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털썩.

실기 시험이 끝난 연무장 구석. 당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척 연기하는 중이다.

'휴, 훌륭한 비비기였다.'

방금 전 보여준 버그성 마나 충돌과 벽 뚫기 기행. 남들 눈에는 목숨을 건 비기(祕技)나 천재의 깨달음처럼 보였겠지만, 본질은 그저 물리 엔진의 허점을 파고든 고인물의 날먹 플레이일 뿐이다.

그때,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은추(隱錐)... 아니, 기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차가우면서도 맑은 목소리. 고개를 들자, 은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당신을 내려다보는 소녀가 서 있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자이자, 대공가의 영애. 유리엘 폰 에델가르트.

그녀의 타오르는 듯한 자안(紫眼)이 당신을 꿰뚫어 보듯 빛나고 있었다.

"방금 보여준 그 보법. 마력을 역류시켜 순간적인 가속을 얻는 방식... 상식적인 기사라면 심장이 터져 죽었을 엄중한 금기야."

유리엘이 한 걸음 다가온다.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은은한 백합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너는 멀쩡하지. 아니, 오히려 가장 효율적인 궤적으로 움직여 벽 뒤의 사각지대까지 선점했어."

'그거 그냥 판정 박스 버그로 맵 뚫은 건데.'

물론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눈치가 없진 않다. 당신은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인물 특유의 '음, 다 내 계산대로지' 포커페이스다.

유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낙제생의 탈을 쓴 '숨겨진 절대 고수'. 그녀의 머릿속에서 당신의 존재는 이미 그렇게 격상되어 있었다.

"역시... 일부러 낙제생 행세를 하며 힘을 숨기고 있었군."

정확한 오해다. 아주 바람직한 전개다. 유리엘은 품 안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마법 카드를 꺼내 당신에게 내밀었다.

[아이템 정보] | 분류 | 상세 내역 | | :--- | :--- | | **아이템명** | 에델가르트 가문 전용 '킹덤 시뮬레이터' 자유 이용권 | | **등급** | SSR (비매품) | | **효과** | 특수 던전 환경 구현, 마수 데이터 100% 동기화, 경험치 획득량 200% 증가 | | **설명** | 대공가 직계 가문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급 가상 현실 훈련 장치. |

"이걸 너에게 줄게."

유리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델가르트 가문은 언제나 재능 있는 자를 환영해. 나와 동맹을 맺자, 서지한. 대신 이 시뮬레이터로 네 진짜 실력을 내게 입증해 보여."

황금 같은 기회다. 인게임 시절, 흔한 무과금 유저는 입장조차 불가능했던 극악의 효율을 자랑하는 비밀 훈련 가상 던전. 그곳의 보스들을 사냥하면 초반 부스팅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그 순간, 연무장 반대편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유리엘. 에델가르트의 품격을 떨어뜨리며 저런 천박한 평민 놈과 어울리는 건가?"

화려한 금빛 갑옷을 입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사내. 황실 방계 가문의 자제이자, 아카데미의 대표적인 꼰대 귀족 '바르토'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르토의 눈에는 당신이 유리엘에게 꼬리를 치는 기생충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당신의 콧대를 향해 거칠게 조준된다.

유리엘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동시에 당신의 귓가에 시스템 알림음이 맑게 울려 성질을 긁는다.

[돌발 퀘스트 발생!] - 목표: 눈앞의 뻔한 클리셰 빌런을 참교육하시오.

눈앞에 두 갈래의 완벽한 성장 루트가 펼쳐졌다.

이대로 유리엘의 호의를 받아들여 비밀 훈련 장치로 들어가 폭풍 성장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귀찮게 구는 오만한 귀족 놈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시작할 것인가.

선택은 오직 당신의 몫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