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묻을 수 있다면, 어디 한번 묻어보시든가요.”

도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 가느다란 미소는 송만호 실장의 심장 정중앙을 찌르는 송곳과도 같았다.

송만호의 굵은 목덜미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리딩실 구석의 좁은 공기가 갈라질 듯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송만호는 당장이라도 대본집을 말아 쥐고 도현의 뺨을 갈겨버릴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의 콧구멍이 사납게 벌렁거렸다.

“너…… 감히 누구 앞에서 대가리를 치켜들어? 네놈이 누구 덕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벌써 까먹었나 본데, 내가 오늘부로 네 이름 석 자를 업계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어. 똑똑히 기억해 둬라, 서도현. 넌 이제 끝이야.”

송만호가 침을 튀기며 으르렁거렸다. 목소리를 낮추려 애썼지만, 억눌린 분노 때문에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갰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 끝으로 대본 표지를 가볍게 톡, 톡, 두드리는 박자감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무심하고도 오만한 태도에 송만호는 퓨즈가 끊어지기 직전인 기계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팽팽하던 대치 상태를 깬 것은 거칠게 열린 리딩실 문소리였다.

드르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운 복도 공기가 리딩실 내부로 들이닥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쏠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오버사이즈 코트에 푹 파묻힌 채, 유령처럼 창백한 낯빛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썼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가녀린 턱선과 초점 없이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는 숨길 수 없었다.

과거 '천재 아역 스타'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온갖 악의적인 루머와 소속사의 학대에 시달리며 무너져 가고 있는 배우. 한여름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리딩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한여름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는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코트 자락을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손톱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얇은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현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회귀 전, 그녀가 어떻게 파멸했는지 도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타더스트가 설계한 마약 스캔들의 희생양이 되어, 가장 찬란해야 할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천재.

그녀가 지금, 제 발로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스스스스─.

갑자기 도현의 망막 위로 붉은색 노이즈가 내려앉았다. 심장 박동이 고동치며 귓가를 때렸고,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인터페이스가 허공에 떠올랐다.

================================== [연기 잔고 원장 (Acting Ledger) - 활성화] ▶ 대상자: 한여름 (24세 / 배우) ▶ 상태: 중증 불안 장애, 약물 의존 초기, 정신적 가스라이팅 상태 ▶ 운명 경로: 3일 뒤 스타더스트 주도 마약 및 성상납 음모 희생 예정 ▶ 파멸 확률: 99% ▶ 보유 재능: [천재적 감수성 (S)], [한계 돌파 몰입 (A+)] ▶ 리스크 가치: 450,000pt (인수 시 즉시 획득 및 부채 등록) ==================================

붉게 점멸하는 경고 문구가 도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파멸 확률 99%. 붉은 글씨는 마치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도현의 시선이 원장 화면의 하단 구석으로 향했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회색빛 옵션이 반짝이고 있었다.

[특수 연계 옵션: 싱크 공명 (Sync-Resonance) - 비활성화] * 해제 조건: 대상자와의 영혼의 깊이가 일치하고, 리스크 완전 인수 후 극적인 상호작용 성공 시 개방. * 효과: ???

‘싱크 공명…….’

도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직은 사용할 수 없는 잠겨진 기능이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기운만큼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이 옵션을 활성화할 수만 있다면, 백현석의 거대한 카르텔을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여름이라는 이 위태로운 영혼을 구원해야 했다.

“어머, 여름 씨 왔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봐?”

리딩실 한편에 앉아 있던 중견 배우 한 명이 가식적인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한여름은 그 인사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겨우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의 카펫 무늬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칼날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송만호 실장은 한여름이 들어오자 도현을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름아, 늦었네. 몸 관리 잘하라고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잖아. 대표님이 너 걱정 많이 하셔. 대본은 제대로 읽고 왔지?”

그 부드러운 목소리 이면에 숨겨진 노골적인 감시와 압박. '대표님'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한여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백현석의 가스라이팅이 그녀의 영혼을 얼마나 깊게 좀먹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도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회귀 전, 자신 역시 저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저렇게 서서히 말라 죽어갔다. 스스로의 감정을 좀먹고 손톱을 살 속으로 파고들며 자해적인 연기 강박에 시달렸던 기억이 도현의 영혼을 자극했다.

‘더는 두고 보지 않아.’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거친 소리가 조용하던 리딩실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도현에게로 쏠렸다. 송 실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은 그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일정한 걸음걸이로 한여름을 향해 걸어갔다.

벅, 벅, 벅.

운동화를 신은 발걸음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묵직하게 리딩실 바닥을 울렸다. 한여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불안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에 도현의 단단한 실루엣이 담겼다.

도현은 한여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차갑게 식어 있는 오른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

한여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도현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억지로 힘을 주어 빼내려 하자, 도현이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몸을 숙여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아주 은밀했으며,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기묘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여름 씨.”

“이, 이거 놓으세요…….”

한여름의 목소리는 모기 울음소리처럼 가냘팠다.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도현의 돌출 행동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송 실장의 얼굴이 다시금 험악하게 구겨졌다.

“서도현, 네놈이 미쳤구나! 당장 그 손 안 놓아?”

송 실장이 소리치며 다가오려 했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여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냉소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속에는, 그녀의 고통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있다는 깊은 동질감과 처절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도망치고 싶잖아.”

도현의 한마디가 한여름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관통했다.

“……네?”

“백현석이 쳐놓은 거미줄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매일 밤 약 없이는 잠들지도 못하잖아. 그 인간들이 당신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잖아.”

한여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소속사의 철저한 감시 아래 숨겨왔던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두려운 비밀을, 눈앞의 이 신인 배우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읊조리고 있었다.

“당신……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나도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니까.”

도현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자신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핏방울이 베어 나올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강박적인 통증이야말로,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선택해, 한여름.”

도현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타고 뇌리에 박혔다.

“이대로 저들이 설계한 시나리오대로 무대 뒤편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끊을 건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저 가식적인 무대를 통째로 불살라 버릴 건지.”

“서도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송 실장이 도현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한여름의 눈에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도현의 손을 마주 꽉 쥐었다. 그 가냘픈 손가락에 실린 힘은,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비명이자 구원의 요청이었다.

“살려…… 주세요.”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오직 도현만이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도현의 가슴 속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조건 충족: 대상자 '한여름'의 자발적 동의가 확인되었습니다.] [연기 잔고 원장 - '한여름'의 파멸 리스크 매입을 시작합니다.]

우웅─!

도현의 시야를 채운 붉은 화면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시스템 창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리스크 인수 규모: 450,000pt (마약 스캔들, 정신적 가스라이팅, 사회적 매장 리스크 전량)] [인수 대가 적용: 대상자의 우울증 및 공포 트라우마가 싱크율만큼 사용자의 정신에 즉시 전이됩니다.] [현재 싱크율: 35%] [계약을 체결하시겠습니까?]

도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경고장과 대가에 대한 안내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동료를 구원하고, 그들을 파멸로 이끈 스타더스트를 짓밟는 것. 그것만이 그가 회귀한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계약, 체결해.’

도현이 마음속으로 외침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계약 버튼이 강렬한 붉은 빛을 뿜어내며 부서졌다.

콰아아앙!

실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도현의 뇌리에는 거대한 폭발음이 몰아쳤다.

“어윽……!”

도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한여름의 영혼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하고 시커먼 감정의 덩어리가 도현의 가슴속으로 사정없이 말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사방이 꽉 막힌 독방에 갇힌 채 서서히 목이 졸리는 듯한 극심한 질식감, 언제 자신을 향해 칼날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그리고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듯한 환청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도현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며 시야가 흐려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것이 리스크 인수의 대가였다. 타인의 파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겪어야 하는 영혼의 자해.

하지만 도현은 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연기 세포들이 미친 듯이 깨어나며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야! 서도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송 실장이 마침내 도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러나 그 순간, 도현의 손을 잡고 있던 한여름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여, 여름아? 여름아!”

송 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여름은 도현의 손을 놓지 못한 채,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꺾으며 도현의 넓은 어깨 위로 툭 쓰러졌다. 그녀의 숨소리는 극도로 가빠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호흡과 급성 공황 발작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한여름 씨가 기절했어!”

리딩실 내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감독과 작가, 그리고 수십 명의 배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도현은 자신의 어깨에 쓰러진 한여름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공포와 트라우마는 도현의 혈관을 타고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헤집어 놓고 있었다. 눈앞이 붉게 번지며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안 돼,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야.’

도현은 어금니를 짓씹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그는 자신을 포위하듯 에워싸는 송 실장과 스타더스트 직원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하지만 한여름의 갑작스러운 실신과 도현의 머릿속을 헤집는 극심한 부작용은, 리딩 시작 직전인 이 현장을 전혀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도현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는 가운데, 리딩실 문을 열고 또 다른 인물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SBC 드라마국의 국장이자, 이번 작품의 운명을 쥔 핵심 인물이었다.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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