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 선원록(璿源錄) 사초(史草) 중 일부** *“...종실의 방계 이안(李案)은 성정이 거칠고 기이한 기예에 미혹되어, 마침내 명국(明國)의 칙명마저 거부한 채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바다를 건넜다. 조정에서는 그가 풍랑에 휩쓸려 패망하였으리라 여겼으나, 왜인의 밀무역 선박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해 너머 안개 속 끝없는 땅에 이안의 무리가 거대한 쇠성을 쌓고 웅거한다 하니, 황조의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로다.”*
붉은 사암 절벽 위, 거센 태평양의 바람이 당신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뒤흔듭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반도의 열 배가 넘는 광활한 북미 서해안의 대지입니다. 고국 조선과 명나라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당신은 기어이 이 대양의 동쪽 끝에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전하, 남쪽 가포(加浦)의 제2고로에서 첫 출선에 성공하였다는 전갈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유민들의 영수이자 기술 총감독인 김윤이 검게 그을린 안색으로 서신을 올립니다. 한양 군기시의 야철지에서 하루 동안 겨우 350근의 조악한 연철을 생산하던 것과 달리, 이곳 기지에서 완공된 반사로는 화덕 내부 온도를 섭씨 1,450도까지 정밀하게 유지합니다. 석탄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코크스 공정을 정량화함으로써, 매일 8,000근에 달하는 고순도 선철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선철은 인장강도 48kg/㎟를 상회하는 압연 강판으로 가공되어, 절벽 아래 도크에서 건조 중인 800톤급 중범선들의 철갑 골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명나라가 자랑하는 전함들이 목조 공법의 한계에 부딪혀 300톤 이상으로 크기를 키우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이는 당대 동아시아 해군력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정량적 우위입니다.
조정의 사신과 명나라의 밀정이 당신을 찾아 이곳까지 도달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양을 건너는 항로는 이미 당신의 함대만이 통제하는 비밀 통로가 되었고, 조선 왕실과의 모든 공적 인연은 당신의 선언 아래 완전히 파기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김윤을 돌아보며 나직이 속삭입니다. 당신의 목소리에는 황제와 조정의 권위를 비웃는 차가운 현실 정치의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한양의 서자라는 굴레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기술을 독점한 지배자와 추종자의 단단한 결속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평선 저편, 기선의 원형이 될 실험용 소형 외륜선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물살을 가릅니다. 당신이 이룩한 이 거대한 해양 제국은 이제 막 첫새벽을 맞이하고 있으며, 당신이 설계한 강철의 격랑은 머지않아 구대륙의 해안을 사정없이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