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해."
두꺼운 서류 봉투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종이가 쓸리는 소리가 건조한 사장실 공기를 갈랐다. 백진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11시 45분. 3일째 이어온 72시간 연속 근무의 끝이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초점은 흐려지지 않았다.
"권고사직서입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권고사직이 아니라 합의 해지다. 진서 너도 누릴 만큼 누렸잖아? 스타트업에서 이 정도 경력 쌓았으면 대기업 이직할 때 포트폴리오로 쓰기 딱 좋지 뭘 그래."
시너지네트웍스 대표 임선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만년필이 팽이처럼 돌았다. 금도금된 펜촉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진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글자 하나, 자구 하나를 짚어내는 시선이 정교한 스캐너처럼 움직였다.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진서의 손끝이 멈췄다.
[제5조 (지식재산권의 귀속)] [을(백진서)이 개발한 '미래온 클라우드 자동 배포 엔진(v1.0.4)'의 모든 특허권 및 소스코드 지분은 갑(시너지네트웍스)에게 영구 귀속된다. 을은 이에 대한 어떠한 민형사상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특허 출원 명의자가 바뀌었더군요."
진서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분노도, 슬픔도 배제된 기계적인 톤이었다.
"임준우. 사장님 아들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개발 기여도 0%인 비전공자가 어떻게 설계서 한 장 없이 배포 특허의 단독 발명자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임선태는 돌리던 만년필을 책상에 쾅 내려놓았다. 가죽 매트가 짓눌리는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야, 백진서. 네가 착각하나 본데, 넌 우리 회사 월급 받고 일하는 하청 나부랭이야. 네 머리에서 나온 건 다 회사 돈으로 만든 회사 재산이라고. 어디서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기어올라?"
"근로계약서 제8조에 따르면, 업무 외 시간에 개인 장비로 개발한 독립 모듈의 소유권은 개발자 본인에게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배포 엔진은 제가 주말과 개인 휴가를 반납하고 제 개인 노트북으로 빌드한 결과물입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어? 네 노트북? 그거 회사 보안 프로그램 깔려 있는 순간부터 회사 자산이야. 보안 규정 위반으로 고소당하기 전에 조용히 도장 찍고 나가. 퇴직금 삼백만 원 더 얹어줄 테니까."
임선태가 서랍에서 도장 인장판을 꺼내 던지듯 놓았다. 빨간 인조가죽 케이스가 진서의 손끝에 닿았다.
진서는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스마트워치의 센서가 실시간 신체 정보를 표기했다.
[심박수: 72 bpm (정상)] [체온: 36.5℃] [스트레스 지수: 낮음]
극단적인 이성주의. 진서에게 인간의 신뢰란 신호가 불확실한 네트워크 프로토콜과 같았다. 언제든 패킷이 유실될 수 있는 불안정한 연결 상태. 임선태라는 노드는 이미 '신뢰도 0%'의 불량 노드로 분류되어 있었다.
"미래온과의 하청 계약 조건이 이 배포 엔진의 납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이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미래온은 시너지네트웍스에 지체상금을 청구하겠지요."
"이 새끼가 진짜 머리 좀 컸다고 협박질이네? 야! 너 하나 발목 잡는다고 대기업 미래온이 멈출 것 같아? 내일 당장 네 계정 전부 블록 처리하고 서버 접근 권한 회수할 거야. 넌 그냥 몸만 나가면 돼."
임선태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꽃이 사장실의 어둠을 잠시 밝혔다 사라졌다. 연기가 진서의 얼굴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진서의 망막 위로 극심한 고열감이 들이쳤다. 안구 뒤편의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시야를 가득 채우던 사장실의 풍경이 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가죽 소파, 유리 테이블, 임선태의 얼굴, 그리고 그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까지. 모든 물리적 실체가 녹색의 디지털 코드로 번역되어 떨어져 내렸다.
[SYSTEM: 리얼리티 컴파일러(Reality Compiler) 초기화 완료.] [대상 세계의 소스코드를 분석합니다...]
진서가 눈을 깜빡였다. 시야 우측 하단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 시스템 성능 지표 | 수치 및 상태 | | :--- | :--- | | **시스템 명칭** | 리얼리티 디버거 (Reality Debugger v1.0) | | **보유 RAM 용량** | 16.00 GB / 16.00 GB (사용 가능) | | **연산 제어 상태** | 정상 (Latency: 1.2ms) | | **가동 버퍼** | 100% |
동시에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경고음이 울렸다.
[※ 경고: 물리 법칙 및 정보 변조(디버깅) 실행 시, 연산 장치(RAM)의 일시적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가용 용량 초과 시 인지 장애 또는 단기 기억 상실이 유발되오니 최적의 리소스 분배를 유지하십시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성적인 회로가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눈앞의 초현실적인 현상은 오류가 아니다. 진서의 뇌를 직접적인 중앙처리장치(CPU)로 삼아 구동되는 물리 변조 인터페이스였다.
| 경영 대장 (Asset Ledger) | | :--- | | **개인 실자산**: 4,210,500원 (신한은행 110-***-***) | | **소유 인프라**: 무 (0) | | **라이선스 권한**: 미래온 배포 엔진 v1.0.4 (소유권 유실 위기) |
"야, 백진서. 안 찍고 뭐 해? 넋 나갔냐?"
임선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진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임선태의 입술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 주위로 흐르는 물리적 마찰음과 음파의 진동 주파수가 코드로 보였다.
```cpp // 임선태 발화 오브젝트 (Object_Lim) void Speak() { float volume = 78.5f; // 데시벨 string content = "야, 백진서. 안 찍고 뭐 해? 넋 나갔냐?"; bool is_truth = false; // 거짓말 탐지 트리거 활성화 } ```
진서의 시선이 임선태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최신형 스마트폰 '미래온 Z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켜지며 금융 앱의 알림이 깜빡였다.
[NH스마트뱅킹: 이체 완료]
진서는 뇌의 연산 영역을 가동했다. 마치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감각이 손가락 끝이 아닌 뇌세포 하나하나에서 직접 일어났다. 목표물은 임선태의 스마트폰이었다.
[디버깅 대상 지정: 임선태의 모바일 디바이스 (IP: 192.168.0.12)] [포트 스캔 중... 80, 443, 8080 Open.] [시스템 경고: 대상 메모리 변조에 필요한 연산 비용 산출 중...]
| 작업 내용 | 요구 RAM | 예상 소요 시간 | | :--- | :--- | :--- | | 메모리 세션 강제 탈취 | 2.15 GB | 0.4초 | | 금융 DB 레지스트리 복호화 | 4.80 GB | 0.9초 | | 로컬 화면 강제 렌더링 변조 | 1.50 GB | 0.3초 | | **총 요구 자원** | **8.45 GB** | **1.6초** |
'실행.'
진서가 마음속으로 명령어를 컴파일했다. 순간 관자놀이가 찌릿하며 강한 압박감이 뇌를 짓눌렀다. 망막 위에 실시간으로 남은 RAM 용량이 줄어드는 수치가 표기되었다.
[가용 RAM: 16.00 GB -> 7.55 GB (과부하율 52.8%)]
임선태의 스마트폰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액정 화면의 픽셀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임선태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느라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진서야. 네가 나가서 소송을 걸든 노동청에 찌르든, 우리 법무팀이 너 하나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알아들어? 좋게 돈 줄 때 받고 꺼지는 게 네 인생에 이로워."
"법무팀을 동원할 자금이 남아 있다면 그렇겠지요."
진서가 건조하게 대꾸하며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의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임선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화면에는 평범한 홈 화면이 아닌, 기괴할 정도로 거대한 팝업창이 떠 있었다. 그것은 가상 계좌나 일반 금융 앱의 인터페이스가 아니었다. 국세청 전산망에 등록되지 않은 비자금 관리용 개인 금고 계좌의 상세 명세서였다.
[NH농협은행 - 차명 계좌 관리자 모드] - 예금주: 임준우 (실소유주: 임선태) - 현재 잔액: 1,842,900,000원 (십팔억 사천이백구십만 원) - 최근 거래 내역: * [11/14] 미래온 구매담당 김 부장 리베이트 송금: -50,000,000원 * [11/12] 시너지네트웍스 법인세 탈루분 입금: +120,000,000원 * [11/05] 유령 인건비 허위 청구 분 가공 송금: +85,000,000원
"이, 이게... 이게 왜 여기에 왜..."
임선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가 다급하게 스마트폰 전원 버튼을 연타했다. 하지만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진서가 물리 메모리 레벨에서 화면 출력 레지스터를 직접 고정(Hard-coded)해 버렸기 때문이다.
"NH농협은행의 차명 계좌 API는 다중 세션 접근 제어에 취약점이 있더군요. 특히 사장님이 애용하시는 그 불법 사설 금융 포털은 백도어가 가득한 구형 버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진서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테이블 위의 권고사직서를 집어 들고 반으로 무심히 접었다.
"자녀분의 명의로 개설된 계좌더군요. 증여세 누락은 물론이고, 대기업 미래온의 임직원에게 제공한 리베이트 내역까지 아주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이터의 무결성이 아주 훌륭합니다."
"너,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거 당장 꺼! 당장 끄라고!"
임선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스마트폰을 바닥에 던지려 했지만, 이미 화면은 멈추지 않고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진서는 자신의 뇌 속 RAM 점유율을 확인했다. 안정적이었다. 그는 추가적인 스크립트를 주입했다.
```python # 국세청 탈세 제보 API 및 서울중앙지검 금융범죄수사부 트리거 실행 import tax_report_api import prosecution_trigger
def send_evidence(): payload = gather_phone_data("Object_Lim") tax_report_api.send(payload, category="Treason_Tax") prosecution_trigger.execute_action(payload) ```
[시스템 알림: 트리거 전송 완료. 대상 기관 수신 확인 수신(ACK).] [가용 RAM: 7.55 GB -> 11.20 GB (메모리 부분 회수 중)]
"차명 계좌에 연결된 디바이스의 물리적 MAC 주소와 사장님의 위치 정보, 그리고 해당 비자금 장부의 원본 CSV 파일이 방금 국세청 탈세신고센터와 서울중앙지검 금융범죄조사2부의 핫라인으로 전송되었습니다."
진서가 손목시계를 툭툭 쳤다.
"정확히 2분 40초 전에 전송이 완료되었으니, 지금쯤 패킷 분석을 마치고 법원에서 발부 대기 중이던 영장 집행 단계로 넘어갔을 시간입니다."
"미친... 미친 새끼! 네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임선태가 책상을 짚고 넘어가 진서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진서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사장실 가죽 소파 옆에 놓여 있던 대형 스마트 TV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켜졌다.
*위이이잉-*
화면에는 시너지네트웍스의 본사 메인 서버 구조도가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실시간으로 매핑되고 있었다. 동시에 진서의 머릿속 시스템 창이 갱신되었다.
| 실시간 영향도 평가 | 수치 및 결과 | | :--- | :--- | | **대상 기업 피해율** | 98.2% (시너지네트웍스) | | **임선태 법적 처벌 확률** | 99.9% (특가법상 조세포탈 및 횡령) | | **백진서 소스코드 방어율**| 100% (원천 기술 완전 보존) |
"사직서에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진서가 임선태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임선태는 힘없이 뒤로 밀려나 소파에 엉덩이를 찧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다.
"회사가 공중분해되면 지식재산권 귀속 계약 자체의 효력이 상실되니까요. 미래온과의 계약 파기로 인한 지체상금은 온전히 사장님의 개인 채무와 법적 책임으로 남게 될 겁니다."
"백, 백 팀장... 진서야. 내가 잠깐 눈이 멀어서 그랬어. 어? 이거 다 오해야. 특허? 그거 내일 당장 네 이름으로 단독 발명자 변경 신청서 제출할게. 아니, 회사 지분 30% 줄게. 어때? 제발 그것 좀 멈춰줘!"
임선태가 무릎을 꿇듯 소파 아래로 내려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대기업 하청업체 사장의 오만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서의 눈에 비친 임선태의 상태는 오직 하나의 텍스트로만 요약될 뿐이었다.
`Status: Terminated`
"신뢰할 수 없는 노드와의 트랜잭션은 거부합니다."
진서가 차갑게 돌아섰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사장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쾅!*
사장실 외부, 회사 입구의 두꺼운 강화유리문이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깨어지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찍어 누르는 소리가 사장실 문 앞까지 빠르게 다가왔다.
"서울중앙지검 금융범죄조사2부입니다! 임선태 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조세포탈 혐의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 집행합니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파란색 압수수색 박스를 든 수사관들과 정장을 입은 검찰 수사관들이 사장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수라장이 된 방 안에서, 진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밀고 들어오는 수사관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 순간, 무리를 이끌던 중년의 수석 수사관이 사장실 한가운데 서 있는 진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진서의 눈과 수사관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확하게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