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저번에 구관 늑대 보스 토벌 중 마이크 음질에서 새어 나온 코막힘 톤이랑…… 아주 기이할 만큼 일치하는구나?”
귓구멍 속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한서희의 숨결은 따뜻했으나, 그 속에 담긴 대사는 남극 빙하보다 차가웠다. 코끝을 찌르는 찌릿한 ‘티트리 루나’ 향수 냄새가 내 뇌세포를 하나하나 마비시키는 기분이었다.
미친. 이 기집애는 인간 거짓말 탐지기인가? 아니, 그보다 마이크 음질에서 새어 나온 코막힘 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건데? 이 정도면 거의 집착 광공 수준이 아닌가 싶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바가지 흘러내려 척추를 적셨다. 여기서 0.1초라도 머뭇거리거나, 눈동자를 아주 미세하게라도 굴렸다간 그대로 아웃이다. ‘가면 헌터’의 신상이 털리는 순간, 내 평생의 꿈인 강남 건물주 계획은 공중분해되고 던전 난이도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나는 뇌내 회로를 풀가동했다. 0.01초 만에 도출된 결론은 단 하나. 구차함의 극치, 그리고 찌질함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끄, 끄으으……!”
나는 돌연 눈동자를 위로 까뒤집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부르르 떨며 입술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한서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거대하게 커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으, 으아아아! 머,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서, 서희 씨가 너무 가까이 오니까, 여, 여자 냄새 때문에 숨이…… 헉, 헉!”
나는 양손으로 대가리를 감싸 쥐고 흙바닥 위를 사정없이 뒹굴었다. 일부러 콧물까지 팽 훔쳐내어 흙먼지와 비벼 섞었다. 얼굴은 이미 수치심과 공포로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으니, 연출은 완벽했다.
“어, 어질어질해……! 나, 나 기절할 것 같…….”
털썩!
나는 그대로 목을 꺾고 흙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완전히 뺀 채 사지를 사르르 떨었다. 혀를 살짝 입술 옆으로 내밀고,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른바 ‘개구리 횡사’ 포즈였다.
“…….”
정적이 흘렀다. 내 코앞에 드리워져 있던 한서희의 그림자가 우뚝 멈춰 섰다. 바람결을 타고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인마.”
한서희가 전투화 앞코로 내 옆구리를 툭툭 찼다. 나는 철저하게 고기 인형이 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옆구리가 꽤 아팠지만, 참아야 한다. 강남의 꼬마빌딩을 생각하면 이 정도 발길질은 안마나 다름없다.
“야, 윤진. 일어나. 장난치지 말고.”
“으어어…… 서희 씨…… 저는 역시 아카데미랑 안 맞나 봐요…… 여자가 말을 걸면 심장이 터지는 병이 있어서…….”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한층 더 비참하게 몸을 웅크렸다. 일부러 손가락을 덜덜 떨며 바닥의 풀때기를 쥐어뜯었다.
이쯤 되자 한서희의 얼굴에 서려 있던 날카로운 의심의 빛이 서서히 황당함과 깊은 혐오감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하…… 진짜 돌겠네. 내가 잠을 못 자서 미쳤나 보지. 이딴 한심한 녀석이랑 그 대단한 스트리머를 겹쳐 보다니.”
한서희의 목소리에서 짙은 멸시가 묻어났다. 성공이다! 그녀의 자존심 강한 성격상, 이렇게 찌질하게 구는 놈을 ‘그 멋진 가면 헌터’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인지부조화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일어나지 마. 그냥 거기 누워서 흙이나 파먹고 있어. 난 저쪽 숲 구획에 마력 반응이 느껴지니까 혼자 갔다 올 테니까.”
서걱, 서걱.
한서희가 신경질적으로 풀숲을 헤치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흙바닥에 뺨을 댄 채,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매끄러운 뒷모습을 보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진짜 심장 마비로 먼저 골로 갈 번했네.”
나는 대가리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내 바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기분 나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나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지난번 그림자 하수도에서 몰래 챙겨두었던 보스 마수 ‘도살자’의 푸른 심장 핵 파편이었다. 이 녀석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맥박을 치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위잉- 위잉-]
동시에 내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 창이 사정없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대한 아카데미 구관 미궁 구획의 마력 제어 장치에 이상 공명이 감지되었습니다!] [차원 침식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심연의 균열이 발생합니다!]
“뭐라고? 미친, 갑자기 왜 이래?”
내 독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구구궁- 하는 지진 같은 진동이 대지를 덮쳤다.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기괴한 파공음이 사방을 메웠다.
쩌저적!
저 멀리 한서희가 걸어 들어간 숲 구획의 허공이 칠흑 같은 검은색 균열로 찢어졌다. 그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카데미 연습용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득하고 포악한 심연의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같은 형체가 서서히 기어 나왔다.
크오오오오오-!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박쥐를 닮은 거대한 가죽 날개, 온몸이 단단한 암석과 맹독성 보라색 이끼로 뒤덮인 괴물. 전설급 마수, **[맹독 가고일]**이었다.
“저, 저게 왜 여기서 나와……?”
저 멀리서 한서희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서둘러 검을 뽑아 들었지만, 맹독 가고일이 날개를 한번 크게 휘두르자 엄청난 독풍(毒風)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쉬이이익!
독기 어린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주변의 수풀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 가며 녹아내렸다. 한서희는 급히 마력 보호막을 전개했지만, 가고일의 압도적인 풍압에 밀려 뒤로 크게 나자빠졌다.
“쿨럭……! 이, 이 정도의 침식은 예보에 없었는데……!”
한서희가 검을 땅에 짚으며 간신히 버텼지만, 가고일은 이미 그녀를 먹잇감으로 점찍은 듯 붉은 안광을 빛내며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한서희는 죽는다. 아무리 A랭크 엘리트라 해도, 아카데미 학생 신분으로 전설급 마수의 기습을 정면으로 버텨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저기서 정면으로 나서서 도와준다면? 내 정체가 ‘가면 헌터’라는 사실을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 된다.
“아, 진짜 귀찮게 만드네, 저 기집애……!”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한서희가 쓰러진 곳 주변은 가고일이 뿜어낸 맹독 안개로 자욱해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가고일의 거대한 등짝이 한서희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덤불 뒤 깊숙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품 안에서 늘 소지하고 다니던 검은색 하프 가면을 꺼내 얼굴에 밀착시켰다.
가면이 얼굴에 닿는 순간, 내 뇌리에 차갑고 찌릿한 전류가 흐르며 쭈구리 윤진의 인격이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이, 성좌 돼지새끼들아. 형 왔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고 실시간 스트리밍 버튼을 사정없이 갈겼다.
[띵동! '가면_헌터' 님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고정 시청자 1,204명 입장 중!]
방송이 켜지자마자 대기 타고 있던 키보드 워리어 성좌들과 시청자들이 미친 듯이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 [성좌 '치킨은못참지'가 입장했습니다.] - [성좌 'CG_Slayer'가 입장했습니다.] - ㅋㅋㅋ 야 이 새끼 또 켰네? 오늘 세트장은 어디냐? - 와 뒤에 배경 보소. 이번엔 안개 효과 지리네. 가습기 몇 대 돌렸냐? - 어? 저기 앞에 있는 몬스터 퀄리티 보소 ㅋㅋㅋㅋ 맹독 가고일이넼ㅋㅋㅋ 요즘 중국산 피규어 잘 나오네
나는 목소리 변조기를 켜고, 특유의 거만하고 얄미운 톤으로 마이크에 대고 지껄였다.
“어이, 방구석 전문가 형씨들. 눈이 삐었어? 이게 피규어로 보여? 내가 특별히 돈 좀 써서 ‘특수 유료 던전 스튜디오’ 대여했다. 어때, 저 가고일 움직임 개쩔지? 요즘 그래픽 기술에 지려버렸냐?”
내 도발에 성좌 'CG_Slayer'가 즉각 반응했다.
- [성좌 'CG_Slayer': 하! 가소롭구나. 저 연출은 뻔히 보이는 허풍이다! 가고일의 날개 짓에 따른 공기 저항 묘사가 픽셀 단위로 뭉개지고 있거늘, 어디서 사기를 치려 드느냐! (10,000코인 후원)] - 와 시발 성좌 형님 또 팩폭 박으면서 후원 쏘네 ㅋㅋㅋㅋㅋ - 팩트) 저거 움직임 프레임 드랍 일어나는 거 보니까 100% 언리얼 엔진 5 주작이다 ㅋㅋㅋㅋ - 주작이 없으면 방송을 못 해요~ 아주 생쇼를 해라 ㅋㅋㅋ
[띠링!] [시청자들의 '주작(조작) 의심 수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현재 의심 수치: 85%] [역설 가스라이팅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모든 실시간 전투 능력치 및 스킬 배율이 **850%** 증가합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시야 한구석에 있는 개인 상태 창의 수치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하더니, 수식 교정을 거쳐 새로운 숫자를 띄웠다.
[기본 공격력: 60] -> [**수정 공격력: 510**] [스킬 '극초음속 가위질' 배율: 150%] -> [**수정 배율: 1,275%**]
“키야아아아아!”
도파민이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때렸다. 전신을 채우는 이 압도적인 물리력. 흙바닥을 딛고 있는 내 두 다리에 우주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힘이 깃들었다.
“자, 형들. 잘 봐라. 요즘 그래픽 카드가 얼마나 열일하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줄 테니까.”
스스슥.
나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보통 인간의 눈으로는 잔상조차 쫓지 못할 속도였다.
가고일은 한서희를 향해 거대한 돌주먹을 내리찍으려던 참이었다. 한서희는 독기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겨우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사각지대로, 내가 파고들었다.
“어딜 감히 내 강남 빌딩 투자금을 건드려, 이 돌멩이 새끼가.”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싸구려 보급용 연습용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라면 가고일의 가죽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부러졌을 장난감 같은 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검에는 850%로 증폭된 마력이 푸른색 초고진동 날이 되어 휘감겨 있었다.
스킬 발동. **[극초음속 가위질]**.
스바바바방-!
찰나의 순간, 가고일의 등 뒤로 두 줄기의 은빛 궤적이 교차했다. 그것은 소리조차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극초음속의 검격이었다.
서거어억-!
“끄아아아아악!”
가고일이 단 한 비명과 함께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녀석의 거대한 석조 날개 두 쌍이, 마치 두부 자르듯 매끄럽게 잘려 나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단 한 칼이었다.
- ??? 방금 뭐 지나감? - 와 프레임 스킵 실화냐? 연출 개지리네 ㅋㅋㅋ - 야, 날개 잘려 나가는 궤적에 모션 블러 효과 너무 과한 거 아니냐? ㅋㅋㅋ 주작 티 존나 나네! - [성좌 'CG_Slayer': 흥! 프레임을 인위적으로 잘라내어 속도감을 연출한 것에 불과하다! 눈속임치고는 제법 그럴싸하군! (20,000코인 후원)]
“주작이라고 생각하면 팝콘이나 뜯으면서 계속 봐라, 형들아!”
나는 착지와 동시에 가고일의 거대한 몸체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녀석은 날개를 잃고 중심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나는 검을 역수로 쥐고, 가고일의 가장 단단한 부위인 심장 핵이 위치한 가슴팍을 향해 그대로 수직으로 찔러 넣었다.
푸우욱!
850%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단단한 콘크리트 같던 가고일의 가슴팍이 종잇장처럼 뚫려 나갔다. 검끝이 녀석의 몬스터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쩍, 쩌적!
가고일의 온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가고일의 품속으로 손을 뻗어, 녀석의 체내에서 흘러나오는 전설급 마수의 뼈 조각 하나를 빠르게 낚아챘다.
[아이템 '맹독 가고일의 잔뼈'를 획득했습니다.]
은퇴 자금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고급 재료다. 주머니에 쑤셔 넣는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 오늘 그래픽 쇼는 여기까지!”
나는 즉각 스마트폰의 방송 종료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껐다. 가면을 벗어 품속에 집어넣는 데 걸린 시간은 단 0.5초.
그리고 나는 다시 흙바닥 위로 몸을 날렸다. 한서희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다시 얼굴을 땅에 처박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 완벽한 ‘기절한 아싸’ 모드로 돌아갔다.
쿠구구궁…… 쿵!
날개를 잃고 핵이 파괴된 가고일의 거대한 석조 신체가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사방으로 흙먼지와 독무가 걷히기 시작했다.
자지러지는 파공음과 가고일의 낙하 소리에 놀란 한서희가 기겁하며 고개를 완전히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반사적으로 급격하게 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먼지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나와 가고일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