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카리엘 폰 아르덴!"

회랑 저편에서 델피네의 미소가 채 걷히기도 전에, 정문 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드리안이었다. 회색 조사단을 밀치고 들어온 그의 뒤로 태자궁 위병 열두 명이 창을 내렸다. 창날이 정오의 해를 받아 하얗게 번졌다.

"반역죄다."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그녀를 겨눴다. 전생과 똑같은 각도였다. 전생과 똑같은 손. 전생과 똑같은 단어.

"황실 문서 무단 탈취, 황후 폐하 신변 위협, 반역 공모. 죄인 카리엘 폰 아르덴을—정오의 광장 참수에 처한다."

두려움은 오지 않았다. 목에 닿던 칼날의 냉기도, 심장을 조이던 공포도, 이미 태워 없앤 감정이었다. 그녀는 광장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전생에 그녀를 죽인 무대. 흰 수의, 정오, 군중.

"광장."

카리엘이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계산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소리였다.

"좋습니다. 광장으로 가죠."

아드리안의 눈썹이 흔들렸다. 델피네의 미소가 처음으로 굳었다.

*

정오의 광장은 전생의 그날과 똑같았다. 흰 처형대, 검은 도끼, 대리석 계단을 메운 군중. 12대 귀족가문의 문장기가 바람에 늘어져 있었다. 카리엘은 흰 수의 대신 자신의 외투를 입은 채 계단을 올랐다. 손목엔 밧줄이 없었다. 위병이 묶으려 했으나, 회색 외투의 사내 하나가 그 앞을 막았다.

"조약법 당사자에게 제국 사법권은 미치지 않는다."

레온하르트였다. 검은 현무암 같은 얼굴로, 그는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처형대 난간에 올려놓았다. 국경 조약법의 인장이 정오 빛에 붉게 드러났다.

"북부 대공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 국경 조약법 관리자 자격으로 고한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이 자리에 선 카리엘 폰 아르덴은 나와 서명된 계약의 당사자다. 제37 수비대 정보 검증 참, 방위비 유용 사슬 검증 참, 황실 배후 가설 검증 참—누적 실적 세 건."

그가 카리엘을 봤다. 저울질하는 눈. 그러나 그 눈이 조약서의 한 조항에 멎었다.

"계약 부칙. 이행 실적 세 건 누적 시, 당사자 지위를 '대등 협상가'로 격상하고 조약법상 조사·제출 권한을 부여한다. 검증의 계절 셋째 날, 그녀가 직접 서명한 조항이다."

카리엘은 그 문장을 기억했다. 3화의 그 밤. 대공에게 보낼 첫 서한을 봉인하던 손끝. 그때는 살아남으려 매달린 조건이었다. 지금은 델피네를 끌어내릴 열쇠였다.

"조약법 밖의 나는 건드릴 수 없다고 하셨죠." 카리엘이 델피네를 향해 돌아섰다. 군중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맞습니다. 제국 사법으로는요. 그런데 저는 지금 제국 사법이 아니라 조약법의 당사자로 여기 섰습니다. 그리고 조약법은—기록되고 서명된 계약만이 진실입니다."

*

델피네의 얼굴에서 자애가 벗겨졌다. 그것은 천천히, 뺨의 근육 하나씩 벗겨지는 과정이었다.

"레온하르트 경." 그녀가 미소를 붙들며 말했다. "북부의 법을 제국 광장에 끌고 오다니. 조약법이 이 자리에서 무슨 효력이 있다는 겁니까."

"효력은 폐하께서 만드셨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조약서를 접었다. "방위 협정 부칙 제9조. 북부 방위비의 최종 승인 문서는 조약법 조사 대상입니다. 그 문서의 승인란에 찍힌 인장이—누구의 것인지가 이 자리의 쟁점입니다."

카리엘이 외투 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서른두 개 중 하나. 세 갈래 백합. 정오의 해가 금속 위에서 부서졌다.

"자애 하사품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후보들에게 나눠 주신 것. 서른두 개 중 서른한 개는 꽃잎 각도가 같습니다. 이것 하나만 다릅니다."

그녀는 브로치를 뒤집어 각인을 보였다. 광장의 앞줄 귀족들이 목을 뺐다.

"이 각인은 밀실 자물쇠 홈에 맞물립니다. 흰 탑 옆 예배 밀실. 그 안에서 저는 방위비 유용 승인 사슬을 봤습니다. 방위비를 빼돌려—삼 년 뒤 제 처형의 조작 증언 비용을 미리 지출한 사슬을요."

"증거가 있느냐." 델피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네 눈으로 봤다는 말은 증거가 아니다. 종이를 내놓아라. 서명된 종이를."

역독으로 본 기억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아는 벽이었다. 카리엘의 손안이 비어 있었다. 조작 증언 정리서와 브로치뿐. 최종 승인 원본은—황후궁 회계실 사금고 세 번째 층. 아직 그녀 손에 없었다.

델피네가 그 공백을 읽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보아라. 저 아이에겐 아무것도 없다."

*

그때, 회랑 그늘에서 발소리가 났다.

율리안이었다. 서류 뭉치를 안은 채. 그의 얼굴은 하얬고, 손끝이 떨렸다. 그가 계단 아래에서 멈춰 카리엘을 봤다.

전생에, 그는 여기서 그녀를 배신했다. 카리엘은 그 조각을 열지 않고도 알았다. 5화의 그 밤, 그의 손이 그녀의 계약 인장이 아닌 빈 봉랍을 보며 미묘하게 멈추던 순간을. 무언가를 재던 손. 지금도 그 손이 서류 뭉치 위에서 멈춰 있었다.

델피네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율리안 베르크. 베르크 가문의 봉토 복권—내 손안에 있다. 그 장부를 이리 가져오너라. 그러면 네 가문은 다시 서게 된다."

율리안의 시선이 델피네의 손과 카리엘의 얼굴 사이를 오갔다. 저울질. 언제나 값을 매기는 눈.

"율리안." 카리엘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애원이 없었다. "저는 당신에게 신뢰를 팔지 않았습니다. 값을 매길 수 있는 변수로 대했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계산하세요. 델피네가 무너진 뒤, 그 손이 약속을 지킬 것 같습니까?"

율리안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가 서류 뭉치를 내려다봤다. 그 손이 5화의 그날처럼 멈췄다. 그러나 이번엔—

이번엔 멈춘 손이 앞으로 나아갔다.

"자애 기금 특별 지출 장부 원본입니다." 그가 계단을 올라 카리엘에게 뭉치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황후궁 회계실에서 어젯밤 제가 빼돌렸습니다. 최종 승인란 사본—원본은 사금고 세 번째 층에 있고, 이건 그 승인란을 그대로 옮긴 인증 등본입니다. 회계관 세 명의 서명이 붙어 있습니다."

델피네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복권은 필요 없습니다." 율리안이 델피네를 보지 않고 말했다. "몰락한 가문이라도, 거짓 위에 다시 세우고 싶진 않으니까요."

*

레온하르트가 등본을 받아 조약서 위에 겹쳤다. 그리고 광장을 향해 그것을 펼쳤다.

"방위비 유용 최종 승인란." 그의 목소리가 대리석 계단을 타고 울렸다. "인장은 황태자 아드리안의 것이 아니다. 세 갈래 백합—황후 델피네의 인장이다."

군중이 술렁였다. 12대 귀족가문의 문장기 아래에서, 노귀족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정오의 광장은 언제나 그런 자리였다. 누가 제거되었는지,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온 제국에 각인시키는 무대.

카리엘은 그 무대의 규칙을 바꿨다.

"삼 년 뒤가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그녀가 광장 전체를 향해 돌아섰다.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감정을 태워 없앤 대가로. 그러나 그 무채색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황후 델피네는 자애 기금으로 은닉 자금을 굴렸고, 그것을 문제 삼은 로벨 가문을 불로 몰살했으며, 북부 방위비를 빼돌려 저를 반역자로 조작할 비용을 미리 지불했습니다. 판결문 작성, 증인 매수, 자백 조작, 처형 무대 설정—전부 그분의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황태자 전하는 그 도끼일 뿐이었고요."

아드리안이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에서 성군의 서사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 그가 델피네를 향해 돌아섰다. 창을 든 위병들조차 그를 겨누기 시작했다. "어머니, 인장이—왜 어머니 인장이—"

"닥쳐라." 델피네가 처음으로 우아함을 잃었다. 소매가 찢긴 팔이 떨렸다. 시엔나가 뿌리쳤던 그 소매였다. "이 아이가 판을 짜고—레온하르트 경이 북부의 법으로 제국을 흔들고—"

"흔든 게 아닙니다." 카리엘이 잘랐다. "폐하께서 만드신 규칙대로 심판받는 것뿐입니다.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삼는 제국법. 조작된 증언만으로 사람을 죽이던 그 사법 구조로—저를 죽이셨죠. 이번엔 서명된 문서가, 폐하를 이 자리에 세웠습니다."

*

계단 아래에서 시엔나가 올라왔다. 손목의 붕대가 풀려 있었다. 밧줄이 뼈까지 파고든 자국이 정오의 해 아래 드러났다.

"로벨 가문의 딸입니다." 시엔나가 광장을 향해 손목을 들어 보였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떨렸다. "삼 년 전, 자애 기금의 진실을 안 죄로 온 가문이 불에 탔습니다. 저는 흰 탑 옆방에 묶여 있었고—이 손목이 그 증인입니다. 황후 델피네가 불을 질렀습니다."

노귀족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하나. 문장기 아래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델피네가 물러섰다. 그녀의 시선이 광장을 훑었다. 군중의 얼굴, 귀족들의 얼굴, 아드리안의 무너진 얼굴, 조약서를 든 레온하르트, 그리고 카리엘. 자애로운 황후의 가면이 이제 그 얼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국 사법 위원회를 소집한다." 12대 가문 중 최장로가 계단 위에서 선언했다. "황후 델피네와 황태자 아드리안의 신병을 확보하라. 방위비 유용, 문서 조작, 로벨 가문 방화—전 항목을 심리한다."

위병들의 창이 방향을 틀었다. 델피네를 향해. 아드리안을 향해.

전생에 카리엘을 세웠던 처형대 위에서, 이번엔 다른 이름이 각인되고 있었다.

*

군중이 흩어지고, 광장에 정오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카리엘은 흰 처형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자신을 죽였던 자리. 이제는 자신이 살아남은 자리.

레온하르트가 조약서를 접어 넣으며 다가왔다.

"계약 이행 실적 네 건." 그가 말했다.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부칙에 따라, 카리엘 폰 아르덴은 조약법의 대등 계약 당사자다. 유용성 소진 조항은 이미 삭제되었다. 이제 당신을 팔 사람은 없다."

"당신이 저를 자산으로 재던 것도요?"

"자산은 검증이 끝나면 소모된다." 그가 그녀를 봤다. 저울질하던 눈이, 처음으로 저울을 내려놓은 듯했다. "당신은 소모되지 않았다. 종이는 사람이 쓴다고—언젠가 당신이 그랬지. 이 조약서를 쓴 건 당신이다. 나는 그 판단을 검증했을 뿐이고."

카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채색 세상 속에서, 그의 검은 외투만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감정은 태워 없앴다. 사람의 호의를 계산으로 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눌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계산도 아니었다. 그를 보며 처음으로, 언제 나를 배신할까,라는 물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남았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소각되고 남은 재 밑에서 되살아나는 한 조각.

신뢰였다.

"레온하르트 경." 카리엘이 조약서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서명과 그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 감정이 아니라 계약으로. 대등하게. "이 계약서, 조항을 하나 더 넣고 싶습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계산 없이 웃었다. 무채색 속에서. "그냥—앞으로도 나란히 서명하는 조항입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오래 봤다. 그리고 조약서를 다시 펼쳤다.

정오의 해가 두 개의 이름 위로 떨어졌다. 처형대의 미래는 지워졌다. 이 두 번째 삶은, 남의 손이 아니라—이제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안에서, 죽은 줄 알았던 감정 한 조각이 천천히, 다시 뛰기 시작했다.

〈끝〉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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