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추우(秋雨)가 대숲을 적시는 밤은 지독히도 고요하다. 죽음의 문턱을 갓 넘어선 청성파의 후계자, 사청운(司靑雲)의 숨소리가 가쁜 맥박을 따라 고동친다. 그의 전신에서는 짙은 혈향(血香)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쇠락의 기운이 풍긴다. 한때 기세등등하게 천하를 호령하던 삼대 세가의 마지막 핏줄이라 하기엔 지극히 초라하고 쓸쓸한 형색이었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모습에서 당신은 수십 년 전, 홀로 살아남아 명맥을 보존해야 했던 가문의 참혹한 풍경을 겹쳐 본다. 동병상련(同病상憐)의 비애가 가슴 깊은 곳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이 은혜는... 백골이 진토되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사청운이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적인다. 품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피와 무인의 원한으로 얼룩진 한 장의 밀서이자 비도(祕圖)였다. 낡은 명주 천에 먹과 피로 정교하게 그려진 형세도는 무극신종(無極神宗)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목을 뚜렷이 가리키고 있었다. 그 지도를 받아드는 당신의 손끝에 차가운 빗방울이 번진다. 칼끝에 맺혀 흐르는 빗물이 마치 천하의 애환을 품은 무인들의 눈물과도 같다.

"무극신종의 본산은 거대한 요새와도 같습니다. 특히..."

사청운은 핏발 선 눈으로 당신의 안광을 마주한다. 그의 거친 숨결에는 생사를 넘나든 자 특유의 음험한 한기가 서려 있다.

"정문으로 통하는 사잇길에는 무색무취의 함정들이 가득합니다. 일진의 바람조차 스치지 않는 고요 속에서, 침입자의 기혈을 녹여버리는 음험한 진법과 독무가 깔려 있지요. 가벼운 발걸음조차 불귀(不歸)의 객으로 만드는 죽음의 덫입니다. 다만..."

그는 지도의 한편, 기괴하게 뒤틀린 산맥의 밑바닥을 가리킨다.

"종파의 시체들이 버려지는 지하 수로(地下水路)가 있습니다. 그곳은 썩은 물과 원혼의 한이 서린 음산한 곳이나, 경계가 비어 있으니 우회하기에 이보다 좋은 길은 없습니다. 허나 그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밀서를 쥔 당신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밤바람이 불어와 도포자락을 사납게 뒤흔든다. 눈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다. 심연의 밑바닥을 기어 흐르는 차가운 물줄기를 따라 은밀하게 검을 겨눌 것인가, 아니면 한 모금의 타협도 없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솟구치는 번개처럼 정면의 함정을 송두리째 베어 넘길 것인가.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며 대지의 침묵을 두드린다. 선택의 시간이 검날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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