의 첩지를 네 손에 쥐여주마."
이강의 눈빛이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매섭게 빛났다.
"조선의 법과 질서 안에서, 가장 합법적이고도 완벽한 신분 상승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선택하거라. 네 허황된 장인의 아집을 지키다 천민으로 썩어갈 것이냐, 아니면 내 손을 잡고 네 가문의 운명을 바꿀 것이냐."
포용하되 굴복시키고, 신분의 사슬을 다루는 제왕의 손길에 박기현은 넋을 잃었다.
그는 왕세제의 차가운 공리주의 너머에 있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인 구원의 밧줄을 보았다. 그것은 성리학적 조선의 틀을 완벽히 이해하고 지배하는 자만이 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약조였다.
박기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거친 손이 떨리며 이강의 도포 자락을 붙잡았다.
"……저하의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소인의 목숨과 기술을 모두 저하께 바치리다."
"좋다. 일어서라."
이강이 박기현을 일으켜 세우며, 가마 안쪽의 깨진 유황 벽을 가리켰다.
'정밀 설계의 안'이 유황 결정의 미시 구조를 파란 선으로 투사해 보였다. 이강은 가마터 수색 도중 발견하여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특수한 유황 결정을 떠올렸다.
"가마 내벽의 온도 손실을 보강해야 한다. 내가 따로 모아둔 유황 결정과 황토를 특정 비율로 배합한 도료를 가마 벽면에 바를 것이다. 이것이 열을 안으로 밀어 넣는 촉진제가 될 터이니, 당장 가마를 식히고 도포할 준비를 하라."
"예, 저하! 즉시 그리하겠나이다!"
박기현의 눈빛에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장인들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가마터의 열기가 새로운 방향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조선의 심장부인 경복궁 정전(正殿).
이른 아침의 서리가 조정의 박석 위에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백관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도열한 가운데, 국왕 이도가 옥좌에 앉아 군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전의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그 엄숙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예조판서 김덕형이었다.
그는 평소의 인자한 학자의 미소를 지우고, 엄숙하고도 단호한 표정으로 대열의 앞으로 걸어 나왔. 그의 손에는 붉은 비단에 싸인 둥근 물체가 들려 있었다.
"전하! 신 예조판서 김덕형, 목숨을 걸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상소하나이다!"
김덕형이 홀을 쥐고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예조판서?"
이도의 목소리에 피로감이 묻어났다.
김덕형은 품 안에서 비단을 걷어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조잡한 옹기 조각 하나를 높이 쳐들었다. 누런 흙빛의 옹기 파편에는 검은 그을음과 함께 기이한 철가루가 묻어 있었다.
"영안세제 저하께서 사저 남쪽의 옹기 가마터를 장악하시고, 사사로이 천민들을 모아 요사스러운 기예를 부리고 있사옵니다! 백성들의 신성한 부역인 옹기 노역을 도용하여 왕실의 재원을 낭비하고 있으며, 이는 성리학적 예법을 어지럽히고 사대부의 기강을 훼손하는 처사이옵니다!"
김덕형의 목소리가 정전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세제가 한낱 옹기 가마에서 재를 낭비하며 왕실의 위계를 떨어뜨리고 있으니, 마땅히 그 위계를 묻고 가마터를 철거하셔야 하옵니다!"
그가 턱을 치켜들며 승리의 확신이 가득 찬 눈빛으로 이도를 올려다보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