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 종이를 나에게 넘기겠나?"
카리엘은 탁자 위의 문서를 도로 끌어당겼다. 손끝이 봉랍의 세 갈래 백합 위에 얹혔다. 촛불이 꺼진 방에서 창밖의 눈빛만이 서명 없는 종이의 흰 여백을 비췄다.
"넘기지 않겠습니다."
의자를 물리는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가 다시 초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살아나며 그의 얼굴이 반쪽만 드러났다.
"현명하군."
"다만." 카리엘은 문서를 외투 안쪽에 도로 넣었다. "당신은 방금 이걸 미완성 계약이라 했지요. 미완성이면 완성하면 됩니다. 서명이 없다면 서명을 찾고, 원본이 내 손에 없다면 손에 넣으면 됩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재는 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까와 달랐다. 문서를 잴 때의 눈이 아니라, 그 문서를 들고 온 사람을 잴 때의 눈이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가 촛대를 탁자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두 사람 사이에 빛의 원이 그어졌다. "나 역시 당신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 계약이 당신을 태워 없애는 것이라면, 나는 조건을 바꿀 것이다. 조약법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라고 만든 법이 아니다."
카리엘은 대답을 잃었다.
처음이었다. 세상의 색이 반쯤 바랜 눈으로도, 그 한마디가 색을 되찾은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심장이 눌린 자리에서 무언가가 미약하게 뛰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이름 붙일 수 없었다—이름 붙일 능력을 이미 태워 없앤 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감정이 아니라 정보로 처리했다. 이 남자는 조건을 바꿀 용의가 있다. 그 사실은 협상 카드다.
"그러면." 그녀는 목소리에서 흔들림을 걷어냈다. "새 조항을 역제안하겠습니다. 지금 이 반쪽을 실적으로 등재하지 않는 대신—사십팔 시간을 주십시오."
"사십팔 시간에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완전한 물증을 가져오겠습니다." 카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서명이 담긴 원본, 부호가 아닌 실명, 봉랍이 아닌 필적. 흰 탑 지하의 방위비 유용 최종 승인서. 그것을 사십팔 시간 안에 이 탁자 위에 올리겠습니다. 그때 검증하십시오. 지금 검증하면 반쪽짜리라 실패로 판정되겠지만, 그때는 완성품이니 통과됩니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레온하르트는 오래 말이 없었다. 국경 회계 장부를 넘길 때처럼, 그가 머릿속에서 조건과 이행 가능성을 저울에 올리는 게 보였다.
"만약."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십팔 시간 뒤에도 물증이 절반이라면."
"그때는 당신이 조약을 파기하십시오." 카리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목숨을 걸고 걸겠습니다. 완성하지 못하면, 당신 손에 보호를 잃는 것으로 끝냅니다. 어차피 사흘 뒤 심사대에서 잃을 목숨입니다. 이틀을 앞당기는 셈이지요."
촛불이 심지 끝에서 탁, 소리를 냈다.
레온하르트가 품에서 계약서 반쪽을 꺼냈다. 처음 얼음 창고에서 나눠 가진, 그녀가 외투에 지닌 것의 반대쪽 절반이었다. 그가 그 여백에 짧게 무언가를 적었다. 펜을 내려놓고 그녀 쪽으로 밀었다.
「부칙: 48시간 내 완전 물증 제출 시 제2조 검증 성립. 미제출 시 조약 즉시 파기.」
"서명하게." 그가 말했다. "이건 자비가 아니다. 조건이다."
카리엘은 펜을 들었다. 계약서의 맨 아래, 그가 처음 그녀에게 계약을 내밀던 밤 굳이 명시했던 그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자산의 유용성이 소진되면 조약은 자동 파기된다.'** 두 달 전에는 그 문장이 그저 냉정한 부기(附記)로 보였다. 지금은 다르게 읽혔다—그것은 처음부터 오늘 밤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칼날 위에 서명을 얹으려 하고 있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카리엘 폰 아르덴. 이름 다섯 글자가 자산의 목숨값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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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를 나오니 눈이 그쳐 있었다. 시엔나가 처마 밑에서 기다리다 성큼 다가왔다.
"얼굴색이 왜 그래요." 그녀는 카리엘의 팔을 붙잡았다. 손목의 붕대가 소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났다—화상이라 둘러대던, 실은 밧줄이 뼈까지 파고든 자국. "또 조각을 열었어요?"
"안 열었어." 카리엘은 팔을 빼지 않았다. 두 달 전이었다면 그 손을 뿌리쳤을 것이다. "열 시간을 벌었어. 아니, 사십팔 시간을. 대신 그 안에 흰 탑 지하 물증을 완성해야 해."
시엔나의 눈이 커졌다. "흰 탑이면—당신이 죽었던."
"그래서 네가 필요해." 카리엘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마주 봤다. "너는 탑 안을 알잖아. 옆방에 갇혀 있었으니까. 세탁방 아이로 드나들던 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회계실 문. 나는 그 길을 몰라. 전생에 나는 탑 위쪽 감방에만 있었고, 지하는 두 눈으로 담은 적이 없어. 담지 않은 건 조각에 없어."
"내가 지하로 들어가란 말이에요."
"들어가서 방위비 최종 승인서 원본을 찾아. 서명이 있는 걸로. 위험하면 물러나. 죽으라는 게 아니야." 카리엘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이 말은 계산해서 나온 게 아니었다. "너까지 잃을 순 없어."
시엔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붕대 감은 손목을 쓸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두 번은 안 남기고 갈 거예요, 이번엔. 당신이 나 남기고 탑에 남았던 것처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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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베르크는 궁정 기록실 뒤 회랑에서 만났다. 소심한 관료의 얼굴로 서류철을 안고 있었지만, 눈만은 값을 매기는 거래꾼의 눈이었다.
"자애 기금 장부는 이미 봤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건 지출 기록이지 승인 기록이 아니에요. 돈이 나갔다는 건 알아도, 누가 나가라 했는지는 다른 문서에 있습니다. 방위비 유용 승인은 국경 방위 협정 부칙 제9조에 따라—황후궁 회계실을 거칩니다. 그 원본은 기록실에 사본이 등록돼야 하는데, 없어요. 등록번호만 있고 문서는 비어 있습니다."
"누가 뺐지."
"등록번호를 대조하면 회수 기록이 나옵니다. 회수한 손을 찾으면, 그게 은폐한 손입니다." 율리안이 서류철을 고쳐 안았다. "그걸 찾아드리죠. 대가는 전과 같습니다—봉토 복권 정보."
"찾아. 이틀 안에." 카리엘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봤다. "율리안. 이건 정보 거래야. 신뢰가 아니라. 네가 이걸 다른 데 팔면, 나는 즉시 알게 돼."
율리안의 입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제가 왜—"
"팔 수도 있으니까." 카리엘은 담담하게 잘랐다. "너는 어느 편에든 붙을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그걸 알고 너를 쓰는 거고. 그러니 값이 맞는 동안만 정직해."
율리안은 대답 대신 서류철을 안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카리엘은 외투 안쪽의 계약서 반쪽을 눌렀다. 사십칠 시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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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이 지났다.
시엔나는 탑 지하까지 내려갔으나 회계실 문이 새 자물쇠로 바뀌어 있었다. 승인서는 없고, 대신 벽에 새겨진 반쪽짜리 문구—전생에 카리엘이 미처 읽지 못한 채 죽은 그 조약 문구를 필사해 왔다. 「…최종 승인은 궁 회계실을 경유하며, 원본은 제9조에 따라 봉인 보관…」 그 뒤가 벽이 깎여 지워져 있었다.
율리안은 등록번호를 대조해 회수 기록 하나를 찾아냈다. 회수 서명은 판독 불가하게 뭉개져 있었지만, 회수 일자가 남아 있었다—삼 년 전, 카리엘 처형 넉 달 전.
두 조각이 손에 들어왔으나, 결정적 연결 고리가 없었다. 회수한 손과 승인한 손이 같다는 증거가 없었다. 카리엘은 별채 협상실에 세 개의 문서 조각을 늘어놓았다. 벽에 새긴 문구, 회수 기록, 서명 없는 지출 문서. 셋을 잇는 다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그 다리는 그녀의 기억 속에만 있었다.
카리엘은 눈을 감았다. 역독을 여는 건 감정 기억을 태우는 일이다. 이미 반쯤 바랜 세상, 이미 눌린 심장. 조각을 무리하게 열면 사람을 믿는 능력이 더 소각된다. 그래서 그녀는 규칙을 정했다. **딱 한 번만.** 온갖 장면을 헤집는 대신, 단 하나—처형 넉 달 전, 흰 탑 회계실 앞에서 그녀가 두 눈으로 담았던 그 순간만.
전생의 그날, 그녀는 아드리안을 따라 탑에 들렀다가 회계실 문 앞에서 한 남자가 서류함을 들고 나오는 걸 봤다. 그때는 무심히 지나쳤다. 지금은 그 장면 하나에 다리가 걸려 있다.
조각이 열렸다.
냉기가 목덜미를 훑었다. 세상의 남은 색이 마저 빠지며 회색이 되었다. 심장이 안쪽으로 눌려 숨이 막혔다. 카리엘은 이를 악물고 그 회색 화면에 집중했다. 회계실 문. 나오는 남자. 그가 든 서류함. 함 옆면에 붙은 봉인표—거기 등록번호가 있었다. 율리안이 찾아온 회수 기록의 번호와 같은 번호. 그리고 그 남자가 서류함을 넘긴 상대는 회랑 끝에 서 있었다. 자애로운 미소로, 손수 서류를 받아 소맷자락에 넣던 사람.
조각이 닫혔다.
카리엘은 탁자에 손을 짚고 헐떡였다. 눈앞이 완전히 무채색이었다. 이 한 번의 대가로, 그녀는 방금 무엇을 잃었을까—누군가에 대한 마지막 온기 한 조각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다리는 완성됐다. 회수한 손과 승인한 손, 지출을 명한 손이 하나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얼굴을 아직 문서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억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서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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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이 마지막 조각을 들고 온 것은 사십팔 시간의 마흔여섯 시간째였다.
그는 회수 기록의 원본—뭉개진 서명 아래, 화학 처리로 되살린 필적 흔적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의 걸음이 협상실 문 앞에서 멈췄다. 손이 서류철 위에서 미묘하게 떨렸다.
카리엘은 그 떨림을 봤다.
"율리안."
"…황후궁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 정보를 넘기면, 우리 가문 봉토를 그날로 복권해 주겠다고. 당신이 주겠다는 정보보다 훨씬 확실한 약속이었어요. 봉랍까지 찍힌."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래서." 카리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넘겼나."
율리안의 손이 서류철 위에서 봉랍을 만졌다. 황후궁의 세 갈래 백합 봉랍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가 다른 손으로 꺼내 든 것—카리엘이 그에게 처음 도구 계약을 맺을 때 찍어 준 그녀의 인장이 든 봉투였다. 이름이 아닌, 그저 그녀의 문장이 눌린 빈 봉랍. 율리안의 시선이 그 위에서 멈췄다. 손이 그 위에서 굳었다.
"…이상하죠."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 쪽은 저쪽인데, 손이 안 움직입니다. 배신할 때마다 이래요. 마지막 순간에 손이."
그는 황후궁 봉랍이 찍힌 서류를 소맷자락에 넣지 않았다. 대신 되살린 필적 흔적을 탁자에 올렸다.
"넘기지 않았습니다." 율리안이 말했다. "아직은. 봉토는 당신이 갚아요. 당신 값이 더 비싸질 것 같으니까."
카리엘은 그를 봤다. 전생의 배신자. 이번 생에도 흔들리는 손. 그러나 그 손이 이번엔 멈췄다.
"비싸게 갚지."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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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팔 시간째. 정오 십오 분 전.
카리엘은 대공가 별채 탁자에 네 개의 문서를 정렬했다. 벽 문구 필사본, 삼 년 전 회수 기록, 서명 없는 지출 문서, 그리고 되살린 필적 흔적. 네 조각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졌다. 방위비를 유용해, 그 돈으로 삼 년 뒤 카리엘 처형의 조작 증언 비용을 미리 지출한—그 전 과정의 승인 사슬이.
레온하르트가 문서를 하나씩 촛불에 비췄다. 회계 장부를 검토할 때의 그 냉정한 손놀림으로. 오래 봤다. 서명란에 시선이 머무를 때마다, 그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필적이 일치한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회수한 손과 지출을 명한 손이. 등록번호가 세 문서에서 같다. 이건—" 그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완성된 계약이다. 검증 통과다."
카리엘은 숨을 뱉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봤다. 이번엔 문서 너머로 보는 눈이 아니었다.
"두 달 전 나는 너를 조약에 유용한 자산으로 등재했다." 그가 말했다. "정보를 파는 자로. 그 아래 나는 이렇게 적었지—유용성이 소진되면 조약은 자동 파기된다고. 자산은 소진되면 버리는 것이니까."
그가 계약서 반쪽을 꺼내, 그 조항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이 문서는 자산이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자산은 지시받은 정보를 나른다. 협상가는 없는 다리를 만든다. 파기 위기를 조건으로 되받아치고, 사십팔 시간에 사슬을 완성했다." 그의 펜이 움직였다. "나는 오늘 너를 다시 평가한다. 소진되면 버리는 자산이 아니라—조건을 협상하는 상대로."
「부칙 개정: 계약 당사자를 '자산'에서 '대등 협상가'로 격상. 유용성 소진 조항 삭제. 관계는 실적이 아니라 상호 조건으로 규정한다.」
카리엘은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색이 바랜 눈에도, 그 잉크만은 검게 살아 있었다. 두 달간 그녀는 팔려나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누군가 그녀를 물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저울에 올렸다.
"당신은."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왜 조건을 삭제하지."
"삭제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펜을 내려놓았다. "바꿨다. 소모품 조항을, 대등 조항으로. 조약법은 사람을 태우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건 자비가 아니라—더 정확한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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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카리엘은 완성된 물증을 마지막으로 대조했다.
혹시 놓친 연결이 없는지, 심사대에서 뒤집힐 틈이 없는지. 지출 문서, 회수 기록, 필적. 사슬을 되짚어 올라가다, 되살린 필적 흔적의 맨 아래—최종 승인란에 이르렀다.
거기, 뭉개진 서명 아래 화학 처리로 떠오른 마지막 도장이 있었다.
봉랍이 아니었다. 부호가 아니었다. 눌러 찍힌 정식 승인 인장. 세 갈래 백합이 감싼 그 한가운데.
카리엘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이 인장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전생, 목에 칼날이 닿기 직전 흰 수의를 입고 광장에 세워졌던 그날—그녀의 죄목이 적힌 판결문 맨 아래 찍혀 있던 바로 그 인장. 그때 그녀는 그것이 아드리안의 것이라 믿었다. 믿고 죽었다. 그러나 회귀 첫날, 조각을 되짚었을 때 스쳤던 미세한 위화감. 그 판결문의 인장은 황태자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 위화감의 정체가 세 갈래 백합 한가운데서 또렷이 떠올랐다.
황후 델피네의 인장.
전모의 배후가, 그녀를 두 번 죽이려 한 손이, 처음부터 이 서명란에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