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종이 열두 번 울렸다.
칼날의 냉기가 목덜미에 닿는 순간, 카리엘은 하늘이 지나치게 파랗다고 생각했다. 죽는 날의 하늘이 이토록 맑아도 되는가. 흰 수의는 땀과 흙으로 얼룩졌고, 무릎을 꿇린 나무 단상은 손톱 밑을 파고들 만큼 거칠었다. 광장을 메운 군중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러갔다.
"반역자 카리엘 폰 아르덴,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로—"
집행관의 목소리가 죄목을 낭독하는 동안, 그녀의 눈은 군중 너머 붉은 차양 아래를 더듬었다. 거기 그가 있었다. 황태자 아드리안. 자신의 약혼자였고,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마침내 자신에게 반역의 죄를 씌운 남자.
그가 무언가 입술을 움직였다. 거리가 멀어 소리는 닿지 않았으나, 카리엘은 그 입 모양을 읽었다.
'이건 내 뜻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인가. 목의 냉기가 살을 파고들기 직전,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뒤틀렸다. 네 뜻이 아니라고? 나를 흰 탑에 가둔 것도, 조작된 자백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이 단상에 세운 것도—전부 네가 아니라면.
칼이 떨어졌다.
세상이 뒤집혔다.
목이 잘려나가는 감각을 기다렸으나, 대신 그녀를 삼킨 것은 어둠이 아니라 눈부신 빛이었다. 시야가 위아래로 접혔다. 정오의 광장이, 파란 하늘이, 붉은 차양이 한꺼번에 물감처럼 흘러내렸다. 귓속에서 종소리가 거꾸로 울렸다.
그리고—
폭신했다.
카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목이 붙어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 아래로 만져지는 것은 나무 단상의 거친 결이 아니라, 매끄러운 실크 이불이었다.
"……하."
몸을 일으키자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방 안은 은은한 장미향으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금박을 입힌 장식이, 벽에는 그녀가 아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황궁 로제라움. 태자비 후보에게 배정되는 서쪽 별궁의 침실. 3년 전, 그녀가 검증의 계절을 시작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심장이 뛰다 못해 갈비뼈를 두드렸다. 손을 들어 목을 감쌌다. 상처는 없었다. 매끈했다. 살아 있었다.
"꿈인가."
혼잣말은 방 안에 힘없이 흩어졌다. 그러나 손바닥 밑에서 느껴지는 맥박은 지나치게 선명했고, 창밖에서 새어 드는 아침 햇살은 꿈이라기엔 너무 차가웠다. 카리엘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맨발에 닿는 대리석의 냉기가 발끝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그때였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열렸다.
문이 아니었다. 서랍도 아니었다. 표현할 말이 없었으나 굳이 형용하자면, 머릿속 어딘가에 잠겨 있던 방들이 일제히 존재를 드러낸 감각이었다. 하나, 둘, 셋—수십 개의 잠긴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냈다. 각각이 하나의 '장면'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두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죽음으로 향하던 결정적 순간들.
"이게……"
시험 삼아, 카리엘은 가장 앞에 놓인 조각 하나로 의식을 뻗었다.
열렸다.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눈앞의 침실이 사라지고, 대신 눈부신 흰 벽의 방—흰 탑의 심문실이 펼쳐졌다. 그녀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손목이 쓸려 피가 배어 나왔다. 맞은편에서 심문관이 두루마리를 펼쳐 낭독했다.
"백작가의 딸 카리엘 폰 아르덴은 황태자 전하의 침소에 독을 반입하고, 황실 전복을 도모하였으므로—죄목은 반역이다."
반역.
그 단어가 귓속에서 얼음처럼 쨍하고 울렸다. 실제 통증이 손목을 파고들었다. 사슬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이건 기억이 아니었다. 재생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3년 뒤의 심문실을 다시 살고 있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명치가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카리엘은 숨을 헐떡이며 조각을 닫았다.
침실로 돌아왔다. 무릎이 꺾여 그대로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손목을 확인했다. 흉터는 없었다. 그러나 방금 느낀 통증의 잔향이 뼈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되짚어 읽는……"
호흡이 겨우 가라앉았다. 이해가 됐다. 이것은 능력이었다. 죽음의 순간에 각성한, 전생을 되짚는 기억. 그녀가 직접 겪은 결정적 장면만이 조각으로 봉인되어 있고, 열람할 때마다 그 순간의 감각과 통증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공짜가 아니었다. 열 때마다 심장이 대가를 치른다.
그렇다면—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다. 앞으로 3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어떤 함정이 어디에 놓여 있을지.
카리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벽을 짚고 버텼다.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 열여덟의 얼굴이 있었다. 처형장의 초췌한 죄인이 아니었다. 검증의 계절을 앞둔, 볼에 아직 어린 티가 남은 태자비 후보의 얼굴. 그러나 그 눈만은 스물한 살에 죽은 여자의 것이었다.
거울에 손을 댔다. 유리는 차가웠다.
"착해지려는 게 아니야."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불쌍한 사람이 되어 동정받자는 것도 아니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릎 꿇자는 것도 아니야. 그런 건 이미 한 번 해봤어. 아무 소용 없었지."
전생의 그녀는 결백을 외쳤다. 눈물로 호소했다. 약혼자를 믿었고, 황후의 자애를 믿었고, 제국의 법을 믿었다. 그 믿음의 대가가 정오의 칼날이었다.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거울 속 여자가 마주 응시했다.
"누구에게도 팔려나가지 않아. 아버지의 정략에도, 황태자의 서사에도, 그 누구의 손에도. 오직 내 힘으로 두 번째 삶을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손끝이 유리를 긁었다.
"나를 죽인 자들에게, 정확히 되갚아준다."
되갚는다는 말에 온기는 없었다. 복수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웠다. 그저 셈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한 푼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머릿속 한구석에서 미세한 위화감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열람한 조각—심문실의 판결문. 두루마리 끝에 찍혀 있던 붉은 인장. 그것이 황태자의 문장이 아니었다. 세 갈래로 뻗은 백합. 자세히 보지 못하고 넘겼으나, 분명 아드리안의 검을 든 사자 문장은 아니었다. 누구의 것이었지.
기억을 다시 열어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카리엘은 손끝을 오므렸다. 안 된다. 열 때마다 심장이 대가를 치른다. 방금 한 번으로도 명치가 아직 얼얼했다. 남용하면 안 된다. 지금은 셈해둘 때가 아니라, 살아남을 준비를 할 때다.
그 위화감은 서랍 깊이 밀어 넣어두기로 했다. 언젠가 값을 매길 날이 온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카리엘의 손이 멈췄다.
느리고 규칙적인, 여러 마리의 말이 자갈길을 밟는 소리. 그녀는 그 소리를 알았다. 몸이 먼저 기억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별궁 앞뜰로 검은 마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문에는 검을 문 사자 문장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시종들이 도열해 허리를 숙였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내려서는 남자를 본 순간, 카리엘의 손톱이 커튼 천을 파고들었다.
아드리안 폰 아르덴.
전생에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필요가 다하자 반역의 죄목을 씌워 정오의 광장에 세운 남자. 은발이 아침 햇살에 부서졌다. 그가 별궁을 올려다보았다. 검증의 계절 첫날, 약혼자에게 인사를 하러 온 다정한 황태자의 걸음걸이. 3년 전 그날, 그녀는 저 남자를 창가에서 내려다보며 가슴이 뛰었었다.
이번엔 달랐다.
카리엘은 그 얼굴에서 광장의 입술을 읽었다. '이건 내 뜻이 아니었다.' 죽기 직전 흘러나온 그 한마디.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음은 이미 한 번 그녀를 죽였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아드리안이 도구였다면, 그 손을 쥐고 있던 자는 누구인가.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가까워졌다. 카리엘은 커튼에서 손을 뗐다. 심호흡을 했다. 얼굴에서 긴장을 지웠다. 두려움도, 증오도, 그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게. 이 궁에서는 표정 하나가 목숨값이었다.
거울을 힐끗 보았다. 열여덟의 미소가 걸렸다. 완벽했다.
발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췄다.
노크 소리. 세 번.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드리안이 문틀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그가 웃었다.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입술 끝을 완만하게 끌어올리며. 전생에 그녀를 무장 해제시켰던 바로 그 미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았다.
"카리엘. 잘 잤어? 오늘부터 우리, 같은 궁에서 지내게 됐네."
목소리마저 그때와 똑같았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물처럼 편안했다.
카리엘은 그 미소를 마주 보았다. 남들 눈엔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 곡선을.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그 미소가 완만하게 그어진 그 자리, 부드럽게 접힌 그 끝—거기에 정오의 칼날이 걸려 있었다. 3년 후 그녀의 목을 자를 그 칼이, 이미 그의 웃음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리엘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3년 전과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미소 지었다.
"전하.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지방을 넘어서는 그의 구두 굽이 대리석을 딛는 소리가,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드리안은 방 안으로 들어와 창가의 안락의자에 자연스럽게 몸을 기댔다. 마치 이 방이 제 것인 양, 그녀의 공간이 처음부터 제 소유였던 양. 전생의 카리엘은 그 태도에서 안정감을 느꼈었다. 이 남자의 세계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착각.
지금은 그저 셈을 했다. 그가 왜 왔는지, 무엇을 확인하러 왔는지.
"검증의 계절이 시작되면 다들 서로를 경계하지." 아드리안이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후보가 넷이야. 하나같이 만만찮은 가문 출신이고.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 카리엘, 너면 돼."
전생의 그날, 그는 정확히 이 말을 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카리엘은 그때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그 말이 어디로 향하는 문인지 알았다. 안심시켜 방심하게 만들고, 방심한 그녀를 이용하다, 다 쓴 뒤 버리는 문.
"과분한 말씀이세요." 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목소리에 적당한 떨림을 실었다. "다른 후보들에 비하면 저희 아르덴 백작가는……."
"가문 따위 중요하지 않아." 아드리안이 손을 저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웃음의 각도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런데 너, 오늘 좀 다르네."
카리엘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다르다니요?"
"글쎄."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눈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사냥꾼이 짐승의 걸음걸이에서 부상을 읽어내듯. "전에 봤을 땐 나를 보면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오늘은 눈빛이 조금…… 침착해."
작은 변수였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작은 변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미세한 어긋남도 용납하지 못하는 결벽. 전생에 그녀를 죽인 것도 결국 그 결벽이었다. 카리엘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냉기를 삼켰다. 여기서 흔들리면, 첫날부터 그의 의심 목록에 오른다.
그녀는 웃었다. 이번엔 눈물을 짜냈다. 손끝을 입가로 가져가며,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전하 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두려워서요. 그래서 오늘 아침엔 오히려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러 만든 물기였다. 역독을 열람할 때의 통증이 아직 명치에 남아 있어, 눈물을 짜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눈에서 경계가 스르르 풀렸다. 그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전생에 그녀가 그토록 매달렸던 온기. 이제는 그 온기 밑에 흐르는 계산이 만져졌다.
"바보 같긴. 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있잖아." 그가 손등을 어루만졌다. "나만 믿어."
나만 믿어.
그 말이 방아쇠였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조각 하나가 저 혼자 열리려 꿈틀거렸다. 이 손, 이 온기, '나만 믿어'라는 말—전생의 어느 밤에도 그는 똑같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조각이 열리려 했다. 카리엘은 이를 악물고 억눌렀다. 안 된다. 지금 열면 눈앞에서 표정이 무너진다. 남용하면 대가가 따른다.
그녀는 조각을 닫아걸고, 대신 잡힌 손을 살포시 되쥐었다.
"네, 전하."
아드리안이 만족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의심은 걷혔다. 그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참, 오늘 저녁 황후 폐하께서 후보들을 처소로 부르셨어. 다과회라더군." 그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긴장하지 마. 어머니는 자애로우신 분이니까. 너를 특히 아끼실 거야."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카리엘은 잡혔던 손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그의 온기가 남아 끈적하게 들러붙는 듯했다. 그녀는 손을 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황후 델피네의 다과회.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전생 검증의 계절 첫날, 그녀는 델피네의 처소에 불려갔다. 그리고 그 자애로운 미소 앞에서 찻잔을 받았다. 델피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딸처럼 여기마.' 카리엘은 그 말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소녀에게 그 한마디는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3년 뒤, 그 어머니라 불렀던 여자가—
카리엘의 손끝이 서늘해졌다. 아까 서랍에 밀어 넣었던 위화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판결문 끝에 찍혀 있던 인장. 검을 문 사자가 아니었다. 세 갈래로 뻗은 백합.
세 갈래 백합.
그것은 황후 델피네의 문장이었다.
카리엘은 벽을 짚었다. 숨이 얕아졌다. 확인하려면 조각을 열어야 한다. 심장이 또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지금 이 확신은 너무 위험해서, 값을 치르고서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손끝이 조각을 향해 뻗었다가—멈췄다.
아니다. 아직이다. 오늘 저녁, 그 여자의 얼굴을 직접 본다. 3년 만에, 살아 있는 눈으로. 그때 확인해도 늦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전생의 카리엘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처소에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안다. 저 다정한 초대가 자애가 아니라 저울질이라는 것을. 델피네는 첫날부터 후보들을 재고 있었다. 위협이 될 자와 도구가 될 자를 가려내려고.
그렇다면 오늘 저녁, 그녀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이번 생의 첫 갈림길이었다. 지나치게 침착하면 위협으로 분류된다—방금 아드리안이 눈치챘듯이. 지나치게 어리숙하면 도구로 낙점된다. 전생의 그녀가 그랬듯이.
카리엘은 거울 앞으로 돌아갔다. 열여덟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느 쪽도 아니어야 해."
위협도 도구도 아닌, 그 사이의 아주 좁은 길. 델피네의 눈에 '아직 값이 정해지지 않은 패'로 남는 것. 그래야 시간을 번다. 그래야 저 여자가 나를 처리 대상 목록에 올리기 전에, 이 궁을 벗어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북부 대공 레온하르트. 국경 조약법. 서명된 계약만이 진실인 곳.
전생의 어느 조각엔가, 그 이름이 스쳤던 기억이 있었다. 검증의 계절 중 어느 연회에서, 황실을 못마땅해하며 북부로 돌아가던 냉정한 남자. 그때 카리엘은 그를 그저 무례한 변방 귀족으로 여기고 지나쳤다. 지금은 달랐다. 제국의 칼날이 닿지 않는 유일한 그늘. 팔려나가지 않으면서 살아남을 유일한 문.
그 문을 열려면 계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계약을 맺으려면, 자신이 '조약에 유용한 자산'임을 증명해야 했다.
카리엘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깃펜과 잉크, 그리고 백지가 있었다. 그녀는 백지 한 장을 꺼내 앞에 놓았다. 앞으로 3년, 자신이 겪을 사건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둘 생각이었다. 역독을 함부로 열지 않고도 참고할 수 있도록. 조각을 여는 건 대가가 따르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종이에 옮기는 데는 값이 들지 않는다.
깃펜에 잉크를 찍었다. 첫 줄을 쓰려는데, 손이 멎었다.
방금 아드리안이 잡았던 손. 그가 '나만 믿어'라고 말할 때 열리려던 조각.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기억할 수 없었다. 그 조각의 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다른 조각들과 달리, 열리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
왜지.
전생에 직접 겪은 결정적 순간만이 조각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그 밤도 그녀가 직접 겪은 순간일 텐데. 왜 다른 조각은 손끝만 뻗어도 열리려 하는데, 그 밤의 조각만은 이토록 굳게 잠겨 있는가.
깃펜 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백지 위로 떨어졌다. 검은 얼룩이 종이에 번졌다.
카리엘은 그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등 뒤에서—
닫힌 방문 너머 복도에서, 조금 전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