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독한 쑥 연기와 누린내 나는 약탕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두터운 비단 이불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전신을 짓눌렀다. 이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나뭇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거친 서까래와 황토를 발라 마감한 높은 천장이었다. 현대 방위산업체의 최연소 수석 연구원으로서 밤새 주력 자주포의 궤도 오차를 수정하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가락은 지나치게 가늘고 뼈마디가 도드라져 있었다.

평생을 전장과 연구실의 소음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이 기묘한 고요는 낯설다 못해 이질적이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머릿속에서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조선 초엽, 왕실의 서자이자 병약하기 짝이 없는 영안세제(黎安世弟) 이강. 사대파 신료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소년의 기억이 그의 뇌리에 단단히 들어찼다.

그 순간, 그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가상의 선들이 번쩍이며 일어났다.

스르릉.

마치 현대의 3D 캐드(CAD) 화면을 허공에 띄워놓은 것처럼, 정교한 기하학적 격자무늬가 서가와 문창살 위에 덧씌워졌다. 격자무늬의 중심부에는 격발 장치와 약실의 단면도가 분자 구조식과 함께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정밀 설계의 안(眼) 활성화] [대상: 조선 건국 초기 수준의 물리 공간] [경고: 가용한 제철 인프라 극도로 낙후. 고탄소강 정련 불가능. 황과 초석의 불순물 함유량 60% 초과. 현대식 화기 도면 적용 시 가마 폭발 및 주조물 파열 확률 99.8%]

차가운 반투명창의 경고가 뇌리를 때렸다. 이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155mm 규격의 곡사포와 현대식 소총의 도면이 완벽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조악한 가마와 정련 기술로는 쇠붙이 하나 제대로 뽑아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결국 기초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는 뜻인가."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도면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어도, 정직하게 흙을 다지고 온도를 올려 불순물을 걸러내는 ‘토법(土法)’의 단계적 시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미래식 무기도 한낱 쇳조각 폭탄에 불과할 터였다.

그때, 방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온 사내의 체구는 곰처럼 우람했다. 어깨에 걸친 붉은 융복과 가슴에 새겨진 황금빛 흉장이 그의 신분을 증명하고 있었다.

현 조선의 국왕이자 이강의 이복형, 이도였다.

"강아! 정신이 드느냐!"

이도의 목소리는 우렁찼으나 그 끝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는 침상 머리맡으로 단숨에 다가와 이강의 가녀린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뼈마디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사흘 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어 내 가슴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 의관! 의관은 어디 있느냐! 당장 세제에게 탕약을 대령하라!"

"전하, 소신 괜찮사옵니다."

이강은 이도의 손길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병석에서 막 일어난 이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투명했다. 마침 내시가 들고 온 놋그릇에는 검고 걸쭉한 약탕이 출렁이고 있었다.

이강은 그 약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차 없이 손끝으로 밀어냈다.

"탕약 따위는 몸의 열을 돋우기만 할 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보다 소신, 전하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이도의 눈썹이 꿈틀했다. 불같은 성정의 국왕은 동생의 뜻밖의 단호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헛기침을 삼키며 물었다.

"청이라니? 네가 내게 사사로이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말해 보거라. 내 조정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모두 들어줄 터이니."

조정의 눈치. 그 짧은 단어에 이강의 입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지금 사헌부와 예조를 장악한 사림의 영수 김덕형은 세제인 이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왕실의 종친이 사사로이 세력을 모으거나 기묘한 행동을 보이기만 해도 '대명 천자에 대한 불충'과 '성리학적 도덕에 어긋나는 사도(邪道)'라는 딱지를 붙여 탄핵할 준비를 마친 자들이었다.

그들의 칼날을 피하면서도 독자적인 기술 개발의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이강은 가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신의 사저 남쪽 경계에 접한 옹기 가마터와 그 배후의 야산을 소신의 사저 구역으로 편입해 주시옵소서."

"옹기 가마터라니?"

이도의 얼굴에 짙은 황당함이 스쳤다.

"그곳은 도성의 천민들과 옹기장이들이 모여 매일 매캐한 흙먼지와 연기를 뿜어내는 비루한 땅이 아니더냐. 세제의 처소 바로 옆에 그런 누추한 곳을 두겠다는 말이냐? 정 사저를 넓히고 싶다면 동쪽의 비옥한 전답이나 수려한 정원을 내어주마."

"아니옵니다. 화려한 정원은 사림들의 눈에 사치로 보일 뿐이며, 비옥한 전답은 백성들의 원망을 살 뿐입니다."

이강은 이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도성 귀퉁이의 버려진 가마터라면 예조의 까다로운 선비들도 '세제가 병약하여 흙장난이나 하며 소일을 하려나 보다' 하고 관심을 끊을 것입니다. 이보다 신료들의 감시를 피하기 좋은 방패막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도는 멈칫했다. 동생의 차가운 수치적 계산과 정세 판단에 머리가 서늘해진 탓이었다. 세제가 스스로를 낮추어 천한 가마터로 들어가겠다는데, 사대 사림들도 이를 두고 대역죄를 획책한다고 시비를 걸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세제의 무력함을 비웃으며 방심할 터였다.

"너를 지켜주지 못하는 이 형의 무능함이 원망스럽구나."

이도가 주먹을 꽉 쥐며 낮게 신음했다.

"좋다. 그 가마터와 주변 야산을 오늘부로 영안궁의 사저 부지로 하사하마. 병조와 사헌부에는 내가 직접 교지를 내릴 터이니, 누구도 그 땅의 소유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강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감시의 사각지대이자, 미래의 군기대조소(軍器大造所)가 될 비밀 기지를 드디어 합법적인 조선의 국법 테두리 안에서 확보한 순간이었다.

* * *

경복궁 외곽, 영안궁 사저의 남쪽 경계선은 허물어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옹기 가마터와 맞닿아 있었다.

매캐한 석탄재 냄새와 축축한 진흙 냄새가 뒤섞인 가마터의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이강은 겉옷을 가볍게 걸친 채 가마터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는 이도가 붙여준 호위 무사 몇 명이 서 있었으나, 이강은 그들을 멀찍이 물러서게 했다.

"에이, 빌어먹을! 이놈의 가마는 왜 불을 때기만 하면 안쪽부터 주저앉는단 말이냐!"

누더기 같은 삼베옷을 걸친 사내가 붉게 달아오른 가마 아궁이를 발로 걷어차며 울부짖고 있었다. 얼굴은 온통 검은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거칠게 터진 손등에는 굳은살이 흉터처럼 박여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흙과 불을 다루는 데 가장 집념이 강하다는 천민 철화장(鐵畵匠), 박기현이었다.

"온도가 오르지 않는 것은 흙의 문제가 아니다."

나직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가마터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박기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기품 있는 비단 도포를 입은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몸은 왜소했으나, 그 눈빛만큼은 가마 속 시퍼런 불꽃보다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뉘, 뉘시온데 이 천한 곳에 발을 들이십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여긴 나리 같은 귀한 분이 올 곳이 못 됩니다."

박기현이 퉁명스럽게 뱉어내며 다시 가마 벽을 보수하려 진흙을 이겼다. 하지만 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마 내벽의 깨진 틈새로 다가갔다.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푸른빛의 정밀 도면이 투사되었다.

[대상: 토법 요업 가마 (진흙 및 석회 혼합)] [내벽 열 보존율: 42%] [열 손실 원인: 가마 점토 내부의 불균일한 다공성 구조 및 규사 성분의 배합 불량] [해결책: 가마 내벽 코팅용 고온 열 보존제 배합 필요]

이강의 시선이 가마 한구석에 쌓여 있는 광석 더미로 향했다. 광산에서 캐다 버린 잡석들과 조악한 초석 원석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그 순간, '정밀 설계의 안'이 특정 광석의 단면을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클로즈업했다.

[특이 물질 탐지] [성분: 사방정계 결정 구조의 천연 유황 화성 결정 (Allotrope of Sulfur with Iron-Silicate Matrix)] [특성: 연소 및 열 보존 촉진제로서, 점토 배합 시 가마 내벽의 소성 온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킴]

이강은 허리를 숙여 흙먼지 속에 묻혀 있던 황갈색의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흔한 유황 잡석 같았으나, 투시안이 보여주는 미시 구조는 완벽한 격자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훗날 가마의 온도를 백련강을 주조할 수 있는 초고온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열 촉매였다.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그 돌멩이를 소매 속 깊은 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 넣었다.

"이봐요, 도련님! 그걸 왜 가져가십니까? 그건 유황기가 섞여서 도자기를 구우면 다 깨져버리는 잡석입니다요!"

박기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강은 주머니를 툭툭 치며 박기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깨지는 무기를 만드는 자에게는 잡석이겠으나, 단단한 쇠를 부릴 자에게는 천하의 보배가 되는 법이지."

"예? 쇠를 부리다니요? 전 옹기장이가 아니라 쇠를 달구던 철화장..."

박기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강이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신분의 격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가운 눈동자가 박기현의 시선을 옭아맸.

"박기현이라 했느냐. 네가 아무리 도망쳐 다녀도 네 손에 박인 백련강의 흔적은 숨길 수 없다. 천민이라는 굴레에 갇혀 평생 옹기나 구우며 썩어갈 것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조선 역사상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일 백 번 단련한 강철을 만져볼 것이냐."

박기현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과거 군기시에서 쫓겨나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내력까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정보의 격차와 범접할 수 없는 기백에 박기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선택하거라."

이강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를 따르면 네 천민의 딱지를 떼어줄 것이요, 조선에서 가장 거대한 불과 철을 지배하게 해주마."

* * *

가마터 장지 뒤편, 빽빽하게 우거진 솔밭 사이로 한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예조판서 김덕형의 사가에서 부리는 세작이자, 사림 세력이 세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심어둔 밀정이었다. 사내는 나무 등걸에 몸을 바짝 붙인 채, 가마터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병약하여 사경을 헤맨다던 세제 이강이 멀쩡히 걸어 나와 천한 옹기장이와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땅바닥의 돌멩이를 소중히 챙기는 모습까지 모두 그의 눈에 담겼다.

"세제가 기운을 잃기는커녕, 사사로이 천민들을 모아 무언가를 단조하려 하는구나."

사내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그는 품 안에서 거친 한지와 흑연을 꺼내 다급히 목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세제 이강, 사저 남쪽 가마터에서 사사로이 야철 장인과 접촉하여 수상한 광석을 수집함.'

사내는 글씨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서신을 접어 가슴춤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예조판서 김덕형의 대감 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낙엽을 밟으며 고요하게, 그러나 살기 가득하게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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