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밀리에 작성된 승정원일기의 일기(日記) 한 구절은 당신이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정량적으로 증명합니다.

`“경원아문(慶源衙門)을 서소문 밖에 설치하고, 철물 일체와 목재의 조달을 병조의 제재 없이 독자적으로 집행케 한다. 군사(軍士) 3백 명을 배속하되, 표면상 도성 수축을 위한 인역이라 칭한다.”`

주상 전하의 밀명은 신속하고도 무거웠습니다. 야철청에서 증명해 낸 신형 강철 화포의 성능—기존 청동제 황자총통 대비 중량은 32% 감소시키면서도 내압 임계치를 1.8배 이상 끌어올려 사거리를 1,200보까지 확보한 기술적 혁신—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종은 당신에게 정식 공관을 하사함과 동시에, 동해 너머 미지의 땅을 수색할 수색대, 이른바 ‘경원군(慶源軍)’의 창설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비밀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한양의 저잣거리와 궁궐의 그림자 너머로 상국(上國)인 명나라의 화리(華吏), 즉 황제가 파견한 밀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합니다.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파견된 사신단의 부사(副使), 조승경(趙承慶)이 경원아문의 사랑방을 불시에 방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새 군영이 서소문 밖에 터를 잡았다 하기에 축하를 전하러 왔소이다."

조승경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미소를 지을 뿐이나, 그의 눈빛은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대형 선박의 늑골 설계도를 훑고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시기 정화의 하해선단이 거두었던 영광을 아는 장수이자 관료인 그가, 강철 보강재를 덧댄 용골 설계의 기술적 의미를 모를 리 없습니다. 당대 명나라 강남 조선소의 최대 기술적 영 한계였던 용골 전단 파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이 도입한 ‘이중 응력 분산식 늑골 구조’는 기하학적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왜구의 준동에 대비하여 남해안의 판옥선 몇 척을 개수하는 법을 실험할 뿐입니다." 당신은 낮고 건조한 어조로 응수합니다. 조승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읊조립니다.

"판옥선에 들어가는 철재의 양이 산동(山東)의 철광산 한 달 소출에 육박한다 들었소. 게다가 남해안의 소나무가 아니라, 강원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도성으로 올라오고 있다지요. 왜구의 소형 약탈선을 잡는 데 대양의 풍랑을 견디는 재목이 왜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의 말씨는 명백한 경고입니다. 황제의 조공 질서 하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대형 함대 구축과 해외 원정은 곧 반역이자 역린입니다. 이미 동창(東廠)의 세작들이 경원아무 내부의 보급 장부를 훔쳐보기 위해 가평과 강화도의 벌목장을 사찰하고 다닌다는 첩보가 군기시의 밀정을 통해 당신의 귀에 들어온 참입니다.

만약 명나라 조정에 '조선이 황제의 바다를 넘본다'는 공식 상소가 올라가는 순간, 대양을 향한 돛을 올려보기도 전에 명나라의 대군이 요동을 압박하거나 세종을 폐위하라는 칙서가 날아올 것입니다.

공관의 뜰 아래로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고, 등불이 흔들립니다. 당신의 손끝에는 명나라 사신단의 이목을 교란하기 위해 급히 작성된 가짜 군영 일지와, 도성 내에 암약하는 명나라 화리들의 거처가 적힌 밀지가 쥐어져 있습니다.

상국의 눈을 속이고 이 원대한 항해를 시작하기 위해, 당신은 바로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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