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오의 종이 열두 번 울렸다.

Vast imperial execution plaza at high noon, grey stone paving, a wooden scaffold at center, a huge crowd of onlookers pressed around the edges, bright harsh sunlight casting stark shadows, a large bronze bell tower in the background

카리엘 폰 아르덴은 흰 수의를 입고 광장 한가운데 무릎 꿇려 있었다. 목덜미에 걸린 나무 형틀이 살을 파고들었고, 등 뒤에서 처형인의 발소리가 자갈을 밟았다. 군중은 침을 삼키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제까지 황태자비 후보였던 여자, 오늘은 반역자.

Cariel in a white burial gown kneeling at the scaffold center, a wooden neck-pillory pressing into her skin, dark hair falling, defiant desperate expression, executioner's boots visible behind her on the gravel

"죄목을 읽어라."

Adrian standing on the raised platform in immaculate pressed crown-prince robes, a serene lazy smile on his face, sunlight behind him, looking down calmly

단상 위,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봄볕처럼 나른했다. 카리엘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흠 하나 없이 다림질된 황태자의 예복, 그 위로 얹힌 미소. 사람을 죽이는 자의 얼굴치고는 너무 평온했다.

Cariel raising her head to glare at Adrian, his eyes narrowing with amused interest, tension between them

"아드리안."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재미있다는 듯이.

"할 말이 있나, 카리엘? 없을 텐데. 자백서에 네 손으로 서명했잖아."

"그건 네가—"

말이 끝나기 전에 처형인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형틀에 눌렀다. 뺨이 축축한 나무에 닿았다. 냄새가 났다. 피와 톱밥과, 이 광장에 앞서 죽은 자들의 흔적. 칼이 들리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카리엘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아드리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저 미소를, 저 눈을, 다음 생이 있다면 반드시 기억하겠다고.

Extreme close-up on Cariel's wide unblinking eyes reflecting a rising blade, tears not falling, jaw clenched, the cold steel edge touching her neck, a blurred dark figure standing behind the platform far in the background

차가운 것이 목에 닿았다.

칼날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치솟는 순간—

세계가 뒤로 감겼다.

*

숨이 턱 막혔다.

카리엘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목을 움켜쥐었다. 잘려나갔어야 할 목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손끝에 맥박이 뛰었다. 살아 있다. 아니,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미 문양이 새겨진 천장. 은사로 짠 침구. 창밖으로 다듬어진 정원과 대리석 회랑. 로제라움 궁, 황태자비 후보들이 머무는 서관의 침소였다. 처형장의 톱밥 냄새 대신 라벤더 향이 났다.

침대 곁 탁자에 놓인 일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검증의 계절, 제일일(第一日).』

손이 떨렸다. 이건 3년 전이다. 그녀가 처음 이 궁에 발을 들인 날, 아드리안의 파혼과 반역죄 씌우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 죽기 직전 노려보던 그 눈이, 그 냉기가, 지금 이 순간까지 등줄기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되감겼다. 정말로 되감긴 것이다.

카리엘은 침구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웃어야 할지 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이 붙어 있다는 안도보다 먼저 치민 것은, 저 광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얼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되짚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Cariel bolting upright in a silver-thread bed, gasping, both hands clutching her intact throat, wide shocked eyes, rose-carved ceiling above, morning lavender-scented light through windows

누가 나를 죽였지.

기억은 안개 같았다. 재판 과정도, 자백서에 서명한 밤도, 뭉개진 형체로만 남아 있었다. 다만 어떤 순간들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광장의 칼날. 아드리안의 미소. 그리고—흰 탑에서 본 무언가.

시험 삼아, 그 또렷한 감각의 끝을 붙잡아 당겼다.

*

목에 다시 냉기가 닿았다.

"큭—"

카리엘은 목을 그러쥐며 침대 아래로 고꾸라졌다. 없던 칼날이 실제로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눈앞에 광장이 펼쳐졌다. 톱밥 냄새, 군중의 웅성거림, 등을 누르는 처형인의 무릎.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흘렀다. "자백서에 네 손으로 서명했잖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짜 통증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몸이 겪는 통증.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장면을 붙들었다. 아드리안의 눈 옆, 단상 뒤쪽. 무언가 있었다. 검은 옷자락. 그림자처럼 서 있던 누군가—

기억의 가장자리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종잇장 태우듯, 광장의 풍경 테두리가 오그라들며 타들어갔다. 단상 뒤의 형체가 재가 되어 흩어지기 직전, 카리엘은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지만 잡히는 건 하나뿐이었다.

'3년 뒤 나를 죽이는 건 아드리안이다.'

그것만 남기고 조각은 검은 재로 부서졌다.

카리엘은 바닥에 엎어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턱으로 흘러 대리석에 떨어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한 번 열었을 뿐인데 몸이 이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손바닥을 폈다 쥐었다. 방금 본 것을 정리했다. 죽음의 순간을 다시 열면 그 고통이 실시간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조각은 볼수록 타들어간다. 무한히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아까울 정도로 짧고, 대가는 즉각적이며, 한 번 태운 기억은 두 번 다시 온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

아드리안.

몸을 떨면서도 카리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저 남자가 3년 뒤 나를 처형대에 세운다면, 지금부터 저 남자와 반대편에 서는 모든 것이 내 무기다.

*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아가씨? 소리가 나서……."

시엔나가 세숫물 대야를 든 채 들어왔다. 카리엘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대야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달려왔다. 물이 절반쯤 쏟아졌다.

"세상에, 어디 편찮으세요? 얼굴이 백지장이에요. 의원을 부를게요—"

"부르지 마."

카리엘은 시엔나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 기둥을 짚어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방금 뭘 봤어? 내가 쓰러진 걸. 다른 사람한테 말했나?"

"네? 아뇨, 방금 들어왔는데……."

"그럼 됐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무한테도."

시엔나가 눈을 깜빡였다. 무뚝뚝한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가, 이내 고집스럽게 뭉쳤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 시녀예요. 아프시면 알려야죠. 궁정에서 병을 숨기다 쓰러지면 후보에서 밀려나요. 그럼 아가씨만 손해—"

"손해라."

카리엘은 그 단어를 씹었다. 이 여자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하지. 후보에서 밀려나면 곤란한 건 나지 시엔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걱정은 진심이 아니라 계산이다. 나를 통해 얻을 게 있으니까. 시녀가 상전에게 붙는 건 언제나 이유가 있으니까.

전생의 안개 낀 기억 속, 이 여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디서 봤더라. 끝까지—아니. 기억은 흐렸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날 광장에 나를 위해 서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네가 나를 위하는 척하는 건 뭘 원해서지?"

"……네?"

"급료? 승진? 아니면 내가 태자비가 됐을 때 얻을 자리? 말해. 값을 매겨줄 테니까. 어설프게 걱정하는 척하지 말고."

시엔나의 낯빛이 굳었다. 물기 어린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더니, 대야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손목에서 소맷단이 밀려나며 오래된 화상 흉터가 드러났다. 뒤틀린 살갗이 팔목을 감싸고 있었다. 카리엘은 그것을 흘긋 보았지만 별 뜻을 두지 않았다.

"아가씨는……."

시엔나가 낮게 말했다.

"사람이 손 내밀면 왜 그러는지부터 따지시네요. 좋아요. 값 안 받을게요. 안 받으니까 걱정도 안 하면 되겠죠. 물은 새로 떠 오겠습니다."

문이 쾅 닫혔다.

카리엘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화를 내고 나가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두려웠다. 언제 등을 돌릴지 계산이 서지 않으니까. 화를 내는 사람은 예측이 됐다. 등을 돌린다면 그건 이해관계가 어긋났을 때고, 그건 대비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다 배신해."

혼잣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 전생의 광장이 답이었다. 그 넓은 곳에 그녀 편은 한 사람도 없었다.

*

세면대 앞에 서서 카리엘은 거울을 보았다.

스물한 살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처형대에서 서른을 앞두고 죽었어야 할 여자가, 다시 스물하나의 피부를 하고 있었다. 눈 밑에 그늘도 없고, 뺨엔 아직 핏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목을 쓸었다. 매끈했다. 흉터도, 형틀 자국도 없었다.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아드리안이 적이라면, 이번 검증의 계절 동안 그의 신뢰를 얻는 척 파고들어 함정의 구조를 알아내야 했다. 전생에 그녀가 놓친 것들—누가 자백서를 조작했는지, 흰 탑에서 본 그 밀서가 무엇이었는지, 단상 뒤에 서 있던 검은 형체가 누구였는지. 역독은 짧고 아팠지만, 그것 말고는 무기가 없었다.

A close-up of an ornate schedule card lying on the bedside table, elegant calligraphy reading 'First Day', a small clock and lavender sprig beside it

문제는 역독이 그녀가 직접 겪은 조각만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전모는 여전히 안개였다. 그리고 미래를 바꾸는 순간, 이미 본 기억조차 어긋나기 시작할 터였다. 예를 들어 오늘 시엔나를 밀어낸 이 선택이, 전생과 다른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르게 흐르는 만큼, 그녀가 기억하는 미래는 낡은 지도가 되어갔다.

"괜찮아."

카리엘은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아드리안 하나만 확실하면 돼. 나머지는 만들면 되니까."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엔나의 종종거리는 걸음이 아니었다. 무겁고 균일한, 여러 사람의 발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봄볕처럼 나른한 목소리.

Cariel's hands gripping silver-thread bedding, tendons standing out on the backs of her hands, her face half in shadow with a cold calculating expression forming

카리엘의 손끝이 세면대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방금 전 역독에서 들었던, 형틀 위 그녀를 내려다보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문이 열렸다.

황태자의 예복을 입은 아드리안 폰 아르덴이 시종을 거느리고 문지방을 넘어섰다. 흠 하나 없이 다림질된 옷깃, 그 위로 얹힌 미소. 3년 뒤 카리엘의 목에 칼을 대라 명하기 직전에도 지었던, 바로 그 얼굴.

"오랜만이야, 카리엘."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카리엘의 심장이 목에 닿던 칼날처럼 얼어붙었다.

오랜만이야. 그 인사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에게는 검증의 계절 첫날, 후보를 격려하러 온 의례적인 방문이었다. 그러나 카리엘에게는 자신을 죽인 자가 죽음의 손자국을 채 지우기도 전에 다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손끝이 세면대 가장자리를 파고들었다. 아직 방금 역독의 통증이 심장 안쪽에 남아 뛰고 있었다. 저 미소를 향해 지금 당장 무언가를 던지고 싶은 충동과, 저 남자 앞에서 표정 하나 흘려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목구멍에서 부딪쳤다.

계산이 이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전하."

카리엘은 세면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무릎을 접어 인사했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그것을 예의 바른 조심스러움으로 위장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계산했다. 너무 낮으면 두려움을, 너무 높으면 오만을 드러낸다. 전생의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툴게 인사했었다. 사랑에 빠진 후보답게.

이번엔 아니었다.

"첫날부터 누추한 곳까지 걸음 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추하다니." 아드리안이 방 안을 둘러보며 웃었다. "서관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방을 네게 배정하라 일렀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나?"

Cariel collapsed off the bed onto marble floor, clutching her throat in real agony, the execution plaza scene bleeding around the edges of the frame with the crowd and scaffold, edges of the memory blackening and curling like burning paper, a dark cloth figure behind the platform dissolving into ash

거짓말이었다. 전생에 이 방을 배정한 건 그의 배려가 아니었다. 서관 동쪽 끝, 흰 탑과 가장 가까운 방. 감시가 쉽고, 무슨 일이 생겨도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자리. 그때는 몰랐다. 이제는 알았다.

"과분한 배려십니다."

카리엘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선을 그의 발끝에 두었다. 눈을 마주치면 방금 역독에서 본 형틀 위의 각도가 겹쳐질 것 같았다. 그러면 표정이 무너진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봐야 인사한 보람이 있지."

명령이었다. 부드러운 껍질을 쓴.

카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봄볕 같은 미소가 코앞에 있었다. 3년의 시간을 건너온 그 얼굴을 마주하자, 목덜미의 냉기가 되살아나 소름이 팔뚝을 훑었다. 그녀는 그것을 반가움으로 위장했다. 눈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풀고, 입술 끝을 올렸다. 완벽한 후보의 표정.

아드리안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너, 어딘가 달라졌군."

심장이 얼어붙었다. 아드리안은 아주 작은 변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전생의 카리엘은 첫날 이 자리에서 그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 차이를, 이 짐승 같은 감각은 벌써 읽어냈다.

"달라졌다니요."

카리엘은 곧장 받아쳤다. 목소리에 떨림을 싣지 않았다.

"긴장한 탓입니다. 전하를 이렇게 가까이 뵙는 건 처음이라,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서투른 것뿐이에요.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세요."

말끝에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서투름을 인정하는 척, 변수를 감정 탓으로 돌렸다. 아드리안이 원하는 건 완벽하게 통제되는 서사였다. 그 서사 안에서 그녀는 '긴장한 초짜 후보'여야 안전했다.

잠깐의 침묵. 시종의 발소리조차 멎었다.

이윽고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처음이지. 서툰 게 당연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카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저 손이 3년 뒤 처형인에게 신호를 보낸 손이었다. "긴장할 것 없어. 나는 네 편이니까."

네 편. 카리엘의 뱃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뒤틀렸다. 전생에도 저 남자는 정확히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필요가 다하자 그 편을, 반역자의 이름으로 광장에 세웠다.

"영광입니다, 전하."

그녀는 고개를 조금 더 기울여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살갗에 닿는 온기가 역겨웠지만, 밀어내는 대신 계산했다. 이 남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 함정의 구조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지금 뿌리치면 문은 닫힌다. 참아야 했다. 저 손이 다시 칼이 되기 전에, 먼저 그 안쪽을 뒤집어야 했다.

아드리안이 손을 거두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서사에 균열이 없다고 판단한 얼굴.

Adrian's fingers gently lifting Cariel's chin, her eyes disguising revulsion as a perfect candidate's tender smile, his eyes momentarily narrowing in scrutiny, tension crackling

"오늘 저녁, 후보들을 위한 만찬이 있다. 황후 폐하께서도 참석하시지." 그가 문 쪽으로 돌아서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특별히 너를 어머니께 소개하고 싶구나. 폐하께서도 너를 만나고 싶어 하셨어."

문지방에서 그가 잠깐 멈춰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델피네 황후 폐하께서, 유독 너를 궁금해하시더군."

문이 닫혔다.

카리엘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문을 노려보았다. 무릎에 힘이 풀려 침대 기둥을 붙들었다. 방금 전 아드리안 하나만 확실하면 된다고 되뇌었던 확신이, 그 마지막 한마디에 금이 갔다.

Cariel sprawled on the marble floor of the bedchamber, breathing raggedly, cold sweat dripping from her chin onto the marble, one hand splayed open, a twisted calculating smirk beginning at the corner of her mouth

델피네.

역독으로 태워버린 조각의 가장자리, 재가 되어 흩어지기 직전 단상 뒤에 서 있던 검은 형체. 그 옷자락. 그것이 정말 아드리안 혼자만의 손이었을까. 처형은 아들의 결벽이었나, 아니면 어머니가 짜준 무대였나.

Sienna rushing in with a wash basin, water spilling as she drops it beside the fallen Cariel, worried expression; Cariel pushing herself up against the bedpost coldly refusing help

확인하려면 그 조각을 다시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조각은 이미 태워졌다. 남은 건 한 문장뿐. 그리고 다시 열더라도, 심장이 또 한 번 칼날을 견뎌야 했다.

카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목을 쓸었다. 아직 붙어 있는 목이었다. 이번 생에서 저 만찬장에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인 무대의 진짜 연출자와 마주 앉는다는 뜻이었다.

Sienna's face hardening from concern to stubborn hurt, wiping wet hands on her apron, a glimpse of old twisted burn scar on her exposed wrist as the sleeve slides back

그런데도—그녀는 웃었다. 비틀린, 계산의 웃음이었다.

가겠어. 궁금해한다고? 좋아. 나도 네 얼굴이 궁금하던 참이야.

복도 저편에서 시엔나가 새 세숫물을 들고 돌아오는 발소리가 났다. 카리엘은 거울 쪽으로 다시 돌아서다가, 문득 세면대 위 은쟁반에 놓인 초대장을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없던 물건이었다. 아드리안의 시종이 두고 간 것이리라.

Cariel standing before a washstand mirror, gazing at her twenty-one-year-old reflection, fingers tracing her smooth unscarred neck, faint pale morning light, determined cold eyes

금박으로 눌린 봉랍.

카리엘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랍의 문양을 확인한 순간, 손끝이 얼어붙었다. 전생에, 흰 탑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보았던 두 번 접힌 밀서. 그 밀서를 봉하고 있던 바로 그 문양이, 지금 이 만찬 초대장 위에 똑같이 찍혀 있었다.

The chamber door opening as Adrian in immaculate crown-prince robes steps over the threshold followed by attendants, the same serene lazy smile, warm light framing him; Cariel gripping the washstand edge, face frozen
Cariel holding a gilded banquet invitation, extreme close-up on the pressed wax seal emblem in her trembling fingers, her wide horrified eyes reflected faintly, ghost image of the same seal on a folded secret letter overlaid in the corner, dread on her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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