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엔딩 직후, 로커룸에서 15분이 남은 순간부터
박준이 준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뭐 해? 전화 받아."
김수호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준호의 휴대폰 화면이 빨간 글씨로 '프로팀 대표'를 표시했다. 다섯 번째 전화였다. 수호는 준호의 손을 들어올렸다.
"받든가 거절하든가. 둘 중 하나 해야지."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화면을 누르지 못했다. 박준이 일어났다. 로커룸의 습한 공기가 준호의 가슴을 짓눌렀다. 10분, 9분, 8분.
"거절할 거야?"
임석진 감독의 목소리였다. 로커룸 입구에 서 있던 감독이 천천히 걸어왔다. 손에는 타올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아뇨."
준호가 대답했다.
"그럼 받아."
"받으면... 프로에 가야 하는데,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박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준호는 박준을 봤다. 박준의 눈빛이 변했다. 아침 우승 경기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더 깊었다.
"준호야."
박준이 입을 열었다.
"넌 우리 팀에서 가장 강한 선수가 아니야."
준호는 박준을 바라봤다.
"우리 팀에서 가장 약한 선수가 맞아. 무릎도 망가져 있고, 혼자 다 하려고만 하고. 근데 넌 우리를 믿었어. 마지막 경기에서 능력 쓸 수 있었는데, 우리를 택했어."
박준이 한 발 다가섰다.
"그래서 난 네가 프로에 가는 게 싫어. 이 팀에 남아서 우리 후배들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넌 가야 해. 아니면... 넌 계속 후회할 거야. 그리고 그 후회가 우리를 봤을 때 나올 거야. 그건 싫어."
임석진 감독이 손을 펼쳤다.
"전화 받아. 그리고 가. 우리가 너를 믿으니까, 넌 너 자신을 믿어라."
준호의 손이 떨렸다. 화면을 누르는 손가락이 멈췄다가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나왔다. 프로팀 대표의 목소리가 준호의 귀를 때렸다.
"이준호 선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귀 의향이 있으신가요?"
침묵이 흘렀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프로 무대. 그곳에서 자신은 누구였던가. 절박함 속에서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던 선수.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박준이 있고, 수호가 있고, 감독이 있다. 그들과 함께 이뤄낸 우승. 그것이 프로 무대의 화려함보다 더 무겁고 따뜻했다.
"죄송합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죄송하다고요?"
"네. 제 신체 상태상... 더 이상 프로 무대에 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아마 10초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연락이 끝나네요."
"감사합니다. 제안해주셔서."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계속 떨렸다. 박준이 준호를 안았다. 그 순간, 로커룸 안에 무언가가 터졌다. 박준의 어깨가 움직였다. 준호는 박준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쳤나봐. 넌 정말 미쳤어."
박준이 준호의 등을 두드렸다.
"고마워. 정말."
---
3개월이 지났다.
지방 소도시의 낡은 체육관. 천장은 여전히 낮았고, 바닥은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웃음과 응원 소리가 가득했다.
"준호 코치! 이 플레이 다시 봐줄래?"
후배 선수가 준호에게 달려왔다. 준호는 태블릿을 켰다. 영상을 돌려 보고, 손가락으로 궤적을 그렸다.
"여기 봐. 박준이가 스크린을 설정할 때, 넌 한 박자 빨리 움직여야 해. 그래야 수호가 패스할 때 오픈 슈팅이 나와."
"알겠습니다!"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코트 옆에 섰다. 박준과 수호가 드릴을 반복하고 있었다. 박준은 여전히 센터로, 수호는 여전히 포인트가드로. 그들은 준호의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
"좋아. 정지!"
준호가 외쳤다.
"박준, 이번엔 거기서 바로 탈탈이 아니라 한 번 더 돌려. 그래야 동쪽이 움직일 수 있어."
박준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수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코치, 너 진짜 달라졌어."
수호가 준호에게 다가왔다.
"뭐가 달랐어요?"
"예전엔 넌 항상 혼자 하려고만 했잖아. 근데 이제 넌 우리를 본다."
준호는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의 얼굴에 평온함이 떠 있었다. 그것은 절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도 그래. 처음엔 프로 가려고 했어. 근데 이제... 여기가 더 좋아."
박준이 다가왔다. 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단 세 글자였지만, 준호는 그 무게를 느꼈다.
---
저녁이 됐을 때, 이은정이 체육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준호는 테이프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은정은 준호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를 안았다.
"오빠, 진짜 잘했어. 이제 자신을 괜찮아하지 않아도 되지?"
준호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은정은 준호를 놓지 않았다.
"무릎은?"
"아직 통증이 있어. 하지만 악화되진 않아."
"그럼 됐어. 넌 이제 괜찮은 거야."
이은정이 준호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강남 체육관에서 준호와 함께 3점 내기를 하던 친구들이었다.
"준호! 이준호!"
그들은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반가움이 떠 있었다.
"오랜만이네. 어디 다니냐고 물어봤더니 여기래."
"우리도 좀 봐. 요즘 몸 쓸데가 없어."
그들은 준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친숙한 목소리들이었다. 2년을 함께한 동료들이었다.
준호는 그들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2년 전 강남 체육관 지하 계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새벽 6시,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3점 내기를 하던 자신. 돈을 따기 위해 슈팅 폼을 다시 교정하던 그 시간들. 그 친구들과 웃으며 내기를 했던 날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 있던 허무함. 프로에 가지 못한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절박함.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못 해."
침묵이 흘렀다.
"뭐? 왜?"
"더 이상 돈으로 슈팅을 하지 않아."
준호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단지 명확했다. 그 친구들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2년 전과 달라진 준호의 눈빛을 봤다. 그 눈에는 절박함이 없었다. 대신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그럼 안 돼?"
"응. 안 돼."
준호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감정이 있었다. 거절이 아니라, 감사였다.
그 친구들은 준호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준호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준호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
라커룸 문이 열렸다. 임석진 감독이 들어왔다. 손에는 새 신발 한 켤레가 들려 있었다.
"준호."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내일 아침 8시. 신입 선수 훈련이야. 넌 내가 설명한 플레이를 직접 보여줄 수 있겠지?"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신발을 준호에게 건넸다.
"코칭 스태프용이야."
준호가 신발을 받아 들었다. 검은색 코칭화였다. 선수용 신발과는 달랐다. 더 묵직했고, 더 단단했다. 손가락이 새 신발의 표면을 따라 움직였다. 밑창의 패턴, 끈의 질감, 발목을 감싸는 부분의 두께. 모든 것이 선수화와 달랐다.
이것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이었다. 슈팅을 하는 선수가 아니라, 다른 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 프로 무대의 화려함이 아니라, 이 낡은 체육관에서 후배들과 함께하는 일상.
준호는 신발을 천천히 신었다. 발을 집어넣고, 끈을 조였다. 신발이 발을 감쌌다. 낯설지만 편했다.
"이준호, 우리 팀의 코칭 스태프로 함께할 생각은 없나?"
감독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시작이다."
감독이 라커룸을 나갔다. 준호는 신발을 신발장에 정리했다. 옆에는 박준의, 수호의 선수용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도 팀에 남기로 했다. 지난 3개월, 그들은 프로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아니, 정확히는 준호가 결심한 순간 그들도 함께 결심했다.
준호는 신발을 한참 들었다. 코칭화와 선수화. 두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웃음이 나왔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다음날 아침 8시 정각. 준호는 코트에 섰다. 신발이 나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명확했다. 박준과 수호, 그리고 새로 들어온 신입 선수 세 명이 준호를 바라봤다.
"여기 봐."
준호가 손가락으로 공중을 그렸다. 삼각 패턴, 엘보우 피크, 롤 앤 팝. 신입 선수들의 눈이 따라 움직였다.
"박준이가 화면 최상단에서 스크린을 잡고, 수호가 이쪽으로 컷. 그럼 센터는 롤을 해서 페인트존으로 진출한다. 수호의 패스 타이밍이 여기야."
준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프로 무대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절박함이 없었다. 대신 확신이 있었다.
박준이 코트에 나왔다. 수호도 나왔다. 준호가 설명한 플레이를 직접 움직여 보였다. 신입 선수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플레이가 반복됐다. 박준이 스크린을 잡을 때마다 준호는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응답했다. 수호가 정확한 타이밍에 패스할 때마다 준호는 "좋아"라고 중얼거렸다.
훈련이 끝났다. 신입 선수들이 물을 마시러 갔다. 박준이 준호에게 다가왔다.
"코치 준호, 어때?"
"뭐가?"
"이 느낌."
박준이 웃음을 지었다. 준호도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박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박준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너희가 있어서."
---
밤이 깊었을 때, 준호는 혼자 코트에 섰다.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만 들렸다. 슈팅 폼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내일은 신입 선수들이 슈팅 폼을 배울 것이었다. 준호가 정확히 보여줘야 했다.
강남 체육관 지하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한지현이 나타났다. 프로 유니폼을 입은 한지현이었다.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보였다.
"너, 정태훈에게 졌는데 왜 우승했어?"
준호가 한지현을 바라봤다. 한지현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진정한 궁금증.
준호는 침묵했다. 그리고 결승전의 마지막 플레이가 떠올랐다. 박준이 페인트존에서 수호의 패스를 받아 슈팅하는 순간. 그 슈팅이 들어가면서 우승이 결정되는 그 순간. 준호는 그 플레이를 다시 한 번 보여주기로 했다.
준호가 손가락으로 공중을 그렸다.
"여기 봐. 결승전 마지막 플레이. 수호가 포인트 가드로 공을 몰고 들어와. 박준이가 스크린을 잡고, 나는 약한 쪽에서 움직여. 정태훈은 나를 막으려고 박준이를 따라가. 그 순간 박준이가 롤을 하고, 수호가 패스를 줘. 그리고..."
준호가 슈팅 자세를 취했다.
"박준이가 역전 슈팅을 한다. 이게 들어가는 거야."
한지현은 준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플레이를 봤다.
"정태훈이 틀렸어. 우리가 더 강한 게 아니라, 우리가 더 함께했어. 그게 다야."
준호가 손을 내렸다. 한지현은 준호를 봤다. 길게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한지현은 돌아섰다.
준호는 한지현의 뒷모습을 봤다. 그리고 다시 코트로 돌아갔다. 슈팅을 계속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슈팅이 계속 들어갔다.
---
해가 졌다. 주황색 빛이 체육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준호는 라커룸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갤러리를 열었다. 자신의 프로 시절 영상이 떴다. 화려한 경기장, 환호하는 관중, 준호의 슈팅이 들어가는 모습. 그 영상을 준호는 한참 봤다.
그리고 삭제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영상이 사라졌다. 프로 시절의 기록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대신 다른 영상을 켰다. 챔피언십 결승전. 박준의 역전 슈팅. 수호의 정확한 패스. 그리고 준호의 웃음. 로커룸에서 셋이 안고 있는 우승 트로피. 감독의 따뜻한 손이 준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한참 천장을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웃음이 나왔다.
내일 아침 신입 선수들과의 훈련. 박준과 수호가 보여줄 플레이. 그리고 자신이 설명할 전술들. 그것들이 준호의 미래였다.
프로 무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코트는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 속에 준호의 얼굴이 반사됐다. 그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다.