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5:12 AM 성진의료재단 혜성대학교병원 로비.
3년 만에 밟은 병원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변함없이 차갑고 매끄러웠다. 높은 천장 아래로 웅성거리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소음,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3년 전, 이사회의 더러운 음모에 휘말려 의사 면허마저 박탈당할 뻔한 채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무력한 외과의사가 아니었다.
로비 중앙, 거대한 인공 분수대 앞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쓸모없는 년이 감히 누구 앞길을 막아서? 네가 아주 한지호 밑에 있을 때처럼 눈에 뵈는 게 없지?"
지나던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형외과 과장 최형석이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한 젊은 여자 의사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 있었다.
서채윤. 3년 전, 내가 이 병원에서 유일하게 신뢰했던 전속 조수이자 촉망받는 펠로우였다.
그녀는 최형석의 압박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하얀 의사 가운 자락이 먼지 낀 대리석 바닥에 쓸렸다. 최형석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서채윤의 멱살을 잡듯 가운 깃을 움켜쥐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강현민 기조실장님이 지시하신 임상 데이터 야간 검수 건을 누락해? 네까짓 게 감히 실장님 라인에 똥을 뿌려? 오늘 아주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놔야겠군."
최형석의 두꺼운 손바닥이 서채윤의 뺨을 향해 허공등을 가르며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그 순간.
탁.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최형석의 손목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강한 물리적 압박에 최형석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손목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에 최형석은 비명을 질렀다.
"악! 뭐야? 어떤 새끼가……!"
최형석이 고개를 돌려 손목을 잡은 이를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한지호?!"
나는 최형석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조용히 뼈가 맞물려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서채윤을 구하겠다는 숭고한 영웅심리 따위가 아니었다. 혜성대학교병원은 조만간 내가 인수할 내 영토였고, 서채윤은 그 영토 안에서 가장 가치 있게 써먹어야 할 내 사유 자산이었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잡배를 묵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최 과장님. 여전히 메스 대신 똥개처럼 짖는 재주만 늘으셨군요."
"이, 이 미친놈이……! 해고당한 낙오자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서 행패야! 이거 안 놓아?!"
최형석이 몸부림을 쳤지만, 내 아귀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서채윤이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한…… 선생님?"
"일어나, 서채윤. 바닥 더럽다. 네 몸값은 그까짓 대리석 바닥에 뒹굴 만큼 싸구려가 아닐 텐데."
내 차가운 수치적 평가에 서채윤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을 구하겠다는 낭만적인 인도주의를 품고 있었지만, 메스 실력만큼은 이 병원 그 누구보다 정교했다. 그런 인재가 이런 쓰레기들의 정치 싸움에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것은 내 비즈니스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최형석은 붉어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며 삿대질을 해댔다.
"당장 보안요원 불러! 이 미친 새끼 끌어내! 감히 혜성병원 로비에서 난동을 부려? 너 같은 면허 정지 수준의 범죄자는 이 병원 문턱도 밟으면 안 돼!"
"그 면허,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그 대가리 위에 앉을 사람도 나고."
내가 피식 웃으며 최형석의 손목을 팽개치듯 던졌다. 최형석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다 분수대 가에 엉덩이를 찧었다.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이명과 함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박동이 안구 뒤쪽을 강타했다.
‘윽……!’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탈색되더니, 오직 짙푸른 어둠과 강렬한 형광 붉은색만이 시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최형석의 목을 타고 흐르는 경동맥,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서채윤의 다리 근육 속에 얽힌 미세 신경망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붉은 실선처럼 선명하게 투시되었다.
**[경고: 적광안(赤光眼) 각성 완료.]** **[가치 관리 원장(ledger)이 개방되었습니다.]** **[현재 경영 평판 누적 지수: 0]** **[주의: 적광안의 과도한 사용은 뇌신경계 역류를 유발하여 일시적인 사지 감각 마비를 초래합니다. 평판 지수를 획득하여 마비를 억제하십시오.]**
망막 위에 기계적인 활자들이 붉은 낙인처럼 박혔다. 환자의 손상된 신경망을 실시간으로 직관하고 최적의 봉합 선로를 안내하는 신비한 능력. 동시에 내 생명을 갉아먹는 죽음의 족쇄.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희열이 솟구쳤다. 이 능력이 있다면, 이 썩어 빠진 병원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비즈니스는 한층 더 완벽해질 것이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붉은 신경망의 궤적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11:58:45 AM 그때, 로비 유리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119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밀고 다급하게 들어섰다.
"비키세요! 응급 환자입니다! 우측 전완부 완전 절단 및 다발성 열상 환자입니다!"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들것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젊은 남자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우측 팔꿈치 아래는 처참하게 잘려 나가 임시 압박대로 간신히 묶여 있었고, 아이스박스 안에는 비닐에 싸인 절단된 팔이 들어 있었다.
최형석이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구급대원 앞을 가로막았다.
"환자 인적 사항은?"
"민우진, 28세 남성입니다! 서부 공단 작업 중 프레스 기계에 압착 절단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최형석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민우진. 성진의료재단 이사장 민태준의 친조카이자, 가문의 방계 혈족 중 하나였다. 최형석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사장 가문의 인물이 이 지경이 되어 왔는데, 수술이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집도의가 져야 했다.
"이, 이건 우리 병원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야. 신경과 혈관이 완전히 으스러졌어. 미세 접합은 불가능하다. 즉시 2차 병원으로 전원해!"
최형석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비겁하게 소리쳤다. 절단된 지 이미 시간이 지체되었고, 프레스 기계에 짓눌린 조직은 접합 성공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때, 내 적광안이 환자의 절단된 팔을 향했다.
붉은 광선이 환자의 찢겨 나간 살점 사이로 파고들었다. 요골신경(radial nerve)*과 척골신경(ulnar nerve)*의 끊어진 단면들이 붉은 실선이 되어 서로를 향해 손을 뻗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의 전완부 미세 혈관을 투시하던 중, 내 눈에 기묘한 혈관 구조가 포착되었다.
요골동맥 분지 지점에 아주 미세하게 부풀어 오른 주머니 형태의 흔적.
‘이건…….’
희귀 미세동맥류(Microaneurysm)*의 흔적이었다. 선천적으로 혈관 벽이 약해 발생하는 유전적 결함.
순간, 뇌리를 스치는 정보가 있었다. 이사장 민태준 가문의 유전적 내력. 3년 전 병원을 떠나기 전 우연히 보았던 재단 핵심 인물들의 비공개 건강 검진 기록 중, 민태준의 친척 수술 자료에서 보았던 특이한 혈관 결함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이 환자의 혈관 구조는 이사장 민태준에게도 대물림되는 유전적 혈관 폐색 진행 가능성을 증명하는 결정적 열쇠이자 복선이었다. 이 환자를 살려낸다면, 나는 이사장 민태준의 목숨줄을 쥐는 것과 다름없었다.
"전원이라니? 최 과장, 당신 눈에는 저 환자가 그냥 죽어가는 고깃덩어리로 보이나 보지?"
내가 차갑게 비웃으며 환자의 들것 앞으로 걸어갔다.
"한지호! 네놈이 미쳤구나! 저건 단순 절단이 아니라 압착 절단이야! 초미세 동맥과 정맥, 신경이 전부 파괴됐어! 접합 성공률은 제로다! 이 수술을 하겠다는 건 환자를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시키겠다는 소리야!"
최형석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주변의 레지던트들과 간호사들도 수군거렸다. 아무리 천재 외과의사 한지호라 해도, 3년의 공백이 있는 데다 이런 최악의 압착 절단 환자를 접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분위기였다.
"성공률 제로?"
나는 환자의 절단 부위를 가리키며 서채윤을 바라보았다.
"서채윤, 어시스트 준비해. 수술실 어레인지해라."
"예? 하지만 한 선생님, 아직 복귀 승인도 나지 않았고……."
"환자가 훌륭한 '지분'인데, 승인 따위가 무슨 상관이지? 이 환자를 살려내면, 민태준 이사장은 나한테 이 병원의 열쇠를 넘겨줘야 할 거다."
내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적 발언에 서채윤은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내 눈빛에 서린 압도적인 확신을 읽어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다 이내 단단해졌다.
"……알겠습니다. 수술실 확보하겠습니다."
"야! 서채윤! 너 미쳤어? 저 범죄자 새끼 말을 듣고 수술실을 열겠다고? 당장 멈추지 못해?!"
최형석이 길길이 날뛰며 보안요원들을 불렀다.
"보안팀! 당장 이 새끼들 끌어내! 불법 의료 행위로 신고해!"
12:12:05 PM 수술실 앞 복도.
보안요원 대여섯 명이 우리를 가로막았지만, 나는 환자의 들것을 밀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내 눈앞의 적광안은 환자의 으스러진 신경들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선로를 계속해서 붉은 빛으로 가이드하고 있었다.
"비켜."
내 한마디에 담긴 서늘한 살기에 보안요원들이 멈칫했다. 3년 전 이 병원에서 쫓겨날 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지배자의 아우라였다.
최형석이 뒤따라오며 악을 썼다.
"한지호! 네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 무단 침입 및 의료법 위반으로 경찰에 처넣을 줄 알아! 강현민 기조실장님도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강현민에게 전해라. 내가 돌아왔다고."
나는 수술실(OR)의 두꺼운 자동문 앞에 섰다. 서채윤이 신속하게 수술실 제어 콘솔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들것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수술실 내부 제어 장치로 향했다. 그리고 벽면에 설치된 수동 잠금 레버를 단호하게 내렸다.
철컥-!
묵직한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수술실의 이중 강화유리 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밖에서 최형석이 유리를 두드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마이크 너머로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한지호! 문 열어! 당장 멈춰! 이거 미친 짓이야!
나는 수술 장갑을 끼며 유리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 과장. 그리고 그 뒤에 숨은 강현민."
나는 마이크 스위치를 켜고, 벼려진 칼날 같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수술도, 조만간 네놈들이 거머쥔 이 병원도 전부 내 손만 보게 될 거다. 얌전히 구경이나 해라."
수술실의 푸른 조명이 내 시야의 붉은 광선과 섞이며, 기괴하고도 성스러운 빛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내 손끝이 메스를 쥐었다. 마침내, 복수의 서막이 올랐다.
***
*요골신경 (Radial nerve): 팔의 뒤쪽에 위치하며 손등과 손가락의 신전(펴는 동작)을 담당하는 신경. *척골신경 (Ulnar nerve): 팔의 안쪽을 지나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과 감각을 담당하는 신경. *미세동맥류 (Microaneurysm): 혈관 벽의 일부가 약해져 미세하게 늘어난 상태로, 파열 시 심각한 출혈이나 폐색을 유발함. *테이블 데스 (Table death):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