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도가 타들어 가는 감각은 지독하리만큼 선명했다.


입안을 가득 채운 약물의 금속성 비린내, 사방을 가득 메운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 그리고 귓가를 찢어발기던 기자들의 아우성.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에게 주어지는 연기대상 트로피를 손에 쥐기도 전에, 서도현은 스타더스트가 설계한 추악한 덫에 걸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현아,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마지막 순간까지 귓가를 맴돌던 스타더스트 대표 백현석의 부드럽고 가혹한 목소리. 그 가스라이팅의 족쇄에 묶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2036년의 그 밤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야, 서도현. 정신 안 차려?”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도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들이쉬는 숨끝에 묻어나는 것은 가혹한 독약의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 텁텁하게 가라앉은 먼지, 그리고 싸구려 믹스커피 향이 뒤섞인 밀폐된 공간의 공기. 도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사방이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들었다.

얼룩덜룩한 회색 방음벽, 기다란 원목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어지럽게 널린 대본들. 테이블 정중앙에 선명하게 박힌 글자가 도현의 망막을 찔렀다.
[SBC 수목 미니시리즈 <태양의 궤도> 대본 리딩]

SBC 방송국 제3대본 리딩실이었다. 도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20대 초반의 손바닥. 살 속을 파고드는 자해의 흔적도, 마약 혐의로 묶였던 수갑의 차가운 감촉도 없었다.

2026년 3월 2일.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신인 시절의 첫 대본 리딩 날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귀가 먹었나. 사람 말을 귓등으로 처들어?”

두꺼운 손가락이 도현의 어깨를 거칠게 짓눌렀다.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의 몸에서 지독한 담배 찌든 내가 풍겼다.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실장, 송만호였다. 백현석의 충직한 사냥개이자, 신인 시절 도현의 영혼을 가장 먼저 갉아먹었던 장본인.

송만호는 도현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변의 다른 조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목소리는 낮았지만 뼈가 시릴 만큼 악의적이었다.
“오늘 리딩에서 네가 맡은 ‘시우’ 역할, 대사 치지 마라. 대충 목이 쉬었다고 핑계 대고 대본만 조용히 넘겨.”

도현의 눈동자가 송만호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차갑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에 송만호의 험악한 얼굴이 담겼다. 그 무감각하고도 깊은 시선에 송만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멈칫했다. 평소 같으면 어깨를 움츠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해야 할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현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다 겪고 돌아온 망령의 그것처럼 깊고 서늘했다.

“이유가 뭡니까.”
도현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기이하게 들렸다.

“이유? 하, 이 새끼 봐라? 대가리가 컸다 이거지?” 송만호가 비죽 실소를 흘리며 도현의 어깨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가죽을 뚫고 도현의 어깨뼈를 압박했다. “백 대표님이 결정하신 일이다. 이번 작품, 우리 기획사에서 새로 밀어주는 민우 알지? 그 녀석이 스케줄 꼬여서 서브 남주 자리를 놓쳤어. 대신 이 배역으로 들어가서 이미지 세탁 좀 해야 하니까, 너는 조용히 빠져. 넌 다음 작품에 더 좋은 거 꽂아줄 테니까.”
지독하게 익숙한 가스라이팅이었다.

‘너는 아직 부족해.’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기획사의 말을 들어야 네가 살아남아.’
회귀 전의 서도현은 그 감언이설과 협박에 속아 자신의 기회를 매번 양보했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발연기 배우로 낙인찍혀, 결국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도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고문하듯 제 살을 짓누르는 고질적인 강박 증세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웅—!
귓가를 때리는 이명과 함께, 도현의 시야 전체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눈앞의 공기가 일그러지더니,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투명하고 거대한 장부가 물질화되어 떠올랐다. 가죽으로 제본된 고풍스러운 책의 표지에는 금색의 활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연기 잔고 원장 (Acting Ledger)]
도현의 호흡이 멎었다. 눈을 깜빡여도 붉은 장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페이지를 스르륵 넘기며, 도현의 눈앞에 기묘한 텍스트들을 띄워 올렸다.

[소유주: 서도현] [현재 잔고: 0 AP (Acting Point)] [보유 리스크: 없음]
[알림: 당신은 회귀의 대가로 타인의 연기 수명과 불행을 거래할 수 있는 ‘원장’의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 경고: 계약 조건(대상자 구원)을 이행하지 못할 시, 소유주는 자신의 목소리를 영구히 잃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방대한 정보에 도현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원장의 붉은 빛줄기가 리딩실 내부를 훑더니, 테이블 건너편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여배우의 머리 위로 멈춰 섰다.
창백한 안색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대본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 훗날 마약 스캔들에 휘말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될 천재 배우, 한여름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붉은색 글씨로 경고창이 떠 있었다.
[붕괴 예정자 감지] - 대상: 한여름 (23세) - 현재 상태: 스타더스트의 가혹한 스케줄 및 약물 강요로 정신적 붕괴율 78% - 파멸 리스크: ‘마약 투약 및 심리적 폐사’ (예정일: 2026년 3월 15일) - 인수 가능 리스크 등급: A - 인수 시 혜택: 대상자의 잠재 연기력 100% 개화 및 상호작용(앙상블) 효율 극대화. - 인수 대가: 대상자의 우울증 및 공황 장애 증상이 싱크율만큼 소유주의 정신에 영구 누적.

도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타인의 연기 수명과 불행을 매입한다. 그들의 파멸 리스크를 내가 인수하는 대신, 그 재능을 완벽히 통제하고 해방한다.
지독하고 가혹한 거래였다. 남의 지옥을 스스로 뒤집어써야만 가동되는 힘. 가뜩이나 가스라이팅의 상처로 문드러진 도현의 정신에 타인의 우울과 광기까지 얹는다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어차피 이전 생의 나는 이미 지옥에서 살다 죽었다.’

도현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백현석의 밑에서 숨도 못 쉬고 말라 죽어가던 그 비참한 삶으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타인의 불행을 삼키는 괴물이 되는 편이 나았다.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재능을 나의 무기로 삼아, 스타더스트라는 거대한 괴물을 밑바닥에서부터 씹어 삼키리라.

도현은 가슴을 쥐어짜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송만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서도현. 내 말 안 들려? 대답 안 해?” 송만호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도현의 셔츠 깃을 구겨 잡았다. 주위의 몇몇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송 실장. 리딩 시작해야 하는데 왜 자꾸 신인 기를 죽이고 그래?” 멀리서 조연출이 핀잔을 주듯 한마디 던졌지만, 송만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도현만을 압박했다.
“도현아. 네가 아직 판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 바닥에서 백 대표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대본 한 줄 못 읽고 평생 단역만 전전하다 끝나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게 네가 살길이야.”





부드러움을 가장한 악랄한 협박. 회귀 전의 도현은 이 순간,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손으로 대본을 덮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도현은 달랐다.

“송 실장님.” 도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 방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듯한 이질적인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뭐?” 송만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현은 천천히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송만호의 두꺼운 손목을 움켜쥐었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윽……!” 송만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현의 손아귀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겉보기에는 마른 체구의 신인 배우에 불과한 녀석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송만호는 손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놔, 이 새끼야……!” “이 배역은 제가 오디션을 보고, 정당하게 감독님과 작가님의 선택을 받아 따낸 배역입니다.” 도현이 송만호의 손을 천천히,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송만호의 손이 허공에서 보기 좋게 팽개쳐졌다.
짜악—!
손을 쳐내는 마찰음이 고요한 리딩실 내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주변에 앉아 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구석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대본만 보던 한여름의 눈동자 역시 흔들리며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서두르지 않고, 구겨진 자신의 셔츠 깃을 정교하게 털어냈다. 그의 손놀림 하나하나에는 기품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기획사의 이익을 위해 제 노력을 헐값에 넘기라는 말씀이신가요?” 도현의 목소리가 리딩실 전체에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도 정식 계약서 한 장 없이, 오직 ‘구두 지시’라는 명목하에 말입니다.”
“너…… 미쳤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소리를 높여!” 송만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도현을 코너로 몰아넣고 조용히 해결하려 했으나, 도현이 판을 키워버린 것이다.
“소리는 실장님이 먼저 높이셨죠.” 도현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아래로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여유였다.

“이 자리는 SBC의 공식적인 대본 리딩 자리입니다. 스타더스트의 사적인 양보 협상 테이블이 아닙니다. 만약 제 배역을 다른 배우에게 넘기고 싶으시다면, 이 자리가 아니라 감독님과 작가님을 공식적으로 설득하고 오십시오.”
“서도현!” 송만호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뺨을 후려칠 기세였다.
하지만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가 송만호의 귀에 아주 낮고,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삭였다.
“백현석 대표님께 전하십시오. 가스라이팅은 대상을 봐가면서 하라고.”

송만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 그리고 감히 소속사 대표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도현의 오만함. 송만호는 눈앞의 청년이 자신이 알던 어리숙한 신인 서도현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 너 진짜 매장당하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송만호가 이빨을 갈며 읊조렸다.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오늘 이 리딩 끝나고 보자. 네놈이 이 바닥에서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 손으로 널 완전히 묻어버릴 테니까.”
그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도현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도현은 천천히 리딩 테이블의 최고 상단 구석,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째려보는 송만호를 향해, 대본을 툭툭 치며 무심히 비웃어 주었다.

“묻을 수 있다면, 어디 한번 묻어보시든가요.”
리딩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송만호는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도현을 노려보았고, 도현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대본의 첫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붉게 빛나는 ‘연기 잔고 원장’의 페이지가, 도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연기가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