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백가(白家)의 마지막 핏줄을 보존하려던 푸른 진기가 격동한다. 만독탄의 지독한 유독과 수문장들의 검림(劍林)을 뚫고 들어선 적의 심장부. 그 깊고 어두운 지하 비고(秘庫)의 공기는 비정하리만큼 차갑고 무겁다. 사방을 채운 고요는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무덤에 들어선 듯 쓸쓸한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당신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비고의 가장 은밀한 심처다. 그곳, 자색 석대 위에 부유하는 한 덩이의 검붉은 광린(光燐). 그것은 구천의 원혼과 마도의 사악한 기운을 농축해 만든 ‘태음마단(太陰魔丹)’이다. 뿜어져 나오는 흑색의 예기가 당신의 살갗바람을 타고 스쳐 갈 때마다, 단전 깊은 곳에 은거하던 정종(正宗)의 진기가 극렬하게 반발한다. 고귀한 백가의 기운은 침범해 오는 악의(惡意)에 한 줄기 청량한 매화향처럼 맞서려 하나, 마단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압도적이다.

흘러나오는 마기는 달콤한 밀어와도 같다. 그것은 육신을 단숨에 재구축하고, 수십 년의 수련으로도 도달하기 힘든 극천(極天)의 폭발력을 보장하는 금단의 열매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린 고독과 가문 멸망의 한(恨)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불타는 전각들, 피 흘리며 스러져간 혈육들의 비명이 귓가를 어지럽힌다. 심마(心魔)의 덫이다.

"나를 삼켜라. 그러면 하늘을 찢고 원수들의 목을 네 발아래 바치리라."

환청인지 코앞에 다가온 마단의 울림인지 모를 가혹한 유혹이 영혼을 뒤흔든다. 이를 수용한다면 영혼을 마도에 팔아넘기는 광마(狂魔)의 길을 걸을 터이나, 순식간에 원수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손에 쥐게 된다. 반대로 거부하고 백가의 순수한 검에만 의지한다면, 눈앞을 가로막은 무수한 적들의 장벽을 혈혈단신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 길은 고독하고도 아득한 가시밭길이리라.

당신의 손끝이 공중에 뜬 태음마단을 향해 서서히 뻗어 나간다. 손가락 끝에 닿은 흑색 안개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가슴속 복수의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검붉은 업화(業火)와 백가의 은빛 기운이 당신의 두 눈동자 속에 교차하며 소리 없이 격돌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비고 안에서, 오직 당신의 옷자락만이 사정없이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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