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붉은 신호가 겹쳐졌던 잔상이 아직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을 때, 작업실 문이 두드림도 없이 열렸다.
"불은 켜두는 게 좋을 텐데. 어둠 속에서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나."

정찰자였다. 낮에 소환장을 던지고 갔던 회색 정장의 남자가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서 있었다. 서율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조각의 손끝을 가렸다. 붉은 점이 타올랐던 자리가 아직 미지근했다.

"소환장은 받았을 텐데, 아직 마음을 못 정한 얼굴이군." 남자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구두 굽이 나무 바닥을 딱, 딱 찍었다. "말해두지. 이건 초대가 아니야. 넌 이제 명부에 이름이 없어. 조각가도, 시민도 아니야.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가 품에서 두 번째 봉투를 꺼내 서율의 발치에 던졌다. 붉은 인장이 두 개 겹쳐 찍힌 강제 소환장이었다.

"—너는 사람으로도 등록될 수 없어. 이대로면 넌 그냥 '위험물'로 처리돼. 부수는 데 허가 따위 필요 없는 물건 말이야."
서율의 어깨 위에서 은빛 새가 날개를 반쯤 펼쳤다. 새의 시선은 남자의 목울대에 고정돼 있었다.

"내일 아침, 서부 지부로 와. 늦으면 우리가 데리러 온다. 그땐 걸어서 못 나올 테고."
문이 닫혔다. 서율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손이 아니라 팔 전체가 떨렸다—왼팔은 여전히 잿빛으로 굳어 감각이 없었지만, 성한 오른손이 그 몫까지 떨고 있었다.

'가야 한다.'
협회가 부르는 자리와 아버지가 감춘 좌표. 두 붉은 빛이 같은 곳을 향했다면, 그 문 안에 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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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지부는 낡은 미술관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대리석 계단, 유리 천장, 그 아래 늘어선 조각상들. 서율이 정문을 지나 로비에 들어서자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저게 그 사칭자야?"

"달빛석이 붉은 균열을 냈다며. 몰락한 집 자식이 아버지 흉내라도 내려던 거지."
"팔 봐. 벌써 저 꼴이면 오래 못 버텨."

속삭임이 등에 꽂혔다. 서율은 왼팔 소매를 끌어당겨 잿빛 피부를 가렸다. 시선이 팔에 몰릴수록 목뒤가 뜨거워졌다. 반박하고 싶었다. 나는 진짜다, 힘이 있다—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수록 우스워진다는 걸 어제 배웠다. 달빛석 앞에서 아무리 진짜라 외쳐도 붉은 균열 하나가 그를 사기꾼으로 만들었으니까.
로비 한복판에 청년 하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값비싼 회색 코트, 손끝에 낀 은빛 골무. 그가 서율을 위아래로 훑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직접 걸어 들어올 배짱은 있네. 명부에도 없는 게."
"…누구지."

"이름은 알 것 없고." 청년이 손끝의 골무를 딱, 튕겼다. "여기까지 온 손님을 그냥 보내면 예의가 아니잖아. 환영 선물을 준비했어."
그의 손이 로비 구석의 사자 석상을 가리켰다. 순간 석상의 눈에 붉은 빛이 스몄다. 대리석 근육이 부풀고, 앞발이 받침대를 긁으며 내려왔다. 돌 갈리는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구경꾼들이 물러섰다. 누구도 서율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은 웃었다.
"조각 사역물이잖아. 저 사기꾼 저거 어쩌나 보자."

사자가 도약했다.

서율은 몸을 던져 기둥 뒤로 굴렀다. 앞발이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자 파편이 튀었다. 어깨 위 새가 날아올라 사자의 눈앞을 스쳤지만, 돌짐승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서율을 찾았다.

'달빛도 없다. 지금은 낮이야.'
각성 조건이 서율의 머릿속을 스쳤다. 푸른 보름달과 조각 표면의 문양이 응답할 때. 지금은 유리 천장으로 든 흐린 햇빛뿐이었다. 힘을 쓸 수 없다면 그는 그냥 팔 하나 굳은 무등록자였다.

사자가 다시 덮쳐왔다. 서율은 바닥을 굴러 벽에 등을 붙였고, 손이 우연히 무언가에 닿았다. 미술관 복원실 앞에 쌓인 석고 덩어리—작업용 소재였다.

숨이 멎었다.
'달이 없으면… 매개체가 있으면 된다.'

품속에서 그것이 뜨거워졌다. 어제 아버지 조각에서 떨어져 나온 자갈만 한 파편. 달빛석의 조각이었다. 서율은 그것을 왼손—굳은 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을 석고 덩어리에 얹었다.

그 순간,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스스로 석고를 파고들어 형상을 뜯어냈다. 날개, 부리, 발톱. 어깨 위 새와 똑같은 실루엣이 순식간에 깎여 나갔다. 서율의 눈앞에 은빛 선이 흘렀고, 완성된 조각이 손끝을 떠나며—

빛으로 터졌다.

두 마리째 은빛 새가 실체화됐다. 이번엔 손바닥 크기가 아니었다. 사자만 한 은빛 매가 날개를 펼치며 사역물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돌과 은빛이 부딪치며 로비가 흔들렸다. 매가 사자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은빛 발톱이 사자의 붉은 눈을 짓눌렀다.
"멈춰!"

골무 낀 청년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서율이 마지막으로 손끝을 튕기자, 은빛 매가 사자의 심장부—붉은 빛이 고인 자리—를 관통했다. 붉은 빛이 꺼졌다. 대리석 사자가 원래의 석상으로 돌아가며 로비 바닥에 쿵, 주저앉았다.

정적.
방금 웃던 협회원들이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서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기꾼이라고 했지."
그의 목소리가 텅 빈 로비를 울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골무 낀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롱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물러선 발걸음과 벌어진 입뿐이었다.

그러나 서율은 승리를 만끽할 겨를이 없었다.
왼손이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가 이내 아무 감각도 없어졌다. 그는 굳은 손을 펼쳤다. 손등—어제까지 성했던 손등에, 손톱만 한 잿빛 반점이 새로 돋아 있었다. 매끄럽던 피부가 대리석 표면처럼 오돌토돌해졌고, 반점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결정을 이루며 반짝였다.

'또다.'
팔꿈치 아래는 이미 굳었는데, 이제 손등까지. 힘을 쓴 만큼 몸이 돌이 된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조각칼을 쥔 채 손이 하얗게 굳어 죽었던 아버지처럼.

서율은 반점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감각이 없었다. 관절을 굽히자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규정 위반이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로비를 갈랐다.
계단 위에서 노인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은발을 뒤로 넘긴 마른 체구, 손에는 낡은 가죽 장정의 두꺼운 책. 협회원들이 일제히 길을 텄다.
"강 심사관님."

골무 낀 청년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강도현이라 불린 노인은 그를 본체만체하고 주저앉은 사자 석상 앞에 멈춰 섰다. 손끝으로 사자의 눈을 훑더니, 아직 미지근한 붉은 잔열을 확인했다.
"유겐의 골무 자국이군. 사역물 무단 기동. 지부 로비 파손. 미등록자 유인 공격." 그가 청년을 돌아보았다. "네 스승에게 전해라. 견제도 규정 안에서 하라고."
청년의 턱이 굳었다. 그는 무어라 반박하려다 도현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인사도 없이 로비를 빠져나갔다.

도현이 이번엔 서율을 향했다. 노인의 눈이 서율의 왼손 손등에 새로 돋은 반점에 잠시 머물렀다.
"석고로 실체화라. 달도 없이. 매개체는 손안의 그거겠지."
서율은 반사적으로 파편을 쥔 손을 뒤로 감췄다.

"경계할 것 없다. 뺏으려는 게 아니니." 도현이 책을 옆구리에 고쳐 끼웠다. "다만 묻지. 방금 그 힘, 대가가 손등이더냐. 아니면 다른 데도 굳었나."
낯선 노인이 정확히 그것을 물었다. 서율의 목이 마르게 조여왔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오래 봐왔으니까." 도현의 시선이 흐려졌다가 이내 돌아왔다. "네 손을 보고도 몰랐다면 나는 심사관 자격이 없지. 그 반점, 오늘 처음 손등에 생긴 거지? 팔은 어제였고."
서율은 부정하지 못했다. 노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도현이 가죽 책을 펼쳤다. 손가락이 낡은 페이지 사이를 정확히 짚어 넘겼다. 제9조라 적힌 항목에서 멈췄다.

"넌 지금 명부에 없어. 정규 심사를 받으려 해도 신원 등록부터 막힌다. 사칭자로 낙인찍혔으니 재신청은 최소 3년 유예. 그 전에 넌 위험물로 처리되겠지." 노인이 페이지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하지만 길이 하나 있다. 계승 예외 조항."
"계승…?"
"등록된 조각가의 직계 혈통은, 소정의 물증을 갖추면 정규 심사와 별개로 계승 심사를 청원할 수 있다." 도현이 책을 덮었다. "네 아버지가 등록 조각가였다는 물증만 대면, 넌 사칭자 낙인과 무관하게 심사대에 설 수 있어. 방금 그 실체화를 협회 공식 입회하에 재현하면… 세상이 어쩔 수 없이 널 인정하게 되는 거다. 네가 아무리 진짜라 외쳐도 안 믿던 자들이."

서율의 심장이 뛰었다. 인정. 어제 달빛석 앞에서 그토록 목말라했던 그 단어.
"신청서는 접수처에 있다. 결정은 네가 해."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은발이 유리 천장의 흐린 빛 속으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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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처 창구에 앉은 직원은 서율의 왼팔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서류를 밀어주었다. 계승 심사 청원서. 서율은 오른손으로 펜을 쥐었다.
'이걸 서명하면, 나는 또 저들의 승인을 기다리는 자가 된다.'

머릿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말렸다. 어제 달빛석은 진짜인 그를 사기꾼으로 만들었다. 협회의 판정이 뒤틀렸다는 걸 그는 몸으로 겪었다. 그런데도 다시 그들의 도장을 받으려 줄을 서는가.
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더 컸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 위험물이다. 아버지처럼 명부에서 지워진 채로.'
인정받아야 존재한다. 그것 없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다시 세우려면, 먼저 자신의 이름부터 명부에 올려야 했다.
새로 돋은 손등의 반점이 시야 끝에서 반짝였다. 이 힘을 쓸수록 그는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한 걸음씩 되밟는다. 돌이 되어 죽는 길. 그것을 알면서도.

펜 끝이 종이에 닿았다.
한, 서, 율.
세 글자를 적는 동안 왼손 손등의 반점이 한 번 더 저릿했다. 서명이 끝나자 직원이 서류를 회수하고 붉은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접수증 한 장을 내밀었다.

"3일 뒤 1차 심사. 지참물은 뒷면에."
서율은 접수증을 받아 로비를 나섰다. 오후 햇빛이 대리석 계단을 데우고 있었다. 어깨 위 새가 두 마리로 늘어 있었다—석고로 빚은 은빛 매는 사자를 봉인한 뒤 작은 새로 돌아와 반대쪽 어깨에 앉았다.
이겼다. 협회 한복판에서, 조롱하던 자들 앞에서. 그런데도 가슴이 가볍지 않았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서율은 접수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앞면의 심사 일정 아래, 처음엔 눈에 들지 않았던 작은 문구가 있었다. 붉은 잉크로 인쇄된, 다른 조항보다 흐리게 찍힌 한 줄.
'심사 실패 시, 대상자의 조각 능력은 협회에 의해 강제 봉인됨. 봉인은 비가역적임.'
서율의 발이 멈췄다.

강제 봉인. 비가역. 그러니까 이 심사에서 떨어지면, 그는 사람으로 등록되지 못할 뿐 아니라—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 힘 자체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봉인당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목숨과 바꿔 남긴 그 힘을.
그가 방금 서명한 종이가, 인정을 향한 문이 아니라 목에 걸린 올가미였다.
계단 위, 유리 천장 너머 흐린 하늘에 낮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서율은 접수증을 쥔 오른손과 잿빛으로 굳은 왼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3일. 통과하지 못하면 힘을 잃고, 힘을 쓸수록 몸이 굳는다.
어느 쪽이든, 그는 아버지가 걸어 들어갔던 문 안으로 이미 발을 들여놓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