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전의 깊은 어둠 속, 타오르는 촛불이 세자 향(珦)의 수려한 얼굴에 깊은 음영을 드리웁니다. 세자는 당신이 바친 ‘신대륙 만국전도’ 위에 백자 연적을 지긋이 올려놓으며, 나지막하나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대양 너머 가늠치 못할 영토라…… 내 일찍이 천문과 산학을 역량껏 살폈으나 이리도 거대한 천하의 한 축이 빠져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세자가 소매 안에서 꺼내어 당신의 앞에 밀어놓은 것은 황색 명주로 감싸인 호조(戶曹)의 내부 발령 문서입니다.
「교지(敎旨): 유학(幼學) 이(李)를 행(行) 전운사 판관(轉運司判官)에 명함.」
조선의 세곡 운송을 총괄하는 전운사. 이는 단순한 하천 행정 관서가 아닙니다. 매년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12만 석의 세곡 중 약 11.4%가 거친 맹골수도와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당대 조선 맹선(猛船)의 평저선 구조는 연안 복원성이 낮아 외해로 나가는 순간 전복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구상한 첨저선(V형 용골 구조) 설계안을 실험하고, 조정의 눈을 피해 대양 항해용 정찰선을 건조하기 위한 예산과 장인들을 합법적으로 징발할 수 있는 최적의 은폐막인 셈입니다.
"이로써 네 손에 목재와 철물, 그리고 운라(運邏)에 동원될 격군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마. 허나 조정 대신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겉으로는 조운선 개량을 통한 결손율 3% 이하 달성을 명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세자의 안색은 어둡습니다. 정적들의 기민한 움직임 탓입니다. 실제로 이튿날 새벽, 승정원 승지를 통해 사헌부에서 작성 중인 상소의 문안이 임금에게 올리기 직전 당신의 손에 들어옵니다.
『……사헌부에서 아뢰옵니다. 서자 이(李)가 천한 신분으로 호조의 요직을 찬탈하더니, 사사로이 전운사의 철물과 장인들을 빼돌려 해괴한 서양식 배를 건조한다 하옵니다. 이는 국고를 좀먹고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협하는 횡령이오니, 즉각 전운사를 국문하시옵고 그 자를 의금부에 하옥하소서.』
영의정을 필두로 한 보수 사대부들은 당신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대양 개척이라는 당신의 대계를 ‘요설과 국고 유용’으로 낙인찍어 조정에서 영원히 매장하려 합니다.
시간은 당신의 편이 아닙니다. 이대로 조정을 장악한 반대파들에게 덜미를 잡혀 사약의 길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세자가 쥐여준 교지와 수중에 들어온 상소문의 초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신은 결단의 기로에 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