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을 깨는 것은 오직 밤하늘을 적시는 차가운 장수(長雨)의 낙수 소리뿐이다.
철검방(鐵劍坊)의 분타 초입, 붉은 피가 빗물에 희석되어 마당을 은은하게 물들인다. 당신의 걸음걸이는 바람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고요하고 침착하다. 삼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무림의 역사 뒤편에 묻혀 있던 가문의 복수심이, 이제 막 고개를 치켜든 고고한 학(鶴)처럼 서늘한 검날 위에 서린다.
"침입자다! 장도를 들어라!"
악을 쓰며 달려드는 철검방 무사들의 기세는 사나웠으나, 당신의 감각을 자극하기에는 너무도 무디다. 당신은 그저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검을 내뻗을 뿐이다. 검끝이 그리는 궤적은 가을날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와 닮아 있으되, 그 끝에 서려 있는 것은 오직 적막한 죽음의 서리다.
서사(逝者)는 흐르는 물과 같아 붙잡을 수 없는 법. 가볍게 휘둘러진 검기가 청량한 비바람처럼 마당을 휩쓸고 지나간다. 찰나의 섬광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무사들이 가을날 낙엽처럼 바스러져 쓰러진다. 혈화(血花)가 난분분히 흩날리는 풍경 속에서, 당신의 백색 옷자락에는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았다. 이 압도적이고도 비장한 무력의 격차 앞에서 무사들의 생명은 그저 촛불 앞의 눈송이처럼 참담하게 녹아내릴 뿐이다.
"이, 이럴 수는 없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분타주의 방 한구석, 호사스러운 호피 의자 뒤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사내의 가뿐 숨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한때 이 지역의 밤을 지배한다 자부했을 철검방의 분타주는, 이제 무릎뼈가 으스러져라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원수들의 하부 조직다운 비루함이자 사냥개들의 처참한 종말이다.
"살려다오! 내, 내 아는 모든 것을 말하겠다! 우리를 뒤에서 조종하는 무극신종(無極神宗)의 핵심 장로이신 독고 성 어른께서 머무시는 비밀 거점이 있다! 낙양 동쪽, 안개 자욱한 귀곡(鬼谷)의 기문둔갑 뒤편... 비틀린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면 그분이 계신다! 제발 목숨만은...!"
공포에 질린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쏟아내는 정보는 멸문당한 당신 가문의 원수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뜻밖의 길잡이가 된다. 단전 깊은 곳, 삼십 년의 고독 끝에 얻은 기연인 겁천정화(劫天精華)가 격렬히 요동치며 복수의 타오르는 갈증을 부추긴다. 이자의 목숨줄을 끊는 것은 부질없는 먼지를 터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빗소리가 한층 더 거세어진다. 당신의 서늘한 시선이 바닥에서 벌벌 떠는 사내를 고요히 내려다본다. 원수들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출두한 복수의 여정, 그 첫 번째 기로가 빗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문 뒤에 숨은 장로의 목을 먼저 베어 원수들의 수족을 자를 것인가, 아니면 이따위 잔챙이들의 우두머리는 안중에 두지 않고 곧장 무극신종의 총본산으로 진격할 것인가. 고독한 바람이 당신의 옷자락을 차갑게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