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이 꺼낸 것은 얇은 A4 묶음이었다. 서버실에서 뽑아온 로그의 출력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건 능력의 대가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이 종이가 전생의 자신을 죽였다는 걸, 도현은 알고 있었다.
"과장님이 방금 하신 말씀, 정확히 인용하겠습니다." 도현이 종이를 심사위원들 쪽으로 돌려 세웠다. "통계 재분류는 규정된 절차다. 원본을 보면 조작 주장은 즉시 반박된다. 맞습니까?"
윤재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붙어 있었다.
"그럼 원본을 봅시다."
도현은 첫 장을 넘겼다. 심사위원 스무 명의 눈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작년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흉부외과 수술 중 사망한 환자 세 명. 문서번호 24-CS-0112, 0227, 0339." 도현의 목소리가 회의실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이 세 명은 전부 '응급의학과 심근경색 급사'로 재분류됐습니다. 사망 장소는 수술실인데, 코드는 응급센터. 사인은 수술 합병증인데, 진단명은 심근경색."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여기까지는 과장님 말씀대로 '절차'일 수 있죠. 실수일 수도 있고." 도현이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런데 이 재분류를 실행한 계정 로그가 문제입니다. 수정 시각, 수정자 계정, 그리고—" 그가 손끝으로 한 줄을 짚었다. "수정 사유란에 적힌 담당 인턴 이름."
그가 마지막 장을 들어 올렸다.
"서도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저는 이 세 케이스 중 어느 것도 담당한 적이 없습니다. 두 건은 제가 성심의료원에 오기도 전이었어요." 도현이 윤재경을 정면으로 봤다. "그런데 왜 제 이름이 조작의 책임자 자리에 얹혀 있습니까? 이게 '시스템의 판단'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미래의 방패를 미리 세워둔 겁니까?"
윤재경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박태오가 벌떡 일어났다. "그 자료가 진짜라는 증거가 어디—"
"서버 로그입니다." 방청석에서 이서린이 일어섰다. 사복 차림에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성심의료원 임상데이터 서버, 3월 12일 새벽 정기점검 중 백업된 원본 수정 이력 테이블. 해시값까지 대조 가능합니다. 원하시면 IT 감사팀을 지금 부르세요."
박태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기자입니다." 이서린이 명함을 들어 보였다. "3년 전에도 성심의료원 사망 통계를 취재하다 데스크에서 잘렸죠. 그때 킬된 기사의 케이스가—" 그녀가 도현을 봤다. "문서번호 21-EM-0416. 스물아홉 청년. 실제 사인은 심낭 압전. 조작된 사인은 심근경색. 삭제 방식, 서명 라인, 재분류 코드가 오늘 이 세 건과 완전히 같습니다."
윤재경이 손을 들어 박태오를 앉혔다. 하지만 박태오는 앉지 못했다.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박 선생." 도현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3년 전 그 청년의 심초음파 오더, 누가 삭제했습니까? TO_park. 당신 계정입니다. 오늘 검증 케이스로 하필 심낭 압전 환자를 고른 것도 우연이 아니죠. 당신은 그 병을 놓친 적이 없어요. 놓친 척 지운 거지."
"나는—" 박태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저 위에서 시킨 대로—"
"위가 누굽니까?"
박태오의 눈이 윤재경에게로 향했다가 튕기듯 돌아왔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속에서, 방청석 한쪽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한지우였다.
도현은 숨을 멈췄다. 검증 초반, 한지우는 3년 전 그 청년의 초진 인턴이었다는 걸 인정하려다 박태오의 눈빛에 눌려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무너졌다. 그 뒤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일어서 있었다.
"제가 그 환자의 초진이었습니다." 한지우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냉소도 회피도 없었다. "3년 전, 스물아홉 남자. 흉통, 저혈압, 경정맥 확장. 저는 심낭 압전을 의심했고 심초음파를 오더 냈습니다. 그런데 그 오더가—" 그녀가 숨을 골랐다. "다음 날 차트에서 사라졌어요. 제 오더 기록이, 통째로."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돌아봤다.
"저는 물었습니다. 왜 지워졌냐고. 그때 박태오 선생이 저를 불렀어요." 한지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서류 한 장을 내밀더군요. '초진 판단 오류 확인서'. 제가 오더를 잘못 냈고, 그래서 삭제됐다는 내용.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거부하면?" 도현이 물었다.
"레지던트 재계약 심사가 다음 달이라고 했죠." 한지우가 박태오를 봤다. "'네 판단 착오로 환자가 죽은 걸로 남길지, 조용히 정리할지는 네 서명에 달렸다'고. 정확히 그 말이었습니다."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도현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풀렸다. 전생, 이 여자는 자신을 배신했다. 심사위원회 앞에서 도현에게 불리한 진술서에 서명했고, 도현은 그 이유를 죽을 때까지 몰랐다. 이제 알았다. 그녀도 같은 서류에, 같은 협박에 서명을 강요당한 사람이었다.
"저는 서명했습니다." 한지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제 이름으로, 제 오진이라고. 살아남으려고. 3년 동안 그 서명이 목에 걸려 있었어요. 오늘 아침에도, 저는 또 침묵하려고 했습니다."
그녀가 도현을 봤다.
"근데 이 사람이, 자기 이름이 얹힌 조작 자료를 꺼내는 걸 보고 알았어요. 저 서류를 내가 계속 삼키면, 다음 서도현은 나겠구나. 그다음은 또 누구겠구나."
한지우가 가방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되어 귀가 닳은 종이였다.
"3년 전 그 확인서 사본입니다. 서명하던 날 몰래 한 장 복사해뒀어요. 언젠가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가 심사위원 쪽으로 종이를 밀었다. "박태오 선생의 필체, 날짜, 그리고 협박 정황을 적어둔 제 메모까지 있습니다."
박태오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그 모습을 봤다. 전생, 자신을 매장한 결정적 손. 조작 데이터를 실무로 짜맞추고, 누명의 서류를 완성한 남자. 그가 지금, 자기가 만든 서류의 무게에 깔려 있었다.
"박 선생." 윤재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아까와 달랐다. "3년 전 21-EM-0416 케이스. 심초음파 오더를 지운 게 사실입니까?"
박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통계를 관리했을 뿐입니다." 박태오가 겨우 짜냈다. "수술 사망률이 올라가면 과 전체가—전부 위험해집니다. 저는 조직을 위해—"
"오더를 지운 게 사실이냐고."
박태오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윤재경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심사위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도현은 이 남자가 지금 무슨 계산을 하는지 알았다. 물러설 곳과 지킬 곳을 가르고 있는 것이다.
"박태오 선생의 개별 행위—오더 삭제, 단독 서명, 인턴에 대한 서명 강요는 명백한 절차 위반이며 은폐입니다." 윤재경이 또박또박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즉시 감사위원회에 회부하겠습니다. 세 건의 재분류와 3년 전 케이스에 대한 전면 재조사도 요청합니다."
방청석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이서린의 손이 태블릿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기록하고 있었다.
도현은 윤재경을 봤다. 이 남자가 박태오를 잘라내고 있었다. 카르텔의 첫 조각이, 그의 손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윤재경이 말을 이었고, 도현은 바로 이 '하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시스템의 실패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과장님."
"들으세요, 서 선생." 윤재경이 도현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박태오는 시스템을 악용한 개인입니다. 조작은 개인의 범죄예요. 통계 검증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틀린 게 아니라, 그 시스템에 손을 댄 개인이 틀린 겁니다. 오늘 밝혀진 건 시스템이 개인을 못 걸렀다는 게 아니라—결국 시스템 안에서 원본이 남아 있었기에 밝혀졌다는 거죠."
교묘했다. 도현은 속으로 감탄에 가까운 인정을 했다. 이 남자는 지금, 카르텔의 은폐마저 '시스템의 자정 작용'으로 포장하려 하고 있었다.
"조작이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네 사람을요. 3년 전 청년까지 하면."
"조작이 죽였죠. 검증 시스템이 죽인 게 아닙니다." 윤재경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 차이를 혼동하면, 당신은 결국 '검증 따위 필요 없다, 나 하나면 된다'는 결론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게—" 그가 잠시 멈췄다. "그게 언젠가 당신의 손으로 환자를 죽이게 될 겁니다. 나는 그날을 기다릴 겁니다, 서 선생."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말에는 독이 아니라 독을 닮은 진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단이 옳다는 확신 앞에서 절차를 짓밟았던 것, 눈앞의 환자를 위해 자기 몸을 태워버린 것, 그건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도현 자신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옆을 봤다. 이서린이 태블릿에서 손을 떼고 그를 보고 있었다. 방청석 뒤편에 어느새 들어와 벽에 기대선 강민석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였다. 한지우는 아직 서 있었다. 3년의 무게를 내려놓은 얼굴로.
전생의 검증장에서, 도현은 혼자였다. 조작된 데이터 앞에서 홀로 소리쳤고,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고, 그렇게 무너졌다.
지금은 아니었다.
"과장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젠가 제 확신에 취해 환자를 죽일지도 모르죠. 그건 제가 평생 경계해야 할 저 자신의 병입니다."
윤재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증명된 건, 제 진단이 옳았다는 게 아닙니다." 도현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혼자였으면 저는 오늘도 졌을 겁니다. 손을 대서 병을 짚어도,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시스템 안에서 아무 힘이 없으니까요. 원본을 뽑은 건 이서린 기자였고, 로그를 확보한 건 강민석 선생이었고, 협박의 실체를 증언한 건 한지우 선생이었습니다. 저 혼자였으면 이 원본은 종이 쪼가리였을 겁니다."
도현이 윤재경을 정면으로 봤다.
"과장님은 시스템이 개인의 오만을 걸러낸다고 하셨죠. 저도 걸러져야 할 개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스템 대신 사람을 곁에 뒀습니다. 서로를 걸러주는 사람들을요."
윤재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박태오가 감사위원 두 명에게 이끌려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카르텔의 첫 조각이, 정말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였다.
심사위원장이 헛기침을 하고 선언했다. "서도현 선생의 진단 검증은 통과로 처리합니다. 세 건 재분류 및 3년 전 케이스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감사위원회에 회부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종료—"
"잠깐."
윤재경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 앞으로 걸어왔다. 심사위원들이 다시 술렁였다. 그는 아주 가까이서 도현을 봤다. 낮게, 방청석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당신은 오늘, 개인이 시스템을 이길 수 있다고 스무 명 앞에서 증명했습니다." 그의 눈은 차분했지만 그 안쪽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굳어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압니까? 지금까지 당신은 응급센터 구석의 튀는 인턴이었어요.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었죠. 오늘부로—"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제 넌 시스템의 적으로 정식 등록됐다. 서도현."
윤재경이 몸을 돌렸다. 그가 회의실 문을 나서기 전,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도현은 그가 누른 번호가 12층 내선임을 알았다. 심사위원회 소집 번호.
"위원회 긴급소집. 안건은—" 문틈으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도현."
문이 닫혔다.
도현의 심장이 한 박자 걸렀다. 이번엔 능력의 대가가 아니었다. 진짜 싸움이, 지금 막 시작된 것이었다.
이서린이 다가와 그의 팔을 툭 쳤다. "이겼어."
"이긴 게 아니에요." 도현이 닫힌 문을 봤다. "첫 조각을 떨어뜨린 것뿐입니다."
강민석이 벽에서 몸을 뗐다. "그 첫 조각 떨어뜨리느라 네 심장이 몇 번 걸렀는지는 아냐."
한지우가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도현을 오래 봤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3년 전에 서명한 나한테는 못 할 말이니까. 대신 이거 하나는 약속해요. 다음엔, 안 도망칠 겁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이 여자에게 품었던 원망이, 오늘 이 회의실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원망이 아니라—함께 무너뜨릴 사람.
창밖으로 오후 햇빛이 12층 유리를 때리고 있었다. 저 12층 어딘가에서, 윤재경이 소집한 심사위원회가 그를 겨눈 진짜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조작 데이터 하나가 아니라, 병원 전체의 무게로.
도현은 가운 안주머니에 원본을 다시 넣었다. 손끝이 규칙적으로 떨렸다. 흉강 깊은 곳에 오늘 촉진한 환자의 잔류 통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 그 통증을 앓지 않아도 됐다.
"가죠." 도현이 세 사람을 돌아봤다. "저들이 소집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음 판을 짤 겁니다."
세 사람이 그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 끝, 12층 심사위원회 회의실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전생에 그를 죽인 그 방이었다.
이번엔, 도현이 그 문을 두드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