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大殿)에 감도는 침묵은 심연의 바다보다 무겁고 차갑다. 갈라진 석벽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피비린내를 품고 서늘하게 당신의 뺨을 스친다. 만경창파(萬頃蒼波)와 같던 당신의 단전은 이미 거친 역류로 요동치고 있다. 각혈을 겨우 참아낸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쇠 맛이 번지고, 검을 쥔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필생의 원한이 집결된 이곳, 무극신종(無極神宗)의 대전 한가운데에서 당신은 마침내 그토록 차갑게 그렸던 자와 마주한다.
어둠을 찢고 나타난 무극신종의 영수, 독고패(獨孤霸). 그의 기세는 흡사 만고의 태산처럼 웅혼하면서도, 그 이면에 품은 살기는 깊고 음습하다. 칠흑 같은 장포를 걸친 그의 눈빛에는 승자의 오만함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당신의 흔들리는 시선은 그 자의 손끝에 닿아 멈춘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쇠사슬 끝에는 한 명의 여린 형체가 처참한 몰골로 무릎 꿇려 있다.
희미한 등불 아래 드러난 인질의 얼굴. 땟물과 피가 얽힌 얼굴 속에서도 선명하게 비치는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백 씨 가문의 골상(骨相)이다. 이마에 새겨진 가문의 자흔과 은은히 빛나는 영롱한 눈동자. 당신의 기억 속에 슬픈 화인처럼 박혀 있던, 가문의 마지막 혈육이 틀림없도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태로움 속에서, 목덜미를 파고드는 푸른 식검(飾劍)의 예리한 날끝이 달빛을 받아 스산하게 흔들린다.
"백무린, 마침내 예까지 기어왔구나."
독고패의 거친 웃음소리가 기둥을 울리며 대전에 메아리친다. 비열한 조소가 그의 입꼬리를 거칠게 뒤틀어 놓는다.
"네놈이 은거하며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한 이유가 오직 이 복수를 위함이라 하였더냐? 허나 보거라. 네놈 가문의 비참한 생령(生靈)이 아직 내 손끝에서 숨을 쉬고 있음을."
그가 손목을 비틀자, 날카로운 검날이 가늘고 하얀 목덜미를 조금 더 깊이 파고든다. 한 줄기 선혈이 붉은 실 선을 그리며 하얀 살결을 타고 흘러내린다. 인질은 고통 속에서도 눈물을 삼키며 당신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애원도 원망도 아닌, 그저 가문이 가졌던 고결한 체념을 품고 있다.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은혜를 베풀어 이 자의 기혈을 폐한 채 숨만은 붙여둘 터이니. 가문의 마지막 잔불을 이어갈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함께 영면할지 스스로 택하라."
가문의 파멸이라는 만고의 통한이 눈앞의 참경으로 되살아나 당신의 이성을 잠식한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분노는 억누를 길 없고, 폭주하는 내력은 당장에라도 장부를 찢고 나올 듯 날뛴다. 백골이 진토되더라도 가문의 자존을 지키고 원수를 칠 것인가, 비굴함을 무릅쓰고 눈앞의 핏줄을 구하기 위해 검을 놓을 것인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마저 얼어붙은 듯한 조용한 정적 속에서, 당신은 무겁게 가라앉은 검자루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