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인터컴에서 내 이름이 울렸다.

“정도하 씨, 13층 아티스트 라운지로 바로 올라오세요. 서시현 님 전담 배정입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끝이 떨렸다. 더블유엔터 13층. 신입 매니저가 첫 출근부터 밟을 수 있는 층이 아니었다. 그곳은 톱스타 전용 구역. 보안 카드가 없으면 엘리베이터 버튼조차 눌리지 않는 곳.

내 가슴팍에 매달린 임시 출입증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복도는 조용했다. 바닥을 덮은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간접 조명이 벽면을 따라 은은하게 번져, 공기 자체가 평범한 사무실과 달랐다. 이곳은 이미 무대의 연장선이었다.

“여기까지인가?”

낮고 느린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문간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는 남자. 서시현이었다.

스크린으로만 보던 그 얼굴이 형광등 아래 있었다. 화보보다 말랐고, 실제로 보니 피부 아래 실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했다. 하지만 눈빛은 카메라 너머보다 더 날카로웠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스쳤다. ‘시현이 웃을 때 제일 무섭다’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신입 매니저 정도하입니다. 오늘부로 전담 배정받았습니다.”

대답 대신 시선이 느껴졌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

“목소리가…….”

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내 목 부근에 멈춰 있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

“뭐, 됐어. 따라와. 리허설 시작하기 전에 대기실 세팅 해둬.”

그가 돌아서며 던진 말은 명령이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

콘서트 리허설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무대 위에서는 댄서들이 동선을 체크하고, 조명 팀이 무대 바닥에 테이프로 포지션을 표시하고 있었다. 음향 팀은 반복해서 베이스를 튕겼다. 둥, 둥, 둥. 가슴을 때리는 저음이 내 뼈까지 울렸다.

나는 무대 아래 모니터 앞에 서서 시현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 완벽했다. 첫 소절부터 동작 하나까지 정확했다. 댄서들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오늘 컨디션 좋은데?”

옆에 있던 조명 감독이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의 표정에서 뭔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웃고 있지만 입꼬리가 굳어 있었다. 동작은 정확했지만 호흡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만지는 손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잠깐.”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였다.

시현의 동작이 멈췄다. 한 박자, 두 박자. 음악만 덩그러니 흘렀다.

그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시현 씨!”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무대 위로 스태프들이 몰려갔다. 나도 달렸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보였다. 시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경련하듯 떨렸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물러서세요. 다들!”

로드 매니저 이수빈이 스태프들을 밀어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시현의 어깨를 잡으며 귀에 대고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목소리가…… 안 들려…….”

시현의 눈이 허공을 헤맸다. 동공이 풀려 있었다. 손이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마치 질식하는 사람처럼.

수빈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지금 담당 의사 어디야? 빨리 연락해!”

스태프들이 우왕좌왕했다. 누군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시현의 눈높이에 맞췄다. 본능이었다. 내 목소리가 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시현 씨.”

조용히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귀에 입을 바짝 댔다. 이어폰을 빼내고 내 목소리를 직접 들려줬다.

“숨 쉬어요.”

낮고 차분한 톤이었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나. 스스로도 낯설었다. 내 입술이 그의 귓바퀴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숨결이 그의 피부에 닿자 시현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게 보였다.

“지금 여기, 무대 바닥이 단단하죠. 그 감각에 집중해요.”

시현의 떨림이 멈칫했다. 내 목소리가 그의 귀를 타고 파고들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더 낮게, 더 느리게 발음했다. 마치 그의 신경계에 직접 접속하는 것처럼.

“제 목소리만 들어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조금씩 그의 호흡이 느려졌다. 떨리던 손끝이 바닥을 짚었다. 풀렸던 동공이 내 얼굴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그의 척추를 타고 내려가 복부 깊숙이 울리는 듯한 느낌. 그 진동이 시현의 몸을 재조립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내 목을 응시했다. 내 성대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만 더 들어봐요. 괜찮아요. 당신은 여기 서 있어요. 무대 위에.”

시현의 입술이 열렸다. 마른 입술 사이로 치아가 보였다.

“……누구…….”

“정도하입니다. 오늘부터 전담 매니저.”

내가 대답하는 동안에도 나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낮고 일정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무대 조명이 따뜻하다는 둥, 리허설이 순조롭다는 둥,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내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두개골을 통해 뇌간으로 퍼져나가는 걸 상상했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소리였다.

그의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었다. 30초쯤 지났을까. 시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몸통에 달라붙어 갈비뼈 윤곽을 드러냈다.

주변 스태프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수빈의 눈이 커졌다.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대 위에서 군림하던 그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바닥에 주저앉아 떨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 그 눈빛이 내 목소리가 나온 지점, 내 성대 위를 정확히 응시했다.

“리허설.”

그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다시 시작해.”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스태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음악이 다시 흘렀다.

시현이 일어섰다. 무릎을 털고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서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의도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는 접촉.

그의 첫 소절이 무대를 채웠다. 완벽했다.

*

대기실 문이 닫혔다.

리허설은 순조롭게 끝났다. 스태프들이 하나둘 철수하고, 무대 위는 정리되고 있었다. 복도 너머로 철수하는 발소리와 장비 끌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현이 오라고 했다. 10분 전, 수빈을 통해 전달받은 짧은 지시였다.

문이 열리고 시현이 들어왔다. 리허설복 그대로였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가슴께에 달라붙어 유두 윤곽까지 비췄다. 쇄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일어서려 했다.

“앉아 있어.”

명령이었다.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가 내려다보는 각도가 내 목을 완전히 노출시켰다.

시현은 내 앞에 선 채로 팔짱을 꼈다.

“네 목소리.”

그가 입을 열었다.

“주파수가 특이해. 내 귀에 박히는 톤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무대 공포증이 있어.”

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5년 전부터. 병원 진단으로는 외상 후 불안 장애. 편도체 과잉 반응. 무대 위에만 서면 호흡이 마비돼. 누구 목소리도 안 들려. 어떤 약도 안 들어. 몇 번이고 무대 뒤에서 무너졌고, 몇 번이고 응급실에 실려 갔어.”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땀에 젖은 그의 체취가 밀려들었다. 염분과 머스크,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체온의 냄새.

“네 목소리만 들렸어.”

내 팔뚝의 솜털이 옷깃을 밀어 올렸다. 하복부 깊은 곳이 뜨겁게 조였다.

“어떤 원리인지는 나도 몰라. 네 성대가 내는 특정 주파수가 내 뇌의 공포 반응을 억제하는 것 같아. 신경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

시현이 허리를 숙였다. 내 얼굴과 그의 얼굴이 30센티미터 거리로 좁혀졌다. 그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땀에 젖은 앞머리에서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내 손등에 떨어졌다.

“그래서 계약서에 없는 일을 부탁할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리허설 내내 땀을 흘렸는데도 손끝은 얼음장 같았다. 그 냉기가 내 맥박을 타고 올라갔다. 손목 안쪽, 피부가 가장 얇은 곳에 그의 엄지가 닿았다. 내 맥박이 그의 지문 아래서 뛰고 있었다.

“내일 콘서트. 2시간짜리 대형 무대야. 관객 1만 5천 명.”

시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톤.

“네 목소리로 나를 무대에 세워줘.”

내 손목을 잡은 힘이 강해졌다. 손가락 마디가 내 뼈를 압박했다.

“인이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말을 걸어줘. 내가 무대 위에서 무너지지 않게. 끝까지 완벽하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그의 눈동자가 내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는 내 성대 부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그 부위를 만지고 싶어 참는 듯한 시선.

“계약서엔 없는 일이야. 매니저 업무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지.”

나는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바짝 말랐다.

“거절할 거야?”

시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어둡고 뜨거운 무언가가 동공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거절해도 돼. 그럼 난 내일 무대에서 쓰러지겠지. 실시간 검색어 1위 찍고, 주가는 폭락하고, 소속사는 패닉에 빠질 거야. 그리고 넌…….”

그가 손목을 놓았다. 풀린 자리가 허전하게 욱신거렸다.

“신입 매니저로 첫 출근한 날, 톱스타를 무대에 세우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거야.”

내 팔뚝의 솜털이 다시 옷깃을 밀어 올렸다. 뒷목까지 전율이 번졌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가 내 목소리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 생각이 내 하복부를 뜨겁게 조였다. 권력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무대 위의 신이 내 목소리 없이는 무너진다. 그 전율이 척추를 타고 올라 뇌수를 찔렀다.

“왜…….”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왜 하필 저예요?”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동작마저 무대 위에서처럼 계산된 듯 우아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관자놀이에 달라붙었다.

“말했잖아. 네 목소리만 들렸다고.”

그가 내 목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성대 부근을 스쳤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순간, 정전기 같은 전류가 목젖을 타고 흘렀다. 내 성대가 그의 손가락 아래서 미세하게 떨렸다.

“이 목소리가 필요해. 무대에 서는 동안 계속 내 귀에 속삭여줘. 나 듣고 있어, 잘하고 있어, 라고.”

손가락이 내 목젖 아래를 살짝 눌렀다. 압력이 성대를 자극하자 나도 모르게 짧은 숨이 새어나왔다. 그 숨소리에 시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성대를 따라 위아래로 쓸었다. 마치 악기의 현을 튕기듯. 내 목젖이 그의 검지 아래서 굴렀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성대의 윤곽을 더듬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네 목소리, 여기서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했어.”

시현이 속삭였다. 손가락이 성대를 지나 쇄골 위로 미끄러졌다. 쇄골의 오목한 부분을 검지로 누르며 천천히 원을 그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가락이 내 피부 위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하복부 깊은 곳이 묵직하게 조여들었다.

“숨 쉴 때마다 여기가 올라왔다 내려가네.”

시현의 손가락이 쇄골에서 가슴께로 내려갔다. 티셔츠 위로, 가슴 중앙을 따라 천천히. 내 갈비뼈가 그의 손끝 아래서 들썩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내 심장 박동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잠시 멈췄다.

“심장이 엄청 빠르네.”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소리만 거칠어졌다. 그의 손이 내 왼쪽 가슴 위에 얹혀 있었다. 엄지가 내 유두를 스치듯 지나갔다. 티셔츠 천 너머로 그의 손가락이 유두 주변을 빙글 돌았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소파에서 살짝 떠올랐다. 사타구니가 뜨거워졌다. 바지 앞부분이 불편하게 당겨졌다.

“아…….”

숨이 새어나왔다. 시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손가락이 유두를 살짝 비틀었다. 날카로운 쾌감이 가슴에서 사타구니까지 전선을 타고 흘렀다. 내 성기는 이미 완전히 발기해 바지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시현의 시선이 내 바지 앞부분으로 내려갔다. 그가 천천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이게 네 대가야.”

그가 갑자기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내 몸이 허전함에 떨렸다. 발기된 성기가 바지 안에서 욱신거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봤다.

“할 거야, 말 거야?”

대기실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저 먼 곳에서 콘서트장 철수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완전히 분리된 것 같았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밀실. 그의 손가락이 내 몸을 훑고 간 자리가 타는 듯이 남아 있었다.

내 목을 짚었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는 떨림. 그 떨림이 내 피부를 통해 내 안으로 전염되었다. 내 심장이 빨라졌다. 맥박이 목젖을 때리는 속도가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고스란히 감지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의 눈동자에 무언가 스쳤다. 안도일까. 소유욕일까. 그것은 너무 빨리 지나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내 목에서 떨어지기 직전, 검지가 내 성대를 따라 아래로 천천히 쓸고 내려갔다. 마치 악기를 조율하듯.

“좋아.”

그가 손을 거두며 뒤돌아섰다. 등이 보였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척추 라인을 따라 달라붙어 있었다.

“내일 오후 2시. 리허설 전에 이 대기실로 와. 인이어 세팅은 내가 직접 할 거야.”

문으로 걸어가던 그가 멈췄다.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그리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목덜미에 아직 마르지 않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오늘 리허설 때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 목소리에 대한 것도.”

문이 열렸다. 복도의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건 계약이 아니야. 비밀이야.”

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철컥 소리를 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내 목에는 아직도 그의 손가락 감촉이 남아 있었다. 차갑고도 뜨거웠던 그 감각. 성대를 따라 쓸고 내려간 검지의 경로가 타는 듯이 남아 있었다.

손을 들어 내 성대 부근을 만졌다. 시현이 짚었던 바로 그 자리. 그의 지문이 남긴 냉기가 아직도 피부 아래에 박혀 있는 듯했다.

목젖이 울렸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목소리는 벌써부터 그에게 빌려진 것 같았다. 내 성대는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필요할 때마다 진동할 악기. 그 생각이 내 사타구니까지 뜨겁게 달궜다. 발기된 성기가 여전히 바지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 바지 위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시현의 손가락이 내 유두를 비틀던 그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내일이 오면 나는 무대 아래에 서서 어둠 속에서 말을 쏟아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톱스타의 귀에 속삭일 것이다. 1만 5천 명의 관객이 보는 앞에서, 오직 그만이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 은밀한 연결이 내 몸을 관통했다.

대기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천천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거울 속 내 눈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빛.

문득 깨달았다.

나는 방금, 계약서에 없는 일을 수락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안의 무언가가 이미 알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시현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기실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형광등만이 윙윙거리며 나를 비추고 있었다.

내 손은 여전히 목에 얹혀 있었다. 성대의 진동을 느끼려는 듯이.

내일 콘서트. 1만 5천 명 앞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줄을 통해 목소리를 흘려보낼 것이다. 무대 위의 완벽한 남자를 조종하는 유일한 그림자로서. 그가 춤추고 노래하는 매 순간, 내 목소리가 그의 신경계를 지배할 것이다.

내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그 리듬이 내 목소리를 타고 울리는 듯했다. 하복부 깊은 곳이 묵직하게 조여들었다.

무대가 끝나야, 진짜가 시작된다.

그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누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은 예언처럼 내 뼈에 박혔다.

나는 일어나 대기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내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내일, 내 목소리는 무대 위의 그를 살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 목소리에 의존하는 만큼, 나는 그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무대 위의 신을 내 목소리로 지배하는 역전된 권력. 그 전율이 어둠 속에서 내 입술을 비틀어 웃게 만들었다.

문득, 문 밖 복도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문 앞에 서서 숨을 참고 있는 듯한, 그런 미세한 공기의 떨림.

그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야.”

여자의 목소리였다. 유리아였다. 같은 소속사 여성 솔로 가수. 시현과 스캔들이 났던 그 유리아.

“리허설 끝났다고 해서 왔어. 오빠 괜찮아? 무대에서 또 쓰러졌다며.”

나는 숨을 죽였다. 유리아가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났다. 잠긴 문이 덜컹거렸다.

“어? 문 잠겼네. 오빠, 안에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한 톤.

“아까…… 그 신입 매니저랑 같이 들어간 거 봤는데.”

나는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유리아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들어왔다.

“오빠, 나랑 약속했잖아. 콘서트 전날엔 나랑 시간 보내기로.”

그녀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질투일까, 불안일까. 나는 어둠 속에서 문을 응시했다. 유리아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내 몸을 긴장시켰다. 발기되었던 성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단호한 발소리.

“유리아.”

시현의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내 예감이 맞았다.

“오빠! 여기 있었네. 문 잠겨 있어서……”

“거긴 내 대기실이 아니야. 저기 끝이야.”

짧은 침묵.

“그리고 약속? 그런 적 없어. 너 혼자 착각한 거야.”

유리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착각? 오빠, 지난주에 나랑……”

“유리아.”

시현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차가웠다.

“내일 콘서트야. 지금은 아무도 방해하지 마. 너도.”

발소리가 멀어졌다. 유리아의 발소리였다. 그녀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분노에 차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문고리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열쇠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시현의 실루엣이 보였다. 복도 조명이 그의 등 뒤에서 번져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그는 한 걸음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다시 어둠.

“들었어?”

그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네.”

내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유리아는 신경 쓰지 마. 그녀는 내가 무대 공포증 있다는 걸 몰라. 네 목소리에 대해서도 당연히 모르고.”

시현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더듬었다. 검지가 내 아랫입술을 눌렀다.

“네 목소리는 이제 내 거야. 다른 사람한테 들려주면 안 돼. 특히 유리아한테는.”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파고들었다. 검지가 내 치아 사이를 밀고 들어와 혀끝에 닿았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 안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혀를 누르고, 입천장을 쓸었다. 침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내일, 네 목소리로 나를 무대에 세워.”

시현이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에서 빠져나왔다. 침에 젖은 손가락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성대를 지나 쇄골에 닿았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면…….”

그의 손가락이 내 쇄골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네 대가를 받아.”

그가 갑자기 물러났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이번에는 진짜로 떠난 것이었다. 복도에 그의 발소리가 울리다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입 안에는 아직 그의 손가락 맛이 남아 있었다. 침이 섞인 그의 피부 맛. 내 혀끝이 아직도 그의 지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타구니가 다시 뜨거워졌다. 방금 전 그의 손가락이 내 입 안에서 움직이던 감각. 그게 내 성기를 완전히 발기시켰다. 나는 바지 위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천천히 문지르자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아…….”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바지 지퍼를 내렸다. 팬티 위로 성기가 불룩 솟아 있었다. 손을 넣어 맨살을 만졌다. 귀두는 이미 투명한 액체로 젖어 있었다. 나는 성기를 움켜쥐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현의 손가락이 내 입 안에서 움직이던 리듬으로.

“시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쾌감이 더 강해졌다. 내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성대가 진동했다. 그 진동이 목을 타고 내려와 손끝까지 전해졌다. 나는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시현이 내 목을 만지던 감각. 그의 손가락이 내 유두를 비틀던 감각. 그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내일…….”

숨이 거칠어졌다.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성기에서 나는 물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허리를 움직이며 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시현이 내 목소리를 듣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무대 위에서 내 목소리에 의존하는 모습을. 그가 내 목소리 없이는 무너지는 모습을.

“네 거야…….”

절정이 임박했다. 나는 더 세게 성기를 움켜쥐었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시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목을 만지던 그 눈빛. 내 입술을 파고들던 손가락.

“내 목소리…….”

정액이 손 안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사정했다. 하얀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기댔다. 손은 여전히 성기를 감싸고 있었다. 정액의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퍼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웃었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내일, 내 목소리는 무대 위의 그를 살릴 것이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면, 나는 그를 가질 것이다. 내 목소리로 그를 지배하고, 내 손으로 그의 몸을 만질 것이다. 그가 내 목소리에 의존하는 만큼, 나는 그를 소유할 것이다.

티슈로 손을 닦으며 나는 일어났다. 대기실 거울 앞에 섰다. 어둠 속에서도 내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목에는 아직 시현의 손가락 감촉이 남아 있었다. 나는 거울 속 내 목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성대 위를 천천히.

“내일이야.”

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그 진동이 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무대가 끝나야, 진짜가 시작된다.

그 말이 내 뼈 속에 박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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