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지 마라."

도현의 목소리가 아직 귓속에 남아 있었다. 서율은 그 말을 등 뒤에 두고 걸었다.

은색 봉투는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카드에 적힌 주소는 협회 서관 최상층, 명패도 없는 접견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그 층에서 열쇠를 요구했고, 열쇠는 봉투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오게 되어 있는 초대였다.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도현의 말이 옳았다. 함정의 주인이 직접 부르는 자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카드 속 단어 하나가 서율을 끌었다.

미완. 아버지 장례식 방명록에 눌려 있던 그 두 글자.

서율은 소매를 당겨 팔목의 잿빛을 덮었다. 소매 안에서 은빛 새 두 마리가 서늘하게 굳어 붙어 있었다. 파편은 가슴께에서 얼음처럼 식은 채였다. 힘을 아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며 열쇠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접견실은 넓고 텅 비어 있었다. 창은 없고, 벽 전체가 회백색 대리석이었다. 조명은 천장 한가운데 하나뿐이라, 방 가장자리는 그늘에 잠겨 있었다. 그 그늘 한쪽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이하늬였다.

의자에 앉은 그녀의 손목이 뒤로 묶여 있었다. 입은 막히지 않았지만 뺨에 붉은 자국이 하나 나 있었다. 서율의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오지 마요."

하늬가 말했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인질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방 안쪽 안락의자에서 사내 하나가 일어섰다. 서율은 그를 처음 봤다. 백발이 성성한,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 정장 소매 끝동에 은실로 별자리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표정에 서두름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서율의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한서율 군."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카드의 필체와 꼭 같은 온도였다.

"먼 길을 왔군. 앉게."

"저 사람을 왜 묶어 두셨습니까."

"이 여자는 협회 자산을 몰래 촬영하다 붙잡혔네." 백단휘가 하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낀 은골무가 조명을 받아 번득였다. "기자 흉내를 낸 산업 스파이지. 자네 옆에 붙어 있던 걸 보면, 자네도 한통속일 수 있다는 뜻이고.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던 참이었네."

서율은 하늬를 봤다. 묶인 손목, 붉은 뺨. 이 여자는 자기 때문에 이 자리에 끌려온 것이다. 규칙을 파고들며 자기 곁을 지켜준 대가로.

그의 손이 소매 안 파편으로 갔다. 새를 풀어 저 골무 낀 손을 후려칠 수 있다. 지금 당장.

"멈춰요."

하늬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잘랐다. 이번엔 명령에 가까웠다.

"당신, 지금 나 구하려고 왔죠." 하늬가 서율을 정면으로 봤다. 뺨의 자국 위로 눈빛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 딱 그거예요. 딱한 여자 구해주는 착한 남자. 그 시선 좀 치워요. 재수 없으니까."

서율의 손이 멈췄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알아요?" 하늬가 묶인 손목을 등 뒤에서 조금 비틀었다. 저항이 아니라, 시간을 재는 동작이었다. "구조를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이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려고 잡혀준 거예요."

백단휘의 눈썹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관 최상층 접견실. 창 없고, 감시 없는 척하는 방." 하늬가 천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조명 갓 안쪽 봐요. 렌즈 있어요. 저 벽 몰딩 세 번째 이음매, 거기도. 협회는 이 방에서 오간 말을 전부 기록해요. 규정 제31조, 접견 기록은 대상자에게 고지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나한테 고지했어요? 안 했죠. 무단 감시. 그것만으로 이 방 자체가 위법이에요."

"근거 없는 소리를." 백단휘의 목소리에서 부드러움이 한 겹 벗겨졌다.

"근거요."

하늬가 웃었다. 묶인 채로 웃었다.

"여섯 달이에요. 반년 동안 이 건물 배관실, 자료실 천장, 심사장 방청석 세 번째 줄 의자 밑,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다리 안쪽. 전부 녹취기를 심어뒀어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발신되게 걸어뒀고요." 하늬가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당신이 내 뺨을 쳤을 때, 충격 센서가 발신을 시작했어요. 지금 이 대화, 외부 세 군데로 실시간 흘러가는 중이에요. 조명 갓 안 렌즈 얘기 하는 것까지 전부."

방 안 공기가 바뀌었다.

백단휘가 골무 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의 시선이 천장 조명으로, 벽 몰딩으로 옮겨갔다. 처음으로, 이 노인이 자기 방을 낯선 눈으로 훑었다.

"규정 제31조 위반은 심사관 자격 정지 사유예요." 하늬가 이어갔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당신 이름으로 배정된 접견실에서 무단 감시가 나오면, 당신은 다음 공개 심사에 못 앉아요. 유겐 심사위원 건도 마찬가지고. 이거 하나로 당신 파벌 심사위원 두 자리가 흔들려요. 어때요, 이래도 내가 구조를 기다리는 인질 같아요?"

서율은 하늬를 봤다. 처음 봤다.

데뷔를 제안하며 접근했던 여자. 규칙의 허점이 필요해 손을 잡았던 상대. 자기 곁을 지켜준 사람. 서율이 붙여둔 그 이름표들이 전부 벗겨졌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건 반년을 걸어 판을 짜둔 조사자였다. 인질이 아니라, 함정을 함정으로 되받아치려 스스로 걸어 들어온 사람.

그가 지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이 방으로 끌어들여, 백단휘를 기록에 걸어둔 것이다.

"당신…" 서율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얘기해요." 하늬가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지금은 나가는 게 먼저니까."

백단휘가 다시 앉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매끈했지만, 손끝의 골무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서율은 놓치지 않았다.

"영리한 여자로군."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발신됐다는 증거가 있나? 이 방의 신호는 차폐돼 있네. 자네 녹취기가 발신을 시작했다 한들, 벽을 뚫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나가지 않은 거지."

하늬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서율은 그 순간을 읽었다. 하늬의 물증은 진짜다. 그러나 발신은 이 방의 차폐에 갇혀 있다. 방을 나가야 신호가 산다. 백단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은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에서 두 사람을 붙잡아두는 한, 물증은 벽 안에서 죽는다.

문 앞엔 어느새 검은 정장 둘이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들어와 있었다. 서율은 그들의 손을 봤다. 손끝마다 골무. 협회의 조각가들이었다.

퇴로가 막혔다.

"자, 다시 이야기하지." 백단휘가 손깍지를 꼈다. "자네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네. 미완의 일을…"

서율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의 손이 파편을 움켜쥐었다. 소매 안 새 두 마리가 동시에 눈을 떴다. 차게 굳어 있던 은빛이 열을 얻었다. 파편의 결정면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서늘하게 빛났다.

"한서율 군, 나는 자네와 싸울 뜻이…"

"이야기는," 서율이 파편을 벽으로 던졌다. "다음에 하죠."

파편이 회백색 대리석 벽에 박혔다. 그 순간, 벽면 전체가 재료가 되었다. 서율은 손을 내밀어 그 벽을 조각했다. 칼도, 달빛도 없이, 손끝의 상(像)만으로.

대리석 벽이 안쪽으로 무너지며 형상을 뽑아냈다. 날개를 펼친 세 번째 매. 이번 것은 앞의 두 마리보다 컸다. 사자만 한 크기의 은빛 매가 벽에서 뜯겨 나오며 방 안 조명을 부쉈다.

암전.

검은 정장들이 골무를 세웠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유리한 건 은빛으로 스스로 빛나는 매였다. 큰 매가 문을 지키던 둘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사이, 작은 새 두 마리가 하늬의 결박을 물어뜯었다.

"손목!"

하늬가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서율이 그녀의 팔을 잡아 문 쪽으로 끌었다.

"이 방 나가야 발신이 산다면서요."

"기억했네요." 하늬가 뛰면서 웃었다. "제법이에요."

문이 큰 매의 날개에 뜯겨 나갔다. 두 사람은 복도로 굴러 나왔다. 서관 최상층 복도, 창밖으로 낮달이 걸려 있었다. 하늬가 품에서 작은 수신기를 꺼내 확인했다. 붉은 표시등이 깜빡였다. 발신 성공. 신호가 벽 밖으로 살아 나갔다.

"됐어요." 하늬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 방에서 나온 말, 전부 밖에 있어요. 백단휘 무단 감시 기록, 심사관 자격 건들 물증. 반년 기다린 거예요."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왼팔이 이상했다.

벽 하나를 통째로 조각한 대가였다. 파편으로 매 한 마리를 뽑는 것과 벽 전체를 형상으로 바꾸는 건 급이 달랐다. 손목까지 왔던 잿빛이, 지금 팔꿈치를 넘어 위로 번지고 있었다. 소매 아래에서 저릿한 굳음이 어깨를 향해 기어올랐다.

"한서율 씨?"

하늬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서율은 벽을 짚으려 했다. 왼손이 벽에 닿았다. 그러나 손가락이 벽을 붙잡지 못했다. 감각이 없었다. 손이 아니라, 손 모양을 한 돌이 벽에 부딪혔을 뿐이었다.

그는 왼팔을 들어 보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왼팔 전체가 하나의 잿빛 대리석으로 굳어 있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이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서율은 오른손으로 그 팔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자기 살이 아니었다. 조각이었다.

3년 전, 아버지의 작업실이 떠올랐다. 조각칼을 쥔 채 하얗게 굳어 있던 손. 그 손목. 그 팔.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심장으로 번져 간 돌. 의사가 원인 불명이라 적었던, 이 정확한 형벌.

같은 자리였다. 같은 방식이었다.

"팔이…" 서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 움직여."

하늬가 그의 굳은 팔을 붙잡았다. 두드려도, 흔들어도, 손끝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낮달이 창밖에서 그 굳은 팔 위로 희미한 빛을 떨어뜨렸다.

하늬가 서율의 굳은 팔을 놓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직여요. 여기 서 있으면 안 돼요."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방에서 밀려났던 검은 정장 둘이 골무를 세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큰 매가 문틀에 걸린 채 날개를 퍼덕였지만, 벽에서 뽑아낸 재료가 다 소진됐는지 은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형상이 흩어지려 했다.

서율은 오른손으로 왼팔을 끌어안았다. 팔이 저 혼자 아래로 처졌다. 무게가 낯설었다. 자기 몸의 일부가 짐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매를…" 그가 말을 뱉었다. 한 마리 더 뽑을 수 있다. 복도 벽도 대리석이다. 파편은 아직 손에 있다.

"안 돼요." 하늬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었다. 파편으로 가려던 손이었다. "당신 팔 봐요. 한 번 더 쓰면 그 다음은 어디예요? 어깨? 그 위엔 뭐가 있죠?"

서율의 손이 멈췄다. 하늬의 말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정확히 겨눴다.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심장으로. 그 순서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증명하려면 완성해야 한다. 완성하려면 굳어야 한다. 그 회로가 지금 팔 전체를 먹어치웠다. 완성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도현의 말이 뒤늦게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뛰어요. 힘 말고 다리로." 하늬가 그를 밀었다.

두 사람은 계단으로 몸을 던졌다. 서율은 왼팔을 못 쓰는 채로 오른손 하나로 난간을 짚으며 내려갔다. 위층에서 골무 낀 조각가들이 뒤따라왔다. 계단 벽면에 그들의 손끝이 닿는 순간, 석재가 뒤틀리며 형상을 뽑아 올렸다. 개만 한 석견(石犬) 둘이 계단을 타고 뛰어내렸다.

"이쪽!" 하늬가 3층 복도로 꺾어 들어갔다. 열람실이 있던 층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건물 구조를 손금처럼 알고 있었다. 반년의 준비가 도주로에도 깔려 있었다.

"자료실 뒷문. 배관 통로로 이어져요." 하늬가 문 하나를 밀었다. 잠겨 있었다. 그녀가 욕을 뱉으며 카드키를 긁었다. 붉은 등. "바뀌었어… 이 새끼들 오늘 잠금 코드를 갈았어."

석견 둘이 복도를 반쯤 좁혀왔다.

서율은 파편을 쥔 오른손을 봤다. 한 번 더. 작게. 손끝만. 벽이 아니라 문 손잡이 하나만.

"안 된다니까요!" 하늬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문은 열어야죠." 서율이 그녀를 마주 봤다.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했다. "이번엔 완성 안 해요. 형상 안 뽑아요. 잠금장치만."

그는 파편을 문의 전자 자물쇠에 갖다 댔다. 형상을 실체화하는 게 아니라, 금속 안쪽 걸쇠 하나만 상(像)으로 밀어 젖혔다. 손끝의 굳음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 번졌다. 벽 하나 값이 아니라, 걸쇠 하나 값이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통로로 굴러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석견 하나가 문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가 철문을 울렸다.

배관 통로는 좁고 어두웠다. 하늬가 앞장서 기어갔다. 서율은 왼팔을 질질 끌며 뒤따랐다. 굳은 팔이 통로 바닥에 긁혀 돌 갈리는 소리를 냈다.

"수신기 다시 봐요." 서율이 말했다.

하늬가 품에서 수신기를 꺼냈다. 붉은 등이 아직 깜빡였다. 그러나 그 아래, 처음 보는 노란 등 하나가 함께 들어와 있었다. 하늬의 얼굴이 굳었다.

"이거…"

"뭡니까."

"역추적." 하늬가 수신기를 뒤집었다. "내 발신 신호를 누가 거꾸로 타고 들어오고 있어요. 세 군데 수신처 중 하나가… 지금 응답을 멈췄어요."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외부 수신처 하나가 방금 죽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든 장비든."

서율은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반년의 물증이 밖으로 살아 나갔다. 그러나 그 물증을 받은 쪽을 백단휘가 이미 알고 있었다. 노인은 방 안에서 무너지는 척하며, 신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어디로 나가는지 보려고.

"당신 물증이 밖으로 나간 순간," 서율이 낮게 말했다. "저쪽도 당신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버린 거군요."

하늬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통로 저편, 배관이 꺾이는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났다. 앞이었다. 뒤가 아니라 앞. 이미 누군가 통로 반대편을 막고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골무를 손끝에 끼운 청년. 서부 지부 계단에서 사자 석상을 기동시켰던 그 자였다.

"오랜만이네요, 계승자님." 유겐이 웃었다. 그의 시선이 서율의 굳은 왼팔로 내려갔다. "팔이 아버지랑 똑같아졌네."

서율의 오른손이 저도 모르게 파편으로 갔다. 그러나 손끝은 이미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굳어 파편을 쥐는 감각이 무뎠다. 왼팔은 죽었고, 오른손도 조금씩 그를 배신하기 시작했다.

유겐이 골무 낀 손을 통로 벽에 짚었다.

"이 통로 벽도 전부 재료예요. 알죠?" 그가 웃었다. "누가 더 오래 굳는지, 여기서 확인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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