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스마트폰에 아카데미 긴급 소집 공지로 '내일부터 전 학년 미궁 숲 2인 1조 대련식 합동 평가 진행'이란 날벼락이 내리꽂힌다.
그 끔찍한 공지를 확인한 뒤로 나는 단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만 가지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한서희와 단둘이 숲속에 갇힌다? 그것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내 정체를 캐내지 못해 안달이 난 그 인간 사냥개와?
이건 평가가 아니라 고문이다. 아니, 내 평화로운 건물주 은퇴 계획을 뿌리째 흔들어 놓으려는 하늘의 농간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대련 당일 아침.
대한 아카데미 서쪽에 위치한 ‘미궁의 숲’ 입구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귓가를 때리는 웅성거림,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 그리고 나를 향한 은밀한 수군거림까지. 극심한 시선공포증을 앓고 있는 나로서는 이 자리 자체가 거의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아, 하아…….”
나는 일부러 후드집업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눈동자는 바닥의 흙먼지만을 쫓았고,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구체적인 진동을 그리며 흔들렸다. 완벽하다. 누가 봐도 긴장해서 오줌을 지리기 직전인 F랭크 아싸 찐따의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하면서도 지극히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상큼하면서도 끝 맛이 쌉싸름한 허브 향. 한서희가 애용하는 고유의 **‘티트리 루나’** 향수 냄새였다.
“……윤진.”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단정하게 묶은 흑발에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고 있는 한서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고급 레이피어가 들려 있었고, 그에 반해 내 손에 들린 것은……지급용 싸구려 목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 지금 무기를 어떻게 쥐고 있는 거야?”
한서희의 미간이 사정없이 좁아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내 손이었다. 나는 극심한 공포와 긴장감을 연출하기 위해, 목봉의 뭉툭한 대가리 부분을 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손잡이 끝부분을 지팡이처럼 짚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치 80대 노인네가 등산 스틱을 짚고 서 있는 듯한 해괴망측한 자세였다.
“어, 어? 아…… 아, 안녕하…… 세요, 서, 서희 씨…….”
나는 말을 일부러 더듬으며, 목봉바닥을 콕콕 찧었다.
“이, 이게…… 그, 그러니까…… 저, 저는 체력이 약해서…… 이, 이렇게 무게중심을 아래로 둬야…… 안 쓰러져서…… 요…….”
“하아…….”
한서희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그렇게 한심하게 봐라! 날 쓰레기 취급하고 신경을 꺼버려!
하지만 내 평화로운 무능 연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터벅, 터벅.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어깨에 힘을 빡 준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선두에 선 녀석은 척 보기에도 비싼 커스텀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신지태였다.
“야, 한서희. 너 진짜 이번 학기 액땜 지대로 한다?”
신지태가 짝다리를 짚으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내 거꾸로 쥔 목봉에 닿자, 사방이 떠나가라 비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합! 야, 저 꼴 좀 봐라! 저게 우리 학년 수석 입학생의 위엄이냐? 무기를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네? 야, 윤진! 너 벌써 조기 노화라도 왔냐? 다리가 왜 그렇게 떨려? 기저귀라도 채워줘야겠는데?”
신지태의 조롱에 그의 주변을 둘러싼 추종자들이 일제히 킥킥거리며 동조했다. 숲 입구에 모여 있던 다른 동기들의 시선까지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가뜩이나 이번 합동 평가 점수 비중이 50%나 되는데, 저딴 쓰레기 F랭크 아싸 새끼랑 한 조가 되다니. 서희 너도 참 눈물겹다. 저 새끼가 네 앞길 아주 시원하게 가로막아 버릴 텐데, 그냥 교관한테 말해서 조 바꿔 달라고 하지 그래?”
신지태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튼 것처럼 숲속에 울려 퍼졌다. 주변의 비웃음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오, 신지태 이 기특한 새끼.’
나는 속으로 신지태에게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저 녀석이 저렇게 광역 어그로를 끌어주며 나를 바닥까지 깎아내려 줄수록, 내 진짜 정체는 더욱더 두꺼운 베일 속으로 숨겨진다.
“지태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눈치 더럽게 없고 의리만 넘치는 내 현실 친구(라고 주장하는) 김대협이었다.
“우리 윤진이가 긴장해서 그런 거지, 원래는…… 원래는 아주 착하고 심성이 고운 녀석이라고! 그리고 무기를 거꾸로 쥐는 건…… 그, 그래!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련법일 수도 있잖아!”
대협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독특한 수련법은 무슨 얼어 죽을 수련법이냐. 도와주려는 건 고마운데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내 아싸 방어막이 찢어지는 기분이란다.
“수련법? 지랄을 해라, 지랄을.”
신지태가 침을 뱉으며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야, 한서희. 내 말 잘 들어. 저딴 짐짝 데리고 가다가 다치지 말고, 위험하면 그냥 버려. 어차피 F랭크 아싸 새끼 하나 뒤쳐진다고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신지태 무리는 낄낄거리며 멀어졌다. 주변의 수군거림은 여전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주 좋아. 내 무능함은 완벽하게 입증되었고, 동기들의 머릿속에 나는 ‘무기도 제대로 못 쥐는 짐짝’으로 완전히 낙인찍혔다.
그때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대기 시간 동안 슬쩍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은밀하게 헌터 커뮤니티의 ‘가면 헌터 주작 감별 게시판’을 켰을 때, 내 눈에 들어온 베스트 글 제목이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개념글] 가면 헌터 체형 및 관절 굴곡 매개변수와 대한 아카데미 F랭크 윤진의 인체 모델링 대조 분석.txt 작성자: CG_Slayer (성좌)
‘……이 미친 성좌 새끼가 또?!’
ID 'CG_Slayer'. 그 정체가 사실은 심연의 차원에 사는 마신 모르고스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나는 속으로 그 닉네임을 향해 온갖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이 새끼는 진짜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의 정점이었다. 내가 올린 방송 화면을 프레임 단위로 쪼개서 내 관절 꺾임 각도와 체형을 분석해 놓은 것이었다.
- 야 이거 념글 올려라. 분석 지리네. - 근데 윤진 쟤는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찐따 아님? 가면 헌터는 마수 목을 한 손으로 뜯어내는데 체형만 닮은 거겠지 ㅋㅋㅋ - 팩트) 요즘 CG 기술 발달해서 체형 데이터만 따다가 렌더링 씌운 걸 수도 있음. 결국 가면 헌터 방송은 100% 주작 그래픽임. 엘프 모델링 따서 쓴 거 보셈 ㅋㅋㅋ - CG_Slayer 이 새끼 분석은 개추야. 주작 헌터 참교육 가자.
인터넷 커뮤니티의 현란한 키보드 워리어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경고: 신상 유출 의심 수치가 68%까지 상승했습니다!]** **[경고: 수치가 100%에 도달하는 순간, 시스템 버프가 영구 소멸하며 던전 난이도가 최악으로 폭증합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위험하다. 저 주작 감별단 새끼들이 내 신상을 털기 위해 레이더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또 다른 알림창이 번쩍이며 떠올랐다.
**[성좌들과 시청자들의 주작(조작) 의심 수치가 폭증합니다!]** **[현재 주작 의심도: 89%]** **[스트리머의 역설 가스라이팅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전투 능력치 및 스킬 배율 실시간 버프: +890% 폭발적 증가!]**
“……어우.”
몸 안에서 미쳐 날뛰는 힘이 느껴졌다. 스킬 배율이 무려 9배 가까이 폭증했다. 손에 쥔 싸구려 목봉으로 지금 당장 저 앞에 서 있는 신지태의 대가리를 날려버려도 남을 만한 파괴력이 전신에 요동쳤다.
버프를 주는 건 고마운데, 제발 심장 쫄깃하게 만들지 좀 마라. 돈 벌어서 빌딩 사고 넷플릭스 보며 평생 누워 살아야 하는데, 정체 들통나서 대가리 깨지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흙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아야……!”
일부러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척했다. 발목이 접질린 척 쩔쩔매는 찐따 연기의 극치였다. 이 정도면 한서희도 나를 완전히 병신으로 보고 신경을 꺼주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걱.
풀숲을 밟는 소리와 함께, 내 코앞으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
한서희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어깨너머로 흘러내리며 내 뺨을 스칠 듯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마비시킬 정도로 진한 ‘티트리 루나’ 향수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웠다. 상체를 깊숙이 숙인 탓에, 그녀의 매끄러운 목덜미와 매서운 눈동자가 내 코앞에 위치해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고개를 뒤로 뺐다.
“저, 저기…… 서, 서희 씨…… 너무 가까…….”
“윤진.”
한서희는 내 말을 뚝 끊었다. 그녀의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아주 깊숙이, 꿰뚫어 보듯 마주했다. 그 눈빛은 마치 거짓말 탐지기처럼 내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려는 것 같았다.
주변의 학생들이 보면 ‘A랭크 엘리트가 한심한 F랭크 파트너를 가까이서 훈계하는 장면’으로 보이겠지만, 내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전혀 달랐다. 이건 숨 막히는 첩보전이었고,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내 목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한서희는 내 귀가로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따스하고 간지러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히는 순간, 내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전율이 흘러내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집요했다.
“너, 저번에 구관 늑대 보스 토벌 중 마이크 음질에서 새어 나온 코막힘 톤이랑…… 아주 기이할 만큼 일치하는구나?”
“……!”
그 순간, 내 심장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내 스마트폰 마이크에 미세하게 변조되어 누출되었던 그녀의 향수 성분 소음, 그리고 내가 가면을 쓰고 방송할 때 아주 미세하게 섞여 들었던 내 목소리의 고유 주파수와 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대조하고 있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한서희의 매혹적이면서도 살벌한 미소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