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성정전의 공기는 얼어붙어 있다. 승정원의 일기가 기록하지 못하는 비정식 전언들이 승지들의 손을 거쳐 실시간으로 어전에 배달된다. 명나라 예부(禮部)가 보낸 외교 전언, 즉 자문(咨文)의 먹묵은 채 마르지도 않았다.

『…조선이 사사로이 동래(東萊)에 야철지를 세우고 수백 톤급 거선을 조련함은 사대의 대의에 어긋남이라. 황제 폐하께서 친히 칙사를 파견하시어 조선의 무장 수위와 화포 주조의 실태를 점검하리니, 티끌만 한 숨김도 없어야 할 것이다.』

명나라 칙사단의 규모는 천여 명. 그들의 명분은 단순한 사찰이나, 실상은 조선이 보유한 연철 골조(軟鐵骨組) 기술과 신형 함포의 제원을 강탈하려는 속셈이다. 동래 조조창에서 건조 중인 600톤급 '경원선'은 기존 명나라 사서에 기록된 수군 복선(福船)에 비해 항속 거리가 1.5배에 달하고, 종범(縱帆) 장치를 채택해 역풍 속에서도 침로를 유지할 수 있는 가공할 성능을 지녔다. 명나라 동창(東廠)의 밀탐들이 이 괴물의 진가를 알아차린 것이다.

"대군, 상국의 분노를 사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허상을 쫓아야 하옵니까?"

조정의 중신들이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는다. 좌의정은 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세종을 바라본다.

"명나라의 대포는 삼만 문이요, 군사는 백만입니다. 저들이 동래의 조조창을 헐고 함선을 불태우라 명한다면, 우리는 그 지시에 따라 도끼를 들어야 마땅하옵니다. 그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유일한 사대의 예입니다."

세종의 깊은 눈바람이 당신에게 머문다. 비록 왕실의 서자이나 친히 공관을 내리고 대양 원정을 밀명했던 주상은, 다가오는 폭풍 속에서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도성 문밖에는 이미 명나라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색 깃발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중이다. 사찰단의 대장인 태감 임원(林苑)은 황제의 최측근으로, 변방의 군신들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악명이 자자한 자였다.

조조창의 화포와 신형 함선 설계도를 순순히 내주고 고개를 숙여 일시적인 평화를 살 것인가, 아니면 상국의 압박을 깨뜨릴 정면 돌파의 묘책을 제시할 것인가. 당신의 손끝에 닿은 서신 더미 속에서, 두 가지 정보가 번뜩인다. 북방 야인들의 수상한 동태를 담은 함경도 관찰사의 밀서, 그리고 경상도 제철소에서 갓 뽑아낸 백자 유리와 신식 천리경의 목록이다.

당신은 서서히 입을 열어 황제의 척신들을 대면할 마지막 패를 고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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