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열 시, 강도현의 작업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하늬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하늬가 아니었다.

“한서율.” 낮고 차가운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네 그림자를 봤다. 이제 실체를 보자.”

서율의 손끝이 굳었다. “유겐.”

“정확히 맞혔군. 이하늬는 지금 내 옆에 있다. 걱정 마라, 아직은.”

강도현이 서율의 어깨를 잡았다. “함정이다. 가지 마라.”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서율이 낮게 말했다. “가지 않으면, 그게 진짜 함정이 됩니다.”

전화기 너머로 하늬의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억눌린,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숨소리.

“서율 씨.” 하늬의 목소리가 짧게 끼어들었다. “오지 마요. 이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서율은 조각칼을 챙겼다. 강도현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달이 없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그늘달이다. 네 힘이 온전히 서지 않는 날이야.”

“알아요.”

“모른다. 넌 아직 달빛 없이 조각한 적이 없어.”

서율은 스승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럼 오늘 처음 해보는 거네요.”

강도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낡은 배낭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서율의 손에 쥐여주었다. 반쪽 달빛석이었다.

“이걸로 부족한 빛을 메워라. 하지만 명심해— 이건 네 힘을 대신해주는 게 아니다. 문을 열어주는 열�ится일 뿐이야. 나머지는 네가 채워야 한다.”

“네.”

“그리고 서율아.” 강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겐이 원하는 건 이하늬가 아니다. 네가 힘을 쓰는 순간의 증거야. 협회에 보여줄 증거.”

서율은 조각칼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가야 해요.”

폐공장이었다. 유겐이 지정한 장소는 도심 외곽, 오래전 문을 닫은 유리 공장의 잔해였다. 깨진 창으로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짙게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하늬는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이 묶여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사냥꾼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유겐.

“왔군.” 유겐이 웃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스승이 말리지 않았나?”

“말렸습니다.” 서율이 말했다. “그런데도 왔어요.”

“의리는 좋지만, 어리석은 선택이지.” 유겐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냥꾼 하나가 하늬의 목에 짧은 칼날을 가져다 댔다. “자, 보여줘. 네가 각성한 그 힘. 협회가 궁금해하고 있어.”

“하늬를 먼저 풀어줘요.”

“힘을 보여주면.”

서율은 하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다가, 눈으로 그를 만류했다. 아니, 라는 뜻이었다.

“걱정 마요.” 서율이 낮게 말했다. “이번엔 제가 지킬 겁니다.”

그는 조각칼을 꺼냈다. 손안에 반쪽 달빛석을 쥐었다. 달이 없는 하늘 아래, 빛은 오로지 그 작은 돌조각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칼끝이 바닥에 놓인 폐목재를 향했다.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늑대상을 조각할 때처럼 저절로 흐르는 감각은 아니었다. 이번엔 매 순간이 저항이었다. 달빛이 부족한 만큼, 그의 의지로 그 틈을 메워야 했다.

“빠르게 움직여라.” 유겐이 차갑게 지시했다. 사냥꾼들이 서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재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늑대가 아니었다. 이번엔 사람의 형상, 방패를 든 수호자였다. 아직 절반뿐이었다. 팔 하나, 얼굴의 절반만 새겨졌을 때 첫 번째 사냥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율은 조각칼을 놓지 않았다. 반쪽 달빛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이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완성해라.” 그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완성해야 지킨다.”

마지막 선을 새기는 순간, 목재상이 빛을 뿜으며 일어섰다. 그러나 그 빛은 온전한 은백색이 아니었다. 붉게 얼룩진, 불완전한 빛이었다.

수호상이 사냥꾼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몸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반동이 벌써 오는군.” 유겐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달빛 없이는 그 정도가 한계인가.”

서율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시야가 흔들렸다. 수호상이 두 번째 사냥꾼을 밀어냈지만, 그 몸통 절반이 부서져 내렸다.

“서율 씨!” 하늬가 소리쳤다.

바로 그때, 공장의 깨진 천장 틈으로 이상한 빛이 새어들었다. 은백색도 아니고, 흔한 조명도 아닌, 짙푸른 빛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구름 사이로, 있을 수 없는 색의 달이 잠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폐공장 지붕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실루엣만 보이는 인영이었지만, 그 눈만은 분명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누구냐.” 유겐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배어 나왔다.

서율은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말과 동시에 푸른 달빛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이 서율의 수호상을 완전히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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