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두컴컴한 틈새를 비집고 도달한 곳.

그곳에는 게임 속 그 어떤 공식 맵에서도 구현되지 않은 기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진 채, 보랏빛 텍스처 오류 코드가 사방에서 비처럼 흘러내리는 기묘한 공간.

이곳이 바로 개발진마저 쓰레기통에 처박고 잊어버린 똥망겜의 최종 미회수 떡밥.

‘잊혀진 깊은 심연’입니다.

당신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깁니다.

당신의 시선 끝에, 거대한 백색 대리석 왕좌와 그 위에 군림한 거대한 형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철컹.

철커렁.

녹슨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듯한 기괴한 소음과 함께, 거인의 붉은 외눈에 불이 들어옵니다.

[시스템 알림!] ▶ 히든 보스, '심연의 설계자: 아라크네(A-09)'와 조우했습니다!

상태창을 한번 띄워 볼까요? 깔끔하기 짝이 없는 적의 스펙이 허공에 정렬됩니다.

━━━━━━━━━━━━━━━━━━━━━━━━━ [심연의 설계자: 아라크네 (Lv. 99)]

· 분류: 인공지능 자율 방어 시스템 (더미 데이터) · 체력: 9,999,999 / 9,999,999 · 특수 기믹: [절대 신성] - 모든 통상 피해 99.9% 감소. · 특이사항: 정상적인 공략 불가. (개발자 코멘트: "이거 어떻게 잡음? 복사 버그 쓰셈 ㅅㄱ") ━━━━━━━━━━━━━━━━━━━━━━━━━

어처구니없는 스펙입니다.

기획자가 야근하다가 빡쳐서 대충 복사-붙여넣기로 창조한 것이 분명한 미친 수치.

실제로 이 보스는 과거 유저들 사이에서 '유사 게임 판독기'라 불렸습니다.

아이템을 무한 복사하는 악마적인 버그를 쓰지 않으면 스크래치조차 낼 수 없도록 설계된, 그야말로 이 세상의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10년 동안 이 똥망겜의 썩은 물을 남김없이 빨아먹은 당신에게는, 이 황당무계한 보스조차 그저 그리운 옛 추억의 한 페이지일 뿐입니다.

"오랜만이네, 이 똥덩어리 녀석."

당신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비틀려 올라갑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버그나 꼼수가 없이는 절대 깰 수 없는 통곡의 벽.

하지만 고인물의 대가리 속에는 세상을 파괴할 일급 영업비밀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쿵! 쿵! 쿵!

서서히 당신의 눈앞으로 다가서는 아라크네의 거구.

그 주위로 치명적인 에러 코드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스윽.

당신은 가볍게 손가락을 풉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뚜둑 소리를 내며 실전 태세를 마칩니다.

심장이 빠르게 뜁니다. 긴장감이 아닌, 극상의 재미를 앞둔 흥분 때문입니다.

당신은 인벤토리를 열었습니다.

이제 이 깡패 같은 보스를 사뿐히 즈려밟아 줄 차례입니다.

스마트하게 시스템의 허점을 찔러 인공지능의 대가리를 깨버릴 것인가.

아니면 고인물 특유의 썩은 손가락 피지컬로 절대적인 힘의 격차를 찢어발길 것인가.

당신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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