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영원의 불빛이 흩뿌려진 기루, 풍향각(風香閣)의 밤은 깊어만 간다. 붉은 휘장 너머로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와 사내들의 비틀거리는 웃음소리는 풍진(風塵) 세상의 덧없음을 노래하듯 애처롭다. 그러나 그 난잡한 야연(夜宴)의 이면,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밀실의 한구석에 당신이 서 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은 강산도 바꾸었으나, 가슴속에 새겨진 멸문의 한(恨)은 한 자루 예리한 고검(古劍)처럼 날카롭게 갈려 있을 뿐이다. 당신의 호흡은 미풍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가늘고도 깊다. 단전에서 일렁이는 겁천정화(劫天精華)의 기운이 차가운 한밤의 공기와 부딪혀 미세한 파동을 그리지만, 범인(凡人)의 눈에는 그저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일 뿐이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침묵을 깨뜨린 것은, 장막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밀어(密語)였다. 가문의 원수인 무극신종(無極神宗)의 비호를 받는 자들의 목소리다.
"청성(靑城)의 마지막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았다더군." "삼대 세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성파의 후계자라… 가문의 비기(秘器)이자 우리 신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천기(天機)의 열쇠를 쥐고 있다지." "이미 본 종의 추살대(追殺隊)가 그 뒤를 쫓고 있다. 낙엽이 지기 전에 그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터."
청성파. 과거 당신의 가문인 백가(白家)와 함께 강호를 호령했으나, 무극신종의 잔혹한 마수에 송두리째 짓밟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명문. 그 마지막 핏줄이 지금 사지의 경계에서 헐떡이고 있다는 첩보였다. 그가 가졌다는 비기는 결국 당신이 가야 할 복수의 길에 절대적인 열쇠가 될 터였다.
순간, 당신의 가슴 한구석에서 가라앉아 있던 복수의 겁화(劫火)가 요동친다. 삼십 년 전, 붉은 피로 물들었던 가문의 대지에서 홀로 살아남아 울부짖던 어린 날의 기억이 청성파 후계자의 운명 위로 쓸쓸하게 겹쳐 흐른다. 기연을 얻어 천하를 흔들 힘을 쥐었으나, 인연의 실타래는 여전히 무겁고도 질기게 당신의 발목을 휘감는다.
밀실을 비추던 촉광이 흔들리며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청성파의 후계자를 쫓는 추살대원들의 살기가 먼 밤바람을 타고 당신의 감각에 닿아온다.
동질감과 무인으로서의 의기(義氣)에 이끌려 그 가련한 불씨를 구원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복수라는 대업을 위해 그 불씨조차 차가운 미끼로 삼아 원수들의 숨통을 낚아챌 것인가. 잠시 멈추었던 검 자루가 당신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전율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