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화산(九華山)의 백장 절벽 위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차갑고도 아늑합니다.

마침내 천지를 피로 물들였던 마도(魔道)의 원흉, 독고패의 육신이 먼지가 되어 검붉은 흙 속으로 흩어집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원한의 무게가 바람 한 줌에 실려 날아가는 순간, 당신이 쥔 백홍검(白虹劍)의 검신에 서린 푸른 검기(劍氣)는 마치 가을밤의 차가운 강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비원은 이루어졌으나, 정적만이 가득한 전잔(戰殘)의 빈터에서 당신이 마주하는 것은 사무치는 고독입니다. 가문의 파멸을 목도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걸음걸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홀로 걷는 고행과도 같았습니다. 멸문가의 마지막 핏줄이자 비급의 유일한 전승자로서 얻은 기연과 고난은, 이제 구화산 정상에 불어오는 청풍(淸風)에 씻겨 무(無)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천천히 가문의 기치를 들어 올립니다. 오래전 불타 사라진 줄 알았던, 은빛 매가 수놓아진 백씨세가(白氏世家)의 깃발이 구화산의 가장 높은 천주봉(天柱峰) 정상에 깊숙이 꽂힙니다. 펄럭이는 깃발의 소리는 마치 억울하게 구천을 떠돌던 선조들의 넋이 비로소 안식을 얻어 부르는 나직한 노랫소리와 같습니다.

그토록 고결하면서도 매서웠던 백씨세가의 고유 무공, 백하검법(白霞劍法)은 이제 단순한 살생의 도구가 아닙니다. 당신이 정화(精華)의 기연을 통해 극성으로 끌어올린 무인의 경지는, 한 줄기 은빛 은하수가 지상으로 흘러내려 만물을 보듬는 것과 같은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복수를 완성하고 난세를 평정한 당신의 위업은 만고무계(萬古武界)에 길이 남을 불세출의 신화가 됩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당신을 우러러보는 천하 군협들이 무릎을 꿇고 지극한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백씨세가의 부활을 이끈 위대한 가주이자, 어둠을 소멸시킨 강호의 영원한 수호자요, 불멸의 일대종사(一代宗師)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영예의 흔적도, 오만한 기색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저 천하를 정화하고 지켜낸 이들과, 험난한 고초 속에서도 당신의 곁에서 끝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연인의 따뜻한 시선만이 가슴으로 조용히 스며들 뿐입니다.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서산에 걸린 달빛처럼 은은한 고독 속에서, 당신은 영원히 지지 않을 무림의 성지에 우뚝 서서 마침내 검을 검집에 밀어 넣습니다. 가문은 지켜졌고, 천하는 평안합니다. 만고무계의 신화가 된 당신의 뒷모습 위로, 이른 아침의 오색 서기가 가득히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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