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비상등만 켜져 있었다. 도현은 세 칸씩 뛰어내렸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소독약과 곰팡이 냄새로 시큰했다.
서버실 문 앞에 이서린이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노트북 화면 불빛이 그녀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비췄다.
"진행률 63퍼센트." 이서린이 화면을 돌려 보였다. "삭제 스크립트가 돌아가고 있어요. 최영수 환자 원본 마취 기록, 조작 전 CT 판독지. 다 이 안에 있어요. 저게 다 지워지면 우리한테 남는 건 복사본이고, 복사본은 법정에서 조작 주장 앞에 무력해요."
"멈출 방법은."
"관리자 계정. 그런데 잠겨 있어요." 이서린이 이를 악물었다. "취재 3년, 유족 두 번 만나고, 두 번 다 침묵당했어요.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또 사라지는 걸 보고만—"
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서버실로 들어갔다. 냉각기가 돌아가는 랙 사이로 관리 단말이 있었다. 로그인 창. 아이디는 채워져 있었다. tho_park. 박태오.
"비밀번호는 몰라요." 이서린이 따라 들어왔다.
도현은 단말 옆 책상 서랍을 뒤졌다. 포스트잇, 볼펜, 반쯤 남은 두통약. 그리고 서랍 안쪽 벽에 유성펜으로 갈겨쓴 숫자.
"박태오 이 겁쟁이." 도현이 숫자를 입력했다. 아까 옥상에서 박태오는 궁지에 몰리자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기억은 지운다. 다 지운다. 자기 손으로 지운 걸 다시 잊을까 봐 벽에 적어두는 인간이었다.
로그인 성공음이 울렸다. 진행률 71퍼센트.
"멈춰요, 빨리."
도현은 프로세스 목록을 훑었다. 삭제 스크립트가 우선순위 최상위로 잡혀 있었다. 강제 종료. 화면이 한 박자 멎었다가, 진행률 표시가 71에서 얼어붙었다.
이서린이 숨을 뱉었다. "복원 가능한 파일이 얼마나—"
"71퍼센트 삭제면 29퍼센트 남았단 소리가 아니에요." 도현이 서버 로그를 열었다. "삭제는 파일 앞부분 헤더부터 밀어요. 원본은 데이터 블록 뒤쪽에 그대로 있고. 헤더만 다시 붙이면 돼요. 마취 기록 로우 데이터는 시간 코드가 초 단위로 박혀 있어서, 조작한 놈이 손댄 흔적이 로그에 남아요."
이서린이 도현을 쳐다봤다. "인턴이 서버 포렌식을 어떻게 알아요?"
도현은 대답 대신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최영수, 남, 54세. 마취 기록. 원본 타임스탬프와 수정 타임스탬프가 나란히 떴다. 수정한 자의 계정. 수정한 자의 계정 위에 결재한 자의 계정.
윤재경.
명치 아래가 서늘하게 조여왔다. 이건 능력의 통증이 아니었다. 회귀 전, 이 정확히 같은 형식의 문서가 도현 자신을 죽였다. 그때는 도현이 조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도현이 마취 시간을 늘려 환자를 죽였다고, 이 서버의 이 파일이 증언했다.
이번엔 도현이 이 파일을 손에 쥐었다.
"이거 다 뽑아요." 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이서린이 외장 드라이브를 꽂았다. 파일이 복사되는 동안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이걸로 뭘 할 건데요. 나 혼자 기사 쓰면 병원이 명예훼손으로 나 묻어요. 취재원은 익명이라 세상은 안 믿고. 지난번에 딱 그랬어요."
"이번엔 취재원이 익명 아니에요."
문이 열렸다.
지우가 서 있었다. 로테 배정을 흉부외과로 옮긴 뒤 며칠 만이었다. 그는 서버실 안의 두 사람과 화면을 훑고, 짧게 숨을 뱉었다.
"박태오가 서버 만지러 갔단 얘기 듣고 왔어. 늦은 줄 알았는데." 지우가 이서린을 봤다. "기자님이시죠. 최영수 환자 유족 취재하셨던."
"당신은."
"한지우. 성심의료원 외과 3년차." 지우가 도현 옆으로 와 화면을 봤다. "그리고 저 마취 기록 조작 지시, 내가 직접 들은 사람이에요. 작년 12월, 7층 당직실에서 박태오가 마취 시간 코드 30분 당기라고 하는 거. 이유는 하나였어요. 집도의 실책 은폐. 환자 사망 원인을 마취과 관리 소홀로 돌리려고."
이서린이 지우를 뚫어져라 봤다. "그걸 증언하겠다고요? 실명으로?"
"익명으로 하면 세상이 안 믿는다면서요." 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냉소적인 말투 뒤로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나 성심에서 커리어 끝날 수도 있어요. 내부고발자 낙인. 알아요. 근데 나 그 환자 마지막 바이탈 찍은 사람이거든.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 숫자가 안 지워져요."
도현은 지우를 봤다. 회귀 전, 이 남자는 도현을 지키려다 오히려 도현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 오해를 풀어낸 게 겨우 며칠 전이었다. 지금 지우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걸고 있었다.
"지우야."
"됐어. 감동 표정 짓지 마. 소름 돋으니까." 지우가 손을 내저었다. "그거보다, 이거 언제 터뜨릴 건데. 윤 과장이 삭제 실패한 거 아는 순간 다른 손 쓸 거야."
이서린이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렸다. "지금."
"지금?"
"복사 끝났어요. 원본 해시값 찍었고, 서버 로그 캡처했고, 한지우 선생님 증언까지." 이서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3년 동안 눌러온 무언가가 눈꺼풀 아래에서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나 이거 하나로 안 끝낼 거예요. 최영수 사건만이 아니에요. 2년 전에 내가 취재하다 병원한테 협박당하고 접었던 사건. 정 모 씨. 폐암 오진으로 수술받다 죽었는데, 그 판독지도 이 서버에 있으면—"
이서린이 파일 목록을 미친 듯이 스크롤했다. 손가락이 멈췄다.
"있어요."
화면에 뜬 폴더 이름을 보고 이서린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폴더를 열었다. 조작 전 판독지, 조작 후 판독지, 그리고 결재 라인. 도현은 그 이름들을 읽었다. 판독 수정 지시자에 박태오. 최종 승인에 윤재경.
"2년이에요." 이서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파일 하나 없어서 2년을. 유족이 나한테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기자님도 저놈들 편이었네요. 그 말 듣고 내가—"
이서린이 말을 삼켰다. 그녀는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이번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 6시. 세 개 매체 동시 송고. 원본 데이터, 서버 로그, 실명 증언. 병원이 하나 막으면 나머지가 터져요. 이건 못 묻어요."
도현은 랙 사이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봤다. 회귀 전, 이 서버실에 그는 혼자 서 있었다. 정확히는, 혼자 끌려와 서 있었다. 자기가 조작하지 않은 데이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을 혼자 지켜봤다. 손을 대면 병을 읽는 능력도, 세상을 뒤집는 확신도, 그때는 없었다. 있었던 건 오직 '내가 옳다'는 신념뿐이었고, 그 신념은 그를 아무도 없는 밀실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번엔 옆에 두 사람이 있었다.
"손." 지우가 갑자기 도현의 오른손을 잡아챘다. 서버실 조명 아래, 손가락 마디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낮에 흉부외과에서 환자 셋을 만졌다. 잔류 통증이 아직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너 또 무리했지."
"괜찮아."
"괜찮긴." 지우가 도현의 손을 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이 손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나 아직 다 몰라. 근데 이거 하나는 알아. 넌 자기 몸을 소모품처럼 써. 그러다 진짜 필요한 순간에 손 굳으면 어쩔 건데."
강민석의 목소리가 겹쳐 떠올랐다. 며칠 전 병동 계단에서, 강민석은 도현의 손을 붙들고 똑같은 말을 했었다. 자네 이 손, 진통제로 안 되는 통증이지. 나 마취과야. 통증이 어디서 오는지는 몰라도, 이게 자연스러운 통증이 아니란 건 알아. 그때 강민석의 눈에는 걱정과 분노가 반반이었다.
도현은 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안 만졌어. 서버만 만졌지."
"농담이 나오냐 지금."
이서린이 노트북을 닫았다. "나가요.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원본 확보한 거 들키면 저들이 우리보다 먼저 움직여요."
세 사람은 서버실을 나섰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도현의 귀에는 자기 심장 소리만 들렸다. 회귀 전 이 계단을, 그는 수갑에 가까운 눈초리들에 둘러싸여 끌려 내려갔었다. 지금은 스스로 올라가고 있었다. 증거를 손에 쥐고.
지하 1층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이서린이 걸음을 멈췄다.
"서 선생님. 하나 물어도 돼요?"
"뭐요."
"당신, 이 데이터가 이 서버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파일 형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삭제가 어디서부터 밀리는지, 결재 라인이 어디 박히는지. 인턴 한 달 차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서린은 캐묻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됐어요. 대답 안 해도. 지난 3년 동안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겁 안 먹고 이 안까지 들어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다음 날 아침, 도현은 당직실 낡은 텔레비전 앞에 서 있었다.
6시 정각. 자막이 붉게 떴다. 성심의료원 임상 데이터 조작 정황, 의료사고 은폐 의혹. 화면 아래로 서버 로그 캡처가 흘렀다. 마취과 3년차 실명 증언. 유족 2년 침묵의 진상.
당직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강민석이 헝클어진 머리로 뛰어 들어왔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에도 같은 기사가 떠 있었다.
"터졌네." 강민석이 텔레비전과 도현을 번갈아 봤다. "자네 얼굴 좀 보게. 밤새 한숨도 안 잤지."
"자료실 자백 녹음, 강 선생님이 넘긴 거요. 그것도 기사에 들어갔어요."
"들어갔지." 강민석이 도현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도현의 오른손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다 놨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서버실 갔다며. 그 손으로 서버만 만졌다고?"
"지우가 일렀어요?"
"손이 일렀어." 강민석이 도현의 손가락 마디를 눌렀다. 도현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이거 잔류량 아직 안 빠졌어. 이 상태로 오늘 하루 더 넘기면 감각 붕괴 온다. 내가 마취과라 아는데, 자네 통증은 진통제가 안 들어. 그럼 방법은 하나야. 손 안 쓰는 거."
"오늘은 쓸 일 없어요. 판은 이미 굴러갔으니까."
바로 그때, 도현의 호출기가 울렸다.
발신처를 본 순간, 도현의 등줄기가 굳었다. 강민석도 화면을 봤다.
7층 흉부외과. 과장실. 윤재경.
"자네 안 가는 게 좋겠어." 강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폭로 터진 아침에 저 사람이 자네를 콕 집어 부르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어."
"복수?"
"아니." 강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저 사람은 자네를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어 해. 자기 시스템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지."
도현은 일어섰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그는 그 손을 가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7층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기사가 터졌는데도, 아니 터졌기 때문에, 흉부외과 병동은 폭풍 전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과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윤재경은 창가에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의 흰 가운을 가로질렀다. 그는 손에 든 태블릿으로 아까 그 기사를 읽고 있었다. 얼굴에 동요가 없었다. 그게 더 서늘했다.
"들어오게, 서도현 선생."
도현이 문을 밀었다.
"자네가 했지." 윤재경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질문이 아니었다. "서버실. 삭제 프로세스 강제 종료. 원본 유출. 인턴 계정으론 못 하는 일이야. 그런데 자넨 했어. 어떻게 했는지는, 지금 안 중요하고."
"환자가 죽었어요, 과장님. 두 명. 그 데이터가 그 죽음을 감췄고요."
"그래." 윤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부정하지 않았다. "감췄지. 왜인지 아나. 그 두 명을 죽인 손을 시스템 밖으로 걷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검증되지 않은 손이 세 번째, 네 번째 환자를 죽이기 전에. 자넨 그걸 폭로라 부르지. 나는 그걸 통제의 붕괴라고 불러."
"검증되지 않은 손이 환자를 죽인다." 도현이 그 말을 되뇌었다. 4화, 청문회방에서 이 남자가 도현에게 처음 던진 말이었다. "그 문장으로 몇 명을 시스템 밖으로 걷어냈는데요. 그 문장으로 절 죽였고요—"
도현은 말을 삼켰다. 회귀 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윤재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 죽였다'? 무슨 소린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재경은 잠시 도현을 응시했다. 그러곤 창가에서 돌아섰다.
"자네가 옳다고 믿는군. 손으로 뭔가를 읽는다지. 청문회방에서 봤어. CT도 안 보고 진단을 맞혔어. 인정하네. 자넨 재능이 있어. 하지만 재능은 검증이 아니야. 재능은 오만의 다른 이름일 때가 더 많고."
그가 인터폰을 눌렀다.
"7층 3호실 환자, 이리로 옮겨."
문이 열리고, 이동식 침대가 밀려 들어왔다. 그 위에 창백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누워 있었다. 모니터의 그래프가 불안하게 튀었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다. 간호사와 레지던트가 딸려 들어와 침대 옆에 붙었다.
"오늘 새벽 응급 입원. 원인 불명 흉통, 쇼크 진행 중." 윤재경이 침대 발치에 섰다. "우리 흉부외과 팀이 세 시간째 붙었어. 심전도, 초음파, CT, 다 돌렸어. 진단이 안 나와. 지금 이 환자, 자네가 폭로한 그 '검증되지 않은 손'들이 세 시간째 못 살리고 있는 환자야."
도현의 시선이 모니터로, 환자의 회색빛 입술로, 그리고 축 늘어진 오른손으로 옮겨갔다.
윤재경이 도현을 정면으로 봤다.
"자네가 옳다면, 지금 이 환자를 살려보게. 자네의 그 손으로."
도현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마디가 아직도 경련하고 있었다. 어제 만진 세 명의 통증이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 이 손으로 환자를 만지면—강민석의 경고가 귓속에서 울렸다. 이 상태로 하루 더 넘기면 감각 붕괴 온다.
살릴 수 있었으나 놓친 환자의 통증은, 유독 오래 몸에 새겨진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