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 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췄다.
카리엘은 코르셋 속 밀서를 손끝으로 눌러 확인하며 시엔나를 돌아보았다. 감시자라고 방금 제 입으로 고백한 시녀. 그런데 그 시녀가 문과 카리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뒷계단으로 가세요. 세탁물 통로예요."
"왜."
시엔나의 턱이 굳었다. "지금 그걸 물으실 때가—"
"네가 델피네에게 보고한다며. 그럼 이 병력도 네가 부른 거겠지." 카리엘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이 여자가 언제 나를 팔까. 그 계산이 먼저 돌았다. "함정에 스스로 걸어들어갈 만큼 어리석진 않아."
문 밖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레이디 카리엘. 황후 폐하께서 지금 뵙기를 청하십니다."
지금. 만찬 전, 예정에 없던 호출. 전생의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흰 탑으로 끌려가던 그 밤도 이렇게 '청'이라는 말로 시작됐다.
"보고하면 죽어요, 당신은." 시엔나가 속삭였다. 손목의 소맷단이 흘러내리며 붉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드러났다. "델피네 앞에 서면 이번엔 만찬 전에 끝나요. 제가 아는 건 그것뿐이에요. 믿든 말든."
카리엘의 시선이 그 흉터에 잠깐 걸렸다. 오래된 상처. 시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계산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세탁물 통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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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로 가는 마차는 사흘을 달렸다.
검증의 계절 중 후보가 궁을 벗어나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으나, 카리엘은 '아르덴가 봉토 순시'라는 명목을 위조 서류로 만들어 냈다. 율리안 베르크—만찬장에서 슬쩍 눈을 마주친 그 소심한 관료에게 값을 치르고 얻은 통행증이었다. 그는 인장을 찍어 주며 여벌 인장 하나를 제 소매에 슬쩍 챙겼지만, 카리엘은 못 본 척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서 그 정도 좀도둑질은 거래 비용이었다.
풍경이 바뀌었다. 초록이 지워지고, 잿빛과 흰색만 남았다.
카를슈타인은 산 자체가 성이었다. 검은 현무암을 깎아 세운 성벽은 눈보라 속에서 젖은 짐승의 이빨처럼 번들거렸다. 로제라움의 대리석이 웃는 얼굴로 목을 조르는 곳이라면, 이곳은 아예 웃지 않았다. 성문 위엔 문장도, 황실 깃발도 없었다. 대신 청동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시엔나가 마차 창에 이마를 붙이고 그 글자를 읽었다. "여긴… 사람이 사는 곳 같지가 않네요."
"규칙이 사는 곳이야." 카리엘은 장갑을 고쳐 끼었다. "그래서 온 거고."
황실의 어떤 밀약도, 어떤 조작된 자백도 이 성벽 안에서는 효력이 없었다. 제국법이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삼아 사람을 죽이는 곳에서 도망친 그녀에게, '문서만이 진실'인 이 땅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기였다.
성문이 열렸다. 예고도 환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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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에는 벽난로가 없었다.
카를슈타인의 대공은 온기를 두지 않았다. 넓은 방 한가운데 검은 참나무 탁자, 그 위에 서류 더미. 창밖으로 눈이 소리 없이 쌓였다.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은 카리엘이 들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카리엘은 문 앞에 선 채로 기다렸다. 상대가 침묵으로 우위를 점하려 하면, 침묵으로 맞받는 게 협상의 기본이었다.
한참 만에 펜이 멈췄다.
"아르덴가의 레이디." 그가 마침내 눈을 들었다. 회색 눈동자에 온도가 없었다. "당신 밀서를 읽었소. 황궁 음모, 밀서의 존재, 황실 견제. 흥미로운 단어들이지."
"그럼 거래가—"
"단어는 거래가 아니오." 그가 밀서를 탁자 위로 밀어냈다. "감정도, 명분도, 혈통도. 이 방에선 아무 값이 없소. 당신이 아르덴 공작가의 딸이라는 사실,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 억울하다는 호소—전부 기록되지 않은 소리요. 소리는 이곳에서 존재하지 않소."
카리엘의 입가가 미세하게 당겨졌다. 저 청동판의 글자가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이런 소리였다.
"그럼 무엇이 존재합니까."
"조건." 레온하르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으려 하는지. 이행 가능한 형태로 문서에 적히는 것만. 나머지는 눈보라 소리와 다르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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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엘은 그제야 방을 가로질러 탁자 앞에 앉았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앉았다. 이 사람은 지금 그녀를 저울에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저울 위에 자신의 무게를 정확히 얹어야 했다.
"좋습니다. 그럼 값을 매기죠." 그녀는 손을 탁자 위에 포갰다. "제국 황후 델피네가 두 번 접힌 밀서를 쥐고 있습니다. 봉랍 문양은 얽힌 넝쿨과 가시, 그 위에 작은 왕관. 델피네 가문의 사문서 인장이죠. 그 밀서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저는 그 존재를 직접 보았고, 앞으로 그 내용까지 캐낼 수 있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처음으로 좁아졌다. "봤다는 근거는."
"제가 그 방에 있었으니까요." 태워진 기억 조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값을 떨어뜨리는 정보였다. "황실의 최내밀 문서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저는 그 통로를 압니다. 북부 조약법을 흔들려는 황실의 움직임이 있다면—대공께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정보를, 제가 궁 안에서 실시간으로 가져다드리죠."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황제조차 함부로 못 건드리는 조약법의 관리자. 그런데 황실은 지금 그 법의 틈을 재고 있습니다. 대공은 요새를 지키지만, 궁 안에는 눈이 없죠. 제가 그 눈이 되겠습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눈이 쌓이는 소리마저 멈춘 듯했다.
이 순간을 카리엘은 오래 기다렸다. 아드리안의 장미, 델피네의 만찬 초대—황실이 내미는 손은 전부 그녀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었다. 그 밧줄을 뿌리치고, 황제조차 굽어보지 못하는 자와 마주 앉아 대등하게 값을 흥정한다. 후보가 아니라, 아르덴가의 딸이 아니라, 거래 상대로서.
"흥미롭군." 레온하르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국의 후보가 제 발로 궁을 나와, 총애를 버리고 정보상을 자처하다니."
"총애는 목줄입니다." 카리엘이 잘라 말했다. "저는 개가 아니고요."
레온하르트의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평가의 눈금이—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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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엔나가 방문 앞에서 몸을 떨었다. 실내인데도 북부의 냉기가 뼈까지 파고들었는지, 그녀는 팔짱을 끼며 소맷단을 걷어 올렸다. 화상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 이번엔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그 흉터에 닿았다.
"저 여자는 누구요."
"제 시녀입니다."
"시녀치고는." 그가 흉터를 응시했다. "불에 오래 노출된 흔적이군. 손목 안쪽까지. 화재를 정면에서 겪은 자의 상처요. 시녀가 어디서 저런 걸."
시엔나가 급히 소매를 내렸다. "옛날 일이에요. 부엌에서—"
"부엌 화상은 손등에 남지, 손목 안쪽 전체에 감기지 않소." 레온하르트의 관찰은 서류를 읽듯 건조했다. "누군가를 감싸다 입은 상처요. 무언가를 끌어안고 불 속에서 버틴 자국."
카리엘의 시선이 천천히 시엔나에게로 돌아갔다.
누군가를 감싸다. 카리엘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델피네의 감시자라던 여자. 자신을 팔 자라 확신했던 여자. 그런데 그 여자는 방금 궁을 함께 탈출했고, 지금 이 얼음 요새의 끝까지 따라왔다. 왜.
"시엔나." 카리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흉터, 언제 생겼어."
시엔나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입술이 달싹였다가, 다물렸다. "…말할 수 없어요. 아직은."
"아직은?" 카리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이라는 건, 언젠가는 있다는 뜻이었다. 시녀가 주인에게 감출 '언젠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균열이었다. "너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어."
시엔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눈보라가 창문을 긁었다.
레온하르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낮게 말했다. "재미있는 시녀를 데리고 다니는군. 하지만 저 여자의 상처는 문서에 적을 수 없으니, 지금 이 협상과는 무관하오."
무관하다. 카리엘은 그 말을 붙들고 싶었다. 무관하다고, 계산 안에 넣지 않아도 된다고. 그편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손목 안쪽에 감긴 그 붉은 흉터가 자꾸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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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가 서랍을 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조약법의 양식—여백이 넓고, 조항마다 서명란이 그어진 냉정한 문서였다.
"당신 제안을 검토하겠소. 단, 조약법의 제1조건부터 받아들여야 하오." 그가 문서 맨 위 줄을 짚었다. "이 계약 안의 모든 진술은 진실이어야 하오. 거짓이 단 한 줄이라도 섞이면—"
그는 카리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계약은 무효요. 그리고 무효가 된 순간, 당신은 북부 조약법을 기망한 자가 되지. 조약법의 기망은 제국 반역죄와 동일한 무게로 처벌하오. 참수요. 이곳엔 삼심제도, 자백의 정상참작도 없소. 문서가 거짓을 증명하면, 그날로 끝이오."
카리엘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반역죄. 참수. 그녀가 도망쳐 온 바로 그 죄목이, 이 얼음 요새에서 다른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실에선 억울하게 죽지만, 여기선 정확하게 죽는다.
그런데 그 정확함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어깨에서 힘을 빼놓았다.
"진실만." 그녀는 되뇌었다. "누명이 아니라, 진실로 심판받는다는 거군요."
"조약법은 그런 것이오." 레온하르트가 담담히 말했다. "여기선 아무도 억울하게 죽지 않소. 그리고 아무도 억울하게 살아남지 못하지."
카리엘은 그 문서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여백 한구석에 대공의 필체로 적힌 짧은 한 줄이 눈에 스쳤다—조항 번호도 붙지 않은, 미기재된 문장. 무슨 뜻인지 물으려던 순간, 레온하르트가 종이를 반듯이 돌려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 펜이 그 위에 얹혔다.
"자, 서명하시오. 당신이 제게 팔겠다는 것—델피네의 밀서, 황실의 음모, 견제 카드. 전부 진실이라면."
카리엘은 펜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진실만.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진실로 내걸 수 있는가. 델피네의 밀서는 봤다. 봉랍 문양도 안다. 그건 진실이다. 아드리안이 자신을 죽인다는 것—그것도 진실이다. 하지만 그 진실을 어떻게 종이 위에서 증명한단 말인가. 태워진 기억으로? 다시 열 때마다 목에 칼날이 닿는 그 통증으로?
그녀가 펜촉을 서명란에 대려는 찰나, 레온하르트가 손을 들어 종이를 눌렀다.
"기다리시오. 조건 하나가 더 있소."
카리엘의 손이 멈췄다.
"당신은 방금 흥미로운 진술을 하나 흘렸소." 그의 회색 눈이 서류 위 어느 지점을 짚었다—밀서에 그녀가 적어 넣었던 문장. '나는 3년 뒤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이 문장. 미래의 죽음을 근거로 지금 나와 손잡겠다는 것. 그것이 이 계약의 뿌리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레온하르트가 펜을 든 그녀의 손 위로, 계약서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 눈보라가 창을 때렸다. "이 조약법 안에서 그것을 진실로 만드시오. 3년 뒤 당신이 죽는다는 그 미래를—문서로, 증거로, 내게 증명하라."
그의 목소리가 방의 냉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증명하지 못하면, 당신의 진술은 첫 줄부터 거짓이오. 그리고 이 계약은—당신을 살리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목을 요구하게 될 것이오."
카리엘의 손끝에서 펜이 흔들렸다.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무슨 수로 증거로 세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