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카리엘은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문틈으로 새어드는 횃불의 붉은 선을 눈으로 좇았다. 하나, 둘, 넷—발이 넷. 무도회에서 델피네를 물러서게 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 속도라니.
"율리안의 쪽지대로군."
낮게 뱉은 말에 침대 그늘에서 시엔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대꾸 없이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문이 두드려졌다. 정중하게, 세 번.
"아르덴 영애. 황후 폐하의 명입니다. 광장 청문에 앞서 신병을 확보하라는 어명이 내려왔습니다."
새 죄목이었다. 카리엘은 그 목소리를 알지 못했다. 전생의 어느 조각에도 없는 얼굴, 없는 이름, 없는 순간. 전생에 델피네는 이 시점에 카리엘을 이렇게 다급히 잡아들이지 않았다. 흰 탑 유폐는 훨씬 뒤였고, 죄목도 '반역'이었지 신병 확보 따위가 아니었다.
미래가 어긋나고 있었다. 그녀가 어긋내고 있었다.
카리엘은 눈을 감고 역독을 열었다. '무도회 이후 델피네의 다음 수'—그 조각을 붙들려 했다. 전생에도 무도회는 있었으니, 그 뒤의 델피네를 본 기억이 있을 터였다.
기억이 펼쳐졌다. 대리석 회랑, 장미향, 황후의 웃는 입매—
그리고 조각의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갔다. 종이를 촛불에 댄 것처럼. 회랑이 오그라들고 황후의 얼굴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손을 뻗어도 붙잡을 것이 없었다. 남은 건 그을린 냄새와, 목덜미에 닿는 칼날의 냉기뿐이었다.
"큭—"
관자놀이가 터질 듯 조여왔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고, 다음 박자를 세게 내리쳤다. 카리엘은 화장대 모서리를 붙들었다.
기억이 없어졌다. 조각 자체가.
미래를 바꾼 만큼, 전생의 그 미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미래였다. 델피네가 무도회에서 물러선 순간, 그 뒤에 이어졌던 전생의 델피네도 함께 소멸한 것이다. 1화에서 처음 보았던 그 검게 타는 가장자리—경고였다. 그리고 지금, 결정적인 순간에 실현됐다.
그녀에게 이제 델피네의 다음 수를 알려줄 기억은 없었다.
"영애?" 문 밖의 목소리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열어."
카리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세웠다. 시엔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제정신이에요?"
"조약법 후견이 걸려 있어. 대공의 인장으로 서명된 임시 후견은 제국 사법권 밖이야. 저들이 나를 데려가는 순간, 그건 조약법 침해가 돼." 그녀는 코르셋 안쪽에서 접힌 서약서를 꺼내 손에 쥐었다. "저들은 그걸 몰라. 델피네가 새 죄목을 만들어냈다면, 그 죄목은 조약법을 계산에 넣지 않은 거야."
문이 열렸다. 근위병 넷. 앞선 자가 소환장을 펼쳤다.
"위조 통행증 사용 및 국경 무단 이탈. 제국 반역법 제7조."
새로운 죄목. 전생엔 없던 죄목. 델피네는 카리엘이 궁을 탈출했다는 '이번 생의 새 사실'을 근거로 그물을 다시 짰다. 카리엘이 만든 변수가, 카리엘을 겨눈 새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통행증은 위조가 아니야." 카리엘은 서약서를 병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북부 대공령 임시 후견 서약. 서명자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 이 순간부터 나는 조약법의 보호 아래 있고, 나를 강제 연행하는 자는 국경 조약법 위반으로 대공령에 신병이 넘어가. 조약법 위반의 형은—너희 반역법 제7조와 같은, 참수다."
병사의 눈이 서약서 하단의 검은 밀랍 인장에 멎었다. 손끝이 흔들렸다.
"이건…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해. 밤새 걸리겠지. 그동안 너희 넷 중 누가 대공령 참수 명단에 오를지 제비뽑기라도 해두고." 그녀는 문을 잡았다. "황후께 전해. 죄목을 새로 만들 거면, 법도 새로 만들어 오라고."
문이 닫혔다. 군화 소리가 멀어졌다.
카리엘의 무릎이 꺾였다.
"영애!" 시엔나가 그녀를 받쳤다. "얼굴이—피가 하나도 없어요."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안쪽에서 두드렸다. 조각이 타버린 자리, 델피네의 다음 수를 알 방법이 사라진 자리가 텅 비어 검게 아팠다. "델피네가 다음에 뭘 할지, 알아야 해. 청문이 사흘 뒤야. 위조 인장 함정—율리안이 경고한. 전생 조각에… 델피네가 누구한테 인장을 넘기는 장면이 있었을 거야. 무도회 밤에 내가 봤어. 분명—"
"안 돼요." 시엔나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또 그 능력 쓰려는 거죠. 아까 그 표정, 나 다 봤어요. 무도회에서도, 지금도, 당신은 뭔가 보이지 않는 걸 붙들다가 무너져요."
"놔."
"당신이 무너지면 누가 청문에 서요?"
카리엘은 시엔나의 손을 뿌리치고 눈을 감았다. '무도회 밤, 델피네와 인장'—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억이 열렸다. 대리석 기둥 그늘, 델피네의 손이 누군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넨다. 상자 안에 인장. 받는 자의 얼굴이—
가장자리가 탔다. 델피네의 손목부터 재가 되어 흩어졌다. 받는 자의 얼굴이 검게 문드러지며 지워졌다. 조각이 오그라들고,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조각도 이번 생에 무도회가 달라졌으니—달라진 만큼 태워지고 있었다.
목에 칼날이 닿았다. 정오의 광장. 흰 수의. 군중의 웅성거림. 냉기가 목덜미를 타고 척추까지 내려갔다. 카리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처형의 통증이 실시간으로, 지금 이 방에서, 그녀의 목을 다시 갈랐다.
"카리엘!"
시엔나의 목소리가 멀었다. 카리엘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붉었다가 검었다가, 방인지 광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리석 바닥이 차가웠다. 아니, 카펫이었다. 아니—
"광장이… 정오야." 그녀는 헛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칼이 와. 시엔나, 칼이 와."
"여긴 광장이 아니에요! 여긴 카를슈타인, 당신 방이에요. 눈 떠요. 나 봐요."
젖은 천이 이마에 닿았다. 시엔나가 그녀를 무릎에 뉘고,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 손목—소맷단이 걷어 올라가 있었다. 손목 안쪽까지 감긴 오래된 화상 흉터. 불에 녹아 붙은 살이 초의 불빛에 번들거렸다.
카리엘의 흐린 눈이 그 흉터에 멎었다.
"그 손목…"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굴 감쌌어. 불 속에서."
시엔나의 손이 멈췄다. 흉터를 감추듯 소매를 당겼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숨 쉬어요. 천천히."
카리엘은 시엔나의 손을 붙잡았다. 계산이 아니었다. 값을 매기려는 것도 아니었다. 심장이 부서지는 와중에, 이 방에서 자기 무릎을 내주고 이마를 닦아주는 이 여자의 손이—따뜻했다. 그 온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저울질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엔나."
이름이었다. '시녀'도 '감시자'도 '델피네의 눈'도 아닌, 이름.
시엔나의 어깨가 굳었다. 카리엘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두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네."
"기억이… 타고 있어. 델피네가 뭘 할지, 이젠 볼 수가 없어. 내가 미래를 바꿀 때마다—전생이 없어져. 내 무기가 없어져." 카리엘은 웃으려다 기침을 했다. "혼자선 못 막아. 처음으로… 그걸 알겠어."
"그럼 혼자 하지 마요." 시엔나가 그녀를 더 단단히 안았다. "왜 매번 혼자 짊어지려 들어요, 바보같이."
문이 열렸다. 노크 없이.
레온하르트가 들어섰다. 검은 현무암 같은 눈이 쓰러진 카리엘과, 그녀를 안은 시엔나와, 바닥에 떨어진 서약서를 차례로 훑었다. 그는 무릎을 꿇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근위병 넷이 물러갔다. 후견 서약을 근거로. 계약은 이행되고 있군." 그가 서약서를 주워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무슨…" 카리엘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심장이 다시 조였다.
"움직이지 마." 레온하르트의 명령은 감정이 없었다. "너의 심장 부담은 계약 여백에 내가 '관찰 대상'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지금 관찰 결과가 나왔어. 너의 정보원—그 죽음의 기억이라는 것—은 네가 미래를 바꿀수록 소멸한다. 맞나?"
카리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델피네는 전생에 없던 죄목과 자객을 만들어냈다. 네 기억엔 그 대응이 없다. 즉 너의 정보 자산은 나와 계약한 순간부터 가치가 매일 줄어든다." 레온하르트는 서약서를 탁자에 놓았다. "조약법상, 자산 가치가 소멸하면 계약은 무효다. 무효가 되면 후견도 사라지고, 넌 다시 제국 사법권으로 돌아간다."
시엔나가 카리엘을 감싸며 노려보았다.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을 내치겠다는 거예요?"
"아니."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처음 본 것처럼 눈길을 주었다. "조약법에는 '조건 재해석' 조항이 있다. 자산의 형태가 바뀌면, 계약 당사자 합의하에 조건을 다시 쓸 수 있어." 그가 카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너의 자산이 '죽음의 기억'이라는 단일 항목이라면, 그건 소멸한다. 하지만 자산을 '기억에서 도출한 정보망 전체'로 재정의하면—"
"기억이 아니라, 사람." 카리엘이 겨우 소리를 냈다. "기억이 알려주지 못하는 변수를, 사람으로 메운다."
"율리안 베르크의 경고. 시엔나 로벨의 내부 지식. 나의 조약법 권한. 그리고 너의 판단." 레온하르트는 손가락으로 여백을 짚었다. "이 넷을 계약 자산으로 재기재하면, 델피네가 만드는 새 변수 하나하나에 대응할 수 있다. 혼자 도박하는 기억 대신, 진영이 메우는 정보로. 서명하겠나?"
카리엘은 시엔나의 손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전생 내내, 그녀는 손을 내미는 자마다 계산했다. 언제 팔아넘길까. 얼마에 넘길까. 그렇게 진짜 아군을 제 손으로 밀어냈고, 흰 탑에 홀로 갇혔고, 홀로 목이 잘렸다.
기억이 무기였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기억이 타 없어지는 지금—처음으로, 옆에 사람이 있었다.
"…서명해." 카리엘이 말했다. "재해석 조항. 자산은 기억이 아니라, 이 방에 있는 사람들."
레온하르트가 펜을 꺼냈다. 여백에 조건을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엔 온기가 없었지만, 그가 방금 카리엘에게 준 것은—혼자 죽지 않을 방법이었다.
밤이 깊었다. 진통제 대신 시엔나가 끓인 뜨거운 물이 카리엘의 손에 쥐어졌다. 심장의 두드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고, 이번엔 광장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엔나는 침대맡에 앉아 카리엘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창밖으로 카를슈타인의 눈이 소리 없이 내렸다. 그녀는 소매를 걷었다. 화상 흉터가 촛불에 드러났다. 손끝으로 그 흉터를 천천히 쓸며, 잠든 카리엘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게, 시엔나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흰 탑에서 당신을 잃지 않아."
카리엘의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결이었는지,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