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이 낮게 웅크리며 우는 밤이다. 스산한 낙엽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삭막한 황야 위에 붉은 안개가 대지를 두껍게 뒤덮고 있다. 당신의 손에 쥐인 검에서는 가실 줄 모르는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검은 불길이 전신의 혈도를 타고 흐르며 이성을 완전히 불사른 지 이미 오래다.

돌아보면 그곳에는 원수들의 시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려달라 애원하던 무고한 아낙의 눈망울, 겁에 질려 울부짖던 어린아이의 가녀린 손짓이 뇌리를 스쳤으나, 마음에 깃든 광혼(狂魂)은 그들을 단지 베어 넘겨야 할 붉은 낙엽으로 여겼을 뿐이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참경 속에서 당신은 홀로 서 있다. 가문의 복수를 완수하겠노라 다짐하며 움켜쥐었던 힘은 결국 당신의 영혼을 통째로 갉아먹는 아귀가 되었다. 가문의 억울함을 씻고 의기(義氣)를 드높이겠다던 맹세는 어둠 속에 파묻히고, 오직 피에 굶주린 괴물만이 남았다.

"마두(魔頭) 백무린! 오늘이야말로 천하의 공적을 도단(屠斷)하여 강호의 명운을 바로잡으리라!"

사방을 포위한 무림맹의 마른 무인들이 뿜어내는 검기가 푸른 은하수처럼 밤하늘을 수놓는다. 수백, 수천의 검날이 당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한때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고 투명했던 백가(白家)의 검법은 온데간데없다. 지금 당신이 펼치는 초식은 그저 숨통을 끊기 위해 난도질하는 흉포한 광풍(狂風)에 불과하다. 폭풍우 속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먹구름처럼, 당신의 신형은 추잡하고도 파괴적인 궤적을 그리며 짓쳐 들어오는 칼날들을 받아낸다. 살기를 두른 검풍이 몇 포기의 잡초를 꺾듯 영웅 호걸들을 쓰러뜨리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창칼의 파도는 끝이 없다.

어느덧 피로 물든 밤하늘에 차가운 달이 걸린다. 식어가는 육신 위로 마침내 수십 자루의 은빛 병장기가 매서운 쐐기를 박듯 깊숙이 박혀온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서늘함 속에서, 당신은 비로소 일생 동안 보지 못했던 은거지의 평화로웠던 시절을 떠올린다. 바람 소리, 맑은 계곡물 소리, 그리고 꽃 향기 가득했던 무명(無名)의 숲. 어찌하여 가문을 태우던 비극의 불길에서 걸어 나와, 스스로 더 깊고 어두운 지옥의 시궁창으로 기어 들어갔단 말인가.

무고하게 쓰러진 이들의 원한 서린 목소리가 심연의 바닥에서 당신의 발목을 끌어당긴다. 협객의 의를 잃고 마도에 무릎을 꿇은 자에게 허락된 명예로운 무덤은 없다.

백무린. 은거의 고수로서 강호에 화려한 귀환을 선언했던 당신의 이름은 이제 강호를 수호한 영웅이 아닌, 미치광이 살인마귀의 명식(名式)으로 영원히 기록되리라. 밤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당신의 마지막 숨결을 거두어가고, 깊고 어두운 핏빛 암전이 시야를 온전히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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