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서리가 내린 오야검(烏夜劍)의 검신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른다. 그것은 가을날 밤, 찬 서리를 맞고 떨어지는 낙엽의 무위(武威)이자, 수십 년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당신의 일생이 도달한 마지막 극의(極意)였다.
스윽.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기세로 대전을 짓누르던 마수의 형상이, 소리도 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기괴하게 뒤틀린 독고패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고, 그 목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혈우(血雨)가 허공을 적신다. 마침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철퇴가 내린 것이다. 가문을 멸망시키고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절대자의 종말은 허무할 정도로 고요했다.
대전에 정적(靜寂)이 찾아온다.
당신은 피로 물든 백색의 장포를 휘날리며 대전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마침내 대수(大讐)를 베고 원한을 설분(雪憤)하였건만, 왜일까.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승리의 감격이 아닌, 뼛속까지 시려 오는 공허함뿐이다.
"지독하구나, 강호의 인연이라는 것이……."
나직한 혼잣말과 동시에, 당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쩍,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전설의 정화(精華)를 무리하게 이끌어 쓰며 생명력을 남김없이 불태운 대가다. 기경팔맥이 녹아내리고, 단전은 이미 깨진 항아리처럼 차갑게 식어 가고 있다.
쩌적, 쨍그랑.
당신의 손에 쥐인 오야검이 맑은 파열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검날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것과 동시에, 당신의 손끝 또한 푸슬푸슬한 잿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살점이 허물어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련만, 당신의 무심한 눈동자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다.
새벽녘의 차가운 바람이 대전의 무너진 벽 틈새로 불어온다.
그 바람을 따라, 당신의 몸을 이루던 잔해들이 먼지처럼 날려 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서쪽 하늘에는 희미한 잔월(殘月)이 걸려 있고, 동쪽 하늘은 어렴풋이 푸르스름한 서광을 품고 있다.
원수들은 모두 사라졌고, 가문은 돌아오지 않는다. 피로 얼룩진 복수의 끝에 남은 것은 한 줌의 먼지와 차가운 바람뿐. 당신의 이 무모하고도 슬픈 여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당신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입가에 쓸쓸한 낙화(落花) 같은 미소가 스치듯 머물다 사라진다. 마지막 남은 숨결이 새벽바람에 실려 멀리 가 버린 옛 고향의 하늘로 흘러간다.
그렇게, 홀로 외롭게 빛나던 백무린의 검은 부서지고, 길고 길었던 무림의 밤이 깊은 침묵 속으로 침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